VIP 가분수
VIP 가분수
일본지역은 아직도 우리처럼 신용카드사용이 자유롭지는 못한 모양이다. 일본의 문화관광을 소개하는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많은 곳에서 대부분 신용카드가 사용되기는 하지만 아직 현금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다고 소개하고 있다. 일부 소규모 호텔조차도 현금만 요구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케이블 방송에서 계속 방영되고 있는 일본 프로그램 중에 시청률이 높다는 ‘고독한 미식가’라는 것이 있다. 일본 전국의 다양한 문화와 음식이 소개되고 있어 나도 즐겨보았지만 요즈음은 재방이 계속되고 있어 보지 않는다. 그 방송을 보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만들어진 최종 시즌의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식사 후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지폐를 지불하고 동전 거스름돈을 받아드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매장의 형태나 장소 및 사업자등록 여부에 따라 카드를 안(못) 받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소규모 재래시장에서도 대부분 카드 사용이 가능하며 자동차 행상이나 이동식 작은 점포에서 조차도 카드사용을 위한 이동식단말기를 갖추고 있고, 카드가 안 되는 곳에서는 그 자리에서 전화기로 대금을 이체할 수 있으니 주머니에 현금을 넣고 다닐 필요는 거의 없다. 그 카드조차도 전화기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지갑조차도 필요하지 않다. 과장된 이야기 같지만 미국에서는 강도에게서 무사하려면 카드 외에 주머니에 현금은 조금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다녀본 미국의 거리나 가끔 TV에서 비춰주는 모습은 그게 지어낸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신용카드가 한창 보급될 당시에 카드에 색깔이 있었다. 카드 사용 액수나 사회적 신분을 지칭하며 카드에 색깔을 넣어줬지만 사람들을 부추겨 카드사용액을 높이게 하는, 선택받은 것처럼 느끼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일종의 상술이었다. 실버도 있었고 골드도 있었다. 처음 최고등급은 골드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신분상승의 징표로 그 골드카드를 받으려고 과소비도 하였고 인맥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골드카드를 받으면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액수의 한도가 늘어나고 연간 지불해야하는 연회비도 올랐으며 정해진 한도의 금액을 사용하지 못하면 그 노란 색깔이 지속되지 않으니 체면 유지가 필요한 분들은 형편이 따라주지 않을지라도 그런 이유로 과소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카드를 받는 점포에서는 카드가맹점이라 하여 어떤 카드를 받는다고 매장 입구에 카드사스티커를 붙였었다. 외국의 결제사는 VISA와 MASTER였는데 지금처럼 외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은행카드에 두 기관 중 하나가 표시되어 있었고 가맹점 출입문 앞에는 외국인들을 위하여 두 기관의 스티커도 붙어 있었다.
그런 노란 카드를 자랑스럽게 소지한 분과 일본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매장 출입구에도 스티커가 우리처럼 그렇게 붙어 있었다. 부인을 위한 선물을 하나 고른 그 분이 물건 값을 지불하려고 문제의 그 골드카드를 카운터에 내밀자 계산원은 그 카드를 거절하였다. 그 분의 순간적인 한 마디 “골드 카든데 왜 안 받지?”가 독백처럼 흘러나왔다. 순간 내 평범한 카드를 건넸다. 그리고 계산이 되었다. 그 분은 더 놀라서 왜 내 카드는 되고 자신의 골드카드는 안 되냐고 내게 물었다. 우리는 일본어를 못하고 그들은 한국어를 못하고 영어는 안통하고 지금처럼 통역어플도 없었고, 그러나 ‘예스, 노’나 ‘O, X'는 통하였으므로 어설픈 손짓으로 물어본 바 그 계산원은 출입구 유리문을 가리켰다. 거기엔 VISA 스티커만 붙어있었다. 내 카드는 VISA였기 때문에 사용이 가능하였고 그의 골드카드는 MASTER였기 때문에 계산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점을 나서며 쇼핑백을 든 그에게 귀국해서 카드청구서 나오면 그 때 달라고 한 마디 하였지만 그의 독백은 나 혼자 속으로 한 참을 웃게 하였다.
골드카드가 만들어지고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자 몇 년이 지나서부터 여러 가지 각종 등급성 카드가 쏟아져 나왔다. 색깔을 표시한 카드, 보석이름을 표시한 카드 등등 골드보다 더 높은 신분을 느끼게 하여주는 것들이었다. 그러면서 골드는 그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더 이상 초창기 같은 신분상승의 징표가 아니었다. 징표의 가분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골드였던반면 나는 그 골드카드를 가져보지 못하였다. 출장이 잦아지고 비행기표를 신용카드로 계산하면서 카드 사용액수가 늘어나자 어느 날 카드사에서 연락이 왔다. 연회비가 골드보다 높지만 혜택이 많이 주어지는 ‘플래티넘’카드를 출시하는데 연회비에 동의하면 그 카드로 바꿔주겠다는 것이었다. 골드를 뛰어 넘는 신분상승이었다. 한창 활동하던 때인 만큼 그런 허세도 필요하겠다 싶어 그 카드를 소지하긴 하였지만 지금은 그게 모두 소용없는 짓이라 가지고 있는 카드 모두를 기본 연회비만 내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래도 사용한도는 줄어들지 않아 심심하면 “카드 세 장이면 집 한 채 사겠다”고 지껄이곤 한다. 그런데 지금은 골드나 플래티넘을 넘어 VIP, VVIP, 등으로 등급을 이어가고 있다. 심지어는 VVVIP는 물론 VVVVIP 등급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V가 많이 들어갈수록 신분이 상승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V가 들어간 등급에서도 다이아몬드나 에메랄드 등 보석 이름으로 또 등급을 나눈다고 한다. V자의 숫자가 그리 많아지니 카드나 공연계 및 백화점계 등을 막나하면 인구의 절반이 이미 VIP라고 하는데 그래서 이제는 V자가 하나만 들어가서는 예전 골드처럼 추락하는 신세가 되는 모양이다. 골드를 지나 VIP의 가분수가 시작된 모양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름-참기름-순참기름-진짜참기름-순진짜참기름 같은 모양새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의 땅 이름도 그렇다. 지자체 이름 중에 특별시, 특별자치도, 특례시 등이 들어가는 곳이 많다. 이러다 지역 이름도 VIP처럼 특별, 특례로 가분수가 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보통사람임을 강조하던 전직 대통령이 한 분이 문득 생각난다.
2025년 6월 19일
하늘빛
음악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Q1gVTmVXIBU 링크
Xuefei Yang plays "Eterna Saudade" by Dilermando Reis on a 1925 Santos Hernand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