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40> 주종장 김애립
국가 대포 ‘불랑기포’ 만든 당대의 뛰어난 장인
볼룩하게 솟은 천판 용뉴 중심
연화판 둥글게 돌아가며 ‘장식’
대흥사 운흥사 능가사 종 제작
진주 고성 등 경남 지역 ‘활약’
통정대부, 절충장군 직도 받아
17세기 중엽부터 말까지 승장 사인비구(思印比丘)와 쌍벽을 이루며 사장계(私匠系)를 이끌어나갔던 김애립(金愛立)은 전라남도의 순천과 고흥, 그리고 경상남도의 진주, 고성 등과 같이 남해안에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범종과 쇠북(金鼓), 발우(鉢盂)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발한 제작활동을 했던 인물이었다.
불룩하게 솟아오른 천판과 용뉴를 중심으로 연판문을 둥글게 돌아가며 장식하는 의장 표현은 김용암(金龍岩) 종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으로 김애립 범종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그는 대흥사종(大興寺鐘, 1665), 운흥사종(雲興寺鐘, 1690), 능가사종(楞伽寺鐘,1698)을 만들었고 흥국사(興國寺) 발우(1677), 청곡사(靑谷寺) 금고(1681)와 청곡사 대발우(1684)를 비롯하여 사장이면서도 유일하게 국가에서 감독한 불량기포(佛狼機砲, 1677)를 제작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도 매우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았던 장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1665년에 제작된 여수의 흥국사종은 명문에 의하면 원래 순천 동리산(順天 桐裏山)의 대흥사(大興寺)라는 절에서 750근의 중량을 들여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종의 외형은 상부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약간씩 벌어져 마치 포탄과 같은 모습을 하였다. 두 마리의 쌍용으로 구성된 용뉴는 고리 부분을 하나의 가느다란 몸체로 연결시켰고 정상부에는 두발로 보주를 받쳐 든 형태이다.
음통이 없는 대신 천판 중앙부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이 구멍을 중심으로 2겹으로 구성된 8잎의 연화문이 천판 외곽까지 이어지도록 시문되었다. 종신의 상부에는 상대의 표현이 없이 한 줄의 융기선만을 둘렀고 그 아래로는 12자의 범자문을 내부에 ‘육자광명진언(六字光明眞言)’이라고 양각된 원권(圓圈)과 함께 시문하였다.
범자문 아래의 종신 중단쯤에는 사다리꼴의 연곽을 네 방향에 배치하였고 연곽대 안으로는 물결치는 듯한 3조의 융기선을 중심으로 그 안팎에 유려한 당초문이 장식되었다. 그리고 각 연곽 안에는 8엽의 화문좌(花文座) 위에 낮게 돌기된 연뢰를 9개씩 배치하였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 네 면에는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이 1구씩 도합 4구가 시문되었는데, 보살상의 머리 위로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유려한 천의를 걸친 모습이다. 종신 아래 부분에는 많은 시주자 명단과 제작자 등이 기록되었다.
나아가 김애립은 다른 장인들과 달리 범종만 제작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 소속된 관장들이나 가능한 국가의 대포 제작에도 참여한 점이 주목된다. 김애립이 제작한 불랑기포(佛狼機砲)는 두 점이 확인되는데, 남포시 강서구역에서 출토되었다는 북한 소재의 1676년작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1677년명 포이다.
여기에 기록된 명문에 의하면 김애립은 신기립(申起立)의 감독 책임 아래 불랑기포를 완성할 때까지 이름 앞에 아직 변수(邊手), 또는 장인(匠人)이라고만 기록하였다. 특히 김애립은 1665년 대흥사종에서는 직책을 사용하지 않다가 불랑기포를 제작한 4개월 후 흥국사 발우에서 처음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관계를 사용하게 된다.
물론 실제의 관직은 제수 받지 않았겠지만, 일반 백성이 의무적으로 치러야 했던 부역을 김애립은 대포를 제작하는 관장의 역할로 대체한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즉 당시로서도 관장(官匠)이나 가능했던 국가의 대포를 사장이었던 김애립이 제작하게 됨에 따라 통정대부의 명예가호를 사용하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1681년에 들어와 제작한 청곡사 금고는 그동안 범종을 중심으로 다양한 주조활동을 하였던 김애립이 진주를 포함한 경남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한 행적을 밝혀준다. 명문에 의하면 1681년에 청곡사용으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어 많지 않은 조선 17세기 금고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전체 직경은 79cm로서 뒷면이 넓게 뚫려 공명구가 형성된 통식의 금고이지만 고면(鼓面)에는 아무 장식이 없이 두 줄의 동심원만을 선각으로 시문하여 3구로 구획하였다. 원형의 당좌구(撞座區)는 그 전체가 한단 높게 돌출되어 있으며 후면의 이 부분에 불좌상을 음각시켜 주목된다. 측면에는 2줄의 융기동심원을 둘렀고 이 곳 한단에 3개의 반원형 고리와 세로로 음각 명문을 새겼다.
1684년에는 같은 청곡사에서 청동제 발우를 제작하는데, 직경이 92cm에 이루는 대형의 그릇이다. 구연은 바깥으로 외반되었고 몸체 측면 양쪽에 하나가 아닌 두 개씩의 둥근 고리가 달려있는 점은 중량을 고려하여 들기 편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몸체 아래로는 높은 굽이 달려있다. 명문에는 ‘양공통정대부김애립(良工通政大夫金愛立)’ 이라고 기록되어 흥국사 발우부터 사용된 통정대부의 관계를 그대로 지속하고 있다.
