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워낭소리

korman 2009. 2. 22. 16:55

 

 

워낭소리

 

 

토요일 오전에 잠시 밖에 나갔다 들어서니

집사람이 인터넷 예약확인서와 돈 2만원을 내민다.

받아 본즉 요새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다는 영화

“워낭소리”의 예매권이었다.

큰아이가 친구 만나러 나간다고 하면서

건네주고 갔다는 것이다.

돈은 웬 거냐 하니 저녁 예매권이고

자기도 저녁을 먹고 들어올 것이니 아예 일찍 나가서

엄마 좋아하는 순두부 맛있게 하는 집이 극장 근처에 있으니

그거 한 그릇 먹고 극장에 들어가라고 준 돈이라 했다.

며칠 전 뉴스를 보면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인천에서도 저 영화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그리하고 나간 모양이었다.

 

  

처음 자막과 설명이 나오기 전 뉴스에서 제목을 듣고

난 그것이 원앙새 소리를 뜻하는 것인 줄 알았다.

일소에게 방울을 다는 거야 예전부터 보아왔지만

그것을 워낭이라 하는 것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소 먹인다고 산으로 들로 소를 몰고 다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었음에도

워낭이라는 말을 들거나 사용한 기억은 없다.

그저 소방울 아니면 종이라 불렀을 뿐이다.

그것이 정겹고 순수한 우리말이라는 것을

이 나이에 이 영화를 통하여 처음 알았다.

 

 

사람으로 치면 백 살도 넘는다는 40년 된 일소와

소에 나쁘다고 농약이나 화학비료조차 쓰지 않고

당신의 불편한 다리는 지팡이에 의지하며

모두가 기계를 이용하는 힘든 일들을

손으로 하는 것 보다 깔끔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논밭 갈고 씨 뿌려 거두어들이는 일까지

모든 일을 성치 못한 당신의 몸과

당신보다도 더 늙고 힘겨워 보이는 일소에 의지하며

고집스레 당신을 지탱해 나가는 할아버지, 그리고

그런 할아버지의 고집과 일소 틈에서

16살에 시집와 9남매를 낳아 길렀으나

소만도 못한 인생을 사셨다고 독백하시는 등 굽은 할머니.

그저 이들의 생활을 기록한 것뿐인 이 다큐멘터리는

보는 이의 얼굴에 겉으로 흐르는 가시적 눈물보다는

자신을 팔러가는 것을 눈치 채고 흘리는 소의 눈물을 통하여

할아버지와 일소와 할머니에 대한 애절함이

마음속 눈물 되어 가슴을 파고들게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시각이 달라진다.

어떤 이들은 죽어가는 소에 관점을 두고 보았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할아버지의 삶에 무게를 주었을 터이며

또 어떤 이들은 자신에 대한 환영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소의 눈물을 따라 흘러내리는

할아버지의 희생이었다. 아버지로서의 무조건적인 희생.

성치 않은 당신의 다리로 쌀자루 하나 제대로 들 힘도 없으면서

당신보다도 더 걷기 힘겨워하는 늙은 소에 수레를 얹어

서울 방배동으로 보내는 하얀 쌀자루 위의 희생을.

 

 

방송에서 보여주는 이런 장르의 다큐멘터리에서 보통의 부모들은

없는 일도 만들어 자식에 대한 자랑을 한다.

그리고 감독들은 으레 그러한 장면을 한두번 정도는 작품에 삽입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9남매나 된다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자랑은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도 한통 없다.

단 한마디 할머니의 대사가 마음을 저리게 한다.

자식들이 농사일 하지 말란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다.

자식들은 추석에 자가용을 앞세워 부모를 찾아오지만

그저 소를 팔아야 아버지가 농사를 그만 두신다고 소 파는 이야기만 한다.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일만 하던 늙은 소가 불쌍하다 하였지만

진지하게 아버지를 소보다 더 걱정 하는 자식의 모습은 없었다.

이제 곧 돌아가실 것 같은 아버지의 모습 앞에서

그들은 희희낙낙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불쌍한 소파는 이야기만을 하다

아버지에게는 진심어린 말 한마다 건네지 않고 돌아갔다.

작품은 그 흐름이나 감독의 구상에 따라 편집이 된다.

그래서 자식들의 부모에 대한 마음이 잘려나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감독이 진정한 자식들의 마음을 싹둑 잘라낼 수 있을까.

늙은 소는 할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그 한 많은 세상을 버리고

이제 곧 소의 뒤를 따라가실 것 같은 할아버지는

소가 남기고 간 워낭을 백태가 끼인 나무토막 같은 손가락에 걸고

소가 힘겹게 오르던 집 앞마당 언덕길에 주저앉아 계신다.

 

 

할아버지의 자식들이 이 영화를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할아버지와 자식들의 가정사야 내가 알 수 없으므로

영화에 나온 것만 가지고 내 주관으로 추론하는게

옳은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작품에는 감상한 사람의 평이 뒤따르는 법,

나는 그리 평을 하고 싶을 뿐이다.

할아버지는 올해도 방배동으로 쌀자루를 보낼 수 있을 테지만

그들이 올해도 쌀자루를 기다리지는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부모의 토요일 오후를 위하여 마련하여 준 큰아이의 마음이

애비의 마음 속에 우울한 저녁을 심어준 꼴이 되었다.

 

 

2009년 2월 스무 이튿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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