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할머니 화롯불의 군고구마가 그립다.

korman 2016. 11. 27. 21:38




할머니 화롯불의 군고구마가 그립다.


엊그제 스산한 바람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침이 없더니 길거리가 샛노래졌다. 모든 은행나무 가로수 잎이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그야말로 추풍낙엽이라더니, 우수수 흘러내렸다. 그리곤 바람에 쫓겨 이리저리 구르다 막이가 되어주는 건물과 길가 모서리마다 수북하게 쌓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여명 속에 보이는 창밖 길거리에는 더 이상 노란빛이 없었다. 나뭇가지에도 도로바닥에도. 흡사 ‘마지막 잎새’의 그림처럼 은행나무 꼭대기마다 몇 잎씩 감나무 까치밥처럼 남아 있을 뿐 밤사이에 바람을 못이긴 이파리들이 모두 미화원의 빗질에 쓸려간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 은행잎으로 하여 방안에서도 가을의 정취를 바라볼 수 있었는데 깨끗한 아침의 거리가 가을의 서운함을 가져다주었다.


아직 초겨울 이라고 하기에는 좀 이르다는 생각이지만 연말로 달려가는 이 계절을 맞으면 저녁노을에 얼굴이 물드는 시간이 아니라도 그리운 곳이 있다. 고향이라는, 어쩌면 문득문득 안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나듯 그리 생각나는 모습이다. 특히 나이든 사람들이나 북에 고향을 둔 세대들은 더욱 간절해지는 것이 해넘이의 고향그리움 아닐까. 정들면 내가 있는 곳이 다 고향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고향이라는 단어는 그저 말만 들어도 마음이 푸근해지고 보모님이 그립고 커피 한 잔이라도 마시고 싶은, 그렇게 마음을 흔드는 말이다.


한 10여 년 전이었을까. 이웃에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밖에서 돌아온 집사람이 내 부모님 고향의 정확한 동네 이름을 물었다. 전쟁 중에 남으로 오신 부모님 고향의 도(道)와 군(郡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동네(面)까지는 나도 모르는 지라 왜냐고 되물었더니 그 할아버지와 승강기를 같이 탔는데 “바깥양반 고향이 OO도 OO군 OO면 아니냐?” 하더라는 것이었다. 어찌 아시냐고 하였더니 "내 고향이 거긴데 그 양반 말소리가 딱 그런데 뭐. 물어봐요. 내 말이 맞지.”하시더란다. 나중에 형님께 물으니 맞는다고 하였다. 사투리나 억양을 듣고 큰 범위의 지방, 도(道) 정도는 누구나 다들 짐작한다. 그러나 동네까지 짐작하시는 그 분이 참 신기하게 생각되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모님 고향을 떠나 남으로 오던 중간 기착지였기 때문에 사전적 의미로 보면 거긴 내 부모님 고향이긴 해도 내 고향은 아니거니와 난 초등학교 4학년부터 어른들과 헤어져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그쪽 지방의 사투리도 쓰지 않는다(내 생각이지만). 그런데 내 말소리를 듣고 알았다는 건 은연중에 내 말속에 그 지방 사투리와 억양이 있었고 그 분 또한 그 세세한 동네 억양까지 반세기가 지난 그때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아마도 그건 내 말소리 이전에 가슴에 깊이 간직한 그분의 고향그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문득 내 고향을 누가 물어본 적이 있나 생각해 본다. 누군가가 묻긴 물었을 테지만 내 기억에는 내 고향 보다는 내 부모님 고향을 묻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내 나이 또래의 많은 분들이 경험하였겠지만 나 보다는 먼저 부모님 고향이 어딘가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는 모양인지 친구 또래가 아닌 다음에야 어른들은 주로 부모님 고향을 묻곤 하였다. 사실 내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어찌 대답하여야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태어난 곳, 초등학교 3학년까지 자란 곳, 그리고 서울, 서울에서는 하도 이사를 많이 다녀 어느 동네라 꼬집어 말하기도 어렵고,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곳 등등. 고향이라고 해야 할 충분한 세월을 보낸 곳이 없으니 사전에 나와 있는 첫 번째 풀이대로 태어난 곳이 고향이라면 나 또한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가 되겠다. 김정은이가 바위마다 굴을 파고 백령도 방향으로 대포를 숨겨놓은 섬이 내가 태어난 곳이니까.


난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35년 이상을 살고 있다. 결혼하고 이곳에 정착을 하면서 집사람에게 아이들이 최종학교를 다 졸업하고 결혼할 때 까지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었다. 나처럼 학교친구는 있으나 동네친구는 없는 상황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2년 전에 이사를 하긴 하였으되 그저 같은 동네 몇 길 건너로 온 것이 전부였다. 앞으로 이곳에서 이사 갈 일은 없는 듯하니 아마 내 생애에서 이곳이 제일 오래 산 곳이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낳은 곳 보다는 이곳이 내 고향이라 하여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토박이로 이곳에서 35년을 보낸 아들녀석이 택시를 타고 나이 지긋한 기사분과 몇 마디 나눴는데 그 분 말씀이 “혹시 어른들 고향이 OOO도 아니냐?” 하더라며 할아버지는 뵌적도 없고 할머니와는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는데 자기 말투에도 그곳 억양이 숨어든 모양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 썰매 타다 들어오면 화로에 손 녹여 주시면서 화롯불에 묻어두었던 군고구마를 까 주시던 할머니와 같이 있던 곳이 고향 아닐까? 문득 손주를 셋이나 둔 이 나이에 할머니가 그리워진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다. 할머니 화롯불의 군고구마도 그리워진다. 그때도 함박눈이 많이 내렸었는데........


2016년 11월 26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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