김애립은 흥국사종을 만든 25년 뒤인 1690년에 운흥사종을 제작하였다. 이 종은 현재 일본 토쿄 시내에 위치한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 지하 1층에 전시되어 있다. 하나의 몸체로 연결된 쌍용의 용뉴와 용뉴 주위를 돌아가며 장식된 천판의 연판문은 흥국사종과 동일하지만 그에 비해 입체감이 더욱 강조되었다.
종신의 상부 쪽에는 상대 없이 원형 테두리를 두른 범자문을 둥글게 돌아가며 장식하였고 연곽은 흥국사종에 비해 조금 아래쪽으로 더 내려온 중신 중단쯤에 위치하고 있다. 연곽대에는 흥국사종의 당초문과 유사하지만 굴곡이 보다 완만해지고 그 내, 외부를 넓은 잎으로 장식한 점이 다르다. 연곽 내의 연꽃 봉우리는 크기가 좀 더 확대되었다. 연곽과 연곽 사이에 배치된 4구의 보살입상은 몸을 오른쪽으로 돌린 채 합장한 모습으로서 둥근 두광을 지니고 양 어깨에 걸친 통견법의에 독립된 연화좌를 밟고 있는 모습이 흥국사종과 거의 동일하다.
한쪽 종신 면 보살상 옆에 붙어 위패형의 명문구를 장식하여 내부에는 ‘주상삼전하수만세(主上三殿下壽萬歲)’라는 명문을 유려한 필치로 양각하였다. 그리고 보살상과 연곽 바로 아래의 종신 하부를 돌아가며 새겨진 양각의 명문에는 ‘1690년에 고성현 서산령와룡산(固城縣 西山領臥龍山)의 운흥사대종(雲興寺 大鐘)으로 500근의 중량을 들여 제작된 것’과 말미에는 종의 제작자인 ‘통정대부 김애립과 조역인 김예발(金禮發)’의 이름을 기록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김애립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해당되는 것이 1698년의 명문을 지닌 고흥 능가사종이다. 거의 그의 말년에 제작되었지만 오히려 그 크기나 기술적 역량 면에서 가장 최고조에 달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종신의 전체적인 외형은 상부가 좁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넓게 벌어져 운흥사종 보다는 흥국사종과 유사하다. 쌍룡으로 구성된 용뉴의 정상부는 여의주를 움켜쥔 모습이지만 용의 비늘과 용두의 표현 등이 더욱 역동감 있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천판 위 중앙에 뚫린 소공을 중심으로 주회된 연판문도 상·하 2단의 층단을 이루며 중첩 시문된 점이 독특하다. 상대 없이 천판의 연결 부분에는 1조의 융기선만을 시문하였고 그 아래로 원권을 두른 12자의 범자문을 주회시켰는데, 이 역시 앞서의 범종들에 보이던 범자문과 동일한 표현이다. 연곽은 운흥사종에 비해 조금 더 종신 상부 쪽으로 올라가 있으나, 연곽대 안의 당초문과 연뢰는 동일하여 앞 시기의 문양판을 계속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곽과 연곽 사이마다 배치된 4구의 보살상은 앞에 보이는 보살상의 도상과 달리 화려한 보관과 부풀어 오른 대의(大衣)의 앞자락 주위로 지느러미 같은 장식이 첨가되어 제석· 범천상(帝釋·梵天像)을 표현한 것으로 믿어진다. 종신 한쪽에도 위패 장식을 첨가하였는데. 흥국사종의 형태와 거의 유사하다. 그러나 보살상과 연곽대 바로 아래 붙어 팔궤(八卦)를 장식한 점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요소이다. 하대는 운흥사종과 마찬가지로 종구에서 조금 떨어진 위쪽으로 올라와 배치되었다.
종신 중단에 빽빽이 기록된 명문에는 이 종이 흥양팔영산능가사(興陽八影山楞伽寺)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당시의 제작자로는 ‘절충장군 김애립(折衝將軍 金愛立)’과 그 아래로 ‘통정 김예발, 통정 김구찬, 이미남, 강옥선(通政 金禮發, 通政 金貴千, 李昩南, 姜玉善)’의 인명을 확인할 수 있다.
앞서까지 통정대부를 사용하던 김애립이 수장으로 그 지위가 더욱 확고해진 듯 ‘절충장군(折衝將軍)’이라는 한 단계 격상된 명예 관계를 사용하게 된 점과 그의 조역이었던 김귀천과 이말남이 통정의 관계를 물려받게 된 당시 주금장 사회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김애립은 흥왕사 발우의 명문에 보이는 것처럼 ‘주조장인경상도진주지소통정대부김애립(鑄造匠人慶尙道晋州地所通政大夫金愛立)…’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어, 출신지가 진주였음이 확인된다.
그런 점에서 김애립은 진주 청곡사나 고성 운흥사와 같은 경남 지역을 근거로 활발한 주조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으며 이 시기 사장 가운데 가장 높은 관계를 사용하였던 대표적 장인이라 점에서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불교신문3432호/2018년10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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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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