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베리베리

korman 2017. 9. 1. 17:04




베리베리


‘각기병’이라는 게 있다. 정제된 쌀만 먹으면 비타민 B1이라는 영양소가 결핍되어 신경계, 심혈관계, 근육, 소화기 등에 이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아마 지금 좀 나이가 든 세대라면 어렸을 적이나 학창시절을 지나오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병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쌀이 부족하던 시절 쌀 소비를 줄이고 잡곡을 권장하면서 정부에서 국민들에게 강조한 것이 이 병이기 때문이다. 일부 부유층을 제외하고 일반 국민들은 잡곡조차도 충분한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쌀을 아끼고 자시고 할 시절은 아니었지만 각기병은 모든 국민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요새는 듣기 귀한 병명이 되어 구세대의 기억에서조차도 잊혔겠지만.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애국적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몸과 그 몸이 태어난 땅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이라는데 우리 몸에는 우리 땅에서 난 농산물이 좋다는 의미로, 국제협약이나 가격 때문에 외국의 각종 농산물 수입이 대량으로 시작되던 시절 농협에서 우리 농민들을 위해 만들어 국민들에게 호소(?)하던 사자성어 형식의 캠페인성 급조형 상업용어이다. 이 단어로 노래를 만들어 출세한 가수도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에 감격하여 국산 먹거리를 이용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단어 역시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져가는 단어가 되었다.


집사람이 즐겨보는 건강관련 TV프로그램이 있다. 암이라는 병명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건강문제 때문에 즐겨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런 프로그램이 마땅치 않다. 방송마다 그런 프로그램의 패턴은 똑 같다. 의학적 치료보다는 그날의 주제로 선정된 특정한 먹거리로 자신의 병을 치료했다는 일반인이 나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의료계 전문가들, 영양쪽 전문가들, 식음료 전문가들이 보조 출연하여 주제의 먹거리는 이런 저런 영양소가 많아 그 병에 좋다 어떻다 하며 시청자들에게 그 먹거리를 강조하는 프로그램이다. 의학적 치료를 배제하고 먹거리에 의존하여 치료를 하였다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전문가들이 나와 올바른 전문적 견해를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제를 살리기 위한 광고에 동참한다는 생각에서 싫어한다. 모든 병에는 의학적 치료가 우선되어야 하며 먹거리는 그 치료에 도움을 주는 보조 수단이 되어야 한다. 주제의 먹거리를 맹신하는 일반 출연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전문가들은 같은 병으로 투병하는 시청자들에게 올바른 지식을 전달해야 하는 의무를 가져야 한다.


내가 그런 프로그램을 광고성 프로그램이라 단정하는 이유는 주제로 선택된 먹거리가 거의 수입산이라는 점이다. 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저런 먹거리가 수입되지 않았을 때는 또는 그걸 먹지 않고 있는 나 같은 사람 ‘모두는 그 병에 걸렸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든다. 따지고 보면 불루베리가 처음 수입되었을 때 그게 만병을 통치하는 것처럼 광고 되었고 초창기 완전 베스트 셀러였다고 한다. 무슨 호주산 납작한 콩이 그렇고 카카오 닙스가 그리 되었으며 최근에는 아로니아라는 게 그리 포장되었다. 광고성이 아니라면 전문가들은 그 먹거리에 내포된 영양소만을 강조할 게 아니고 우리의 어떤 농산물에 그 좋은 영양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같이 소개하여야 한다. 내가 서두에 ‘각기병’과 ‘신토불이’를 꺼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도 누군가는 각기병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신토불이가 강조될 때 거기에 동참하여 TV에 나와 우리 농산물을 강조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요새는 우리 농산물 보다는 수입산이 더 많다. 그리고 각기병이 아니라 쌀을 많이 먹으라고 사정하는 시절이 되었다. 매번 제사상이나 차례상을 차릴 때 많은 주부들이 걱정을 한다. 수입산을 배제하려해도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난 집사람에게 그거 가리지 말라고 한다. 그저 자손이 지금 먹고 있는 것을 조상님들께도 드리면 되지 뭘 꼭 신토불이를 따지냐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신토불이, 그러나 병을 내세워 특정한 수입산 먹거리 강조하는 광고성 프로그램에 동참하는 전문가들은 그 먹거리의 맞춤형 전문가가 되지는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나저나 각기병의 영문명이 ‘beriberi'라는데 이 말은 스리랑카말로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할 수 없다.”라 한다. 지금도 먹거리가 풍족하지 않는 스리랑카에서 쌀과 관련된 국제적 용어가 탄생한 것도 아이러니 하지만 몸에 무지하게 좋다는 레드베리, 불루베리, 무슨 무슨 베리가 수도 없이 많은 세상에 각기병이 베리베리라니 풍족한 나라의 베리와 가난한 나라의 베리는 이리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아침 저녁 선선한 9월이 되었다. 나도 가을 몸보신으로 베리나 먹어볼까?


2017년 9월 1일

하늘빛

음악 : 영화 "만추(晩秋, Late Autumn)" OST from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