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한국의 美]독창적 선(禪)의 기조와 곡선미

korman 2007. 5. 9. 21:31

[한국의 美]독창적 선(禪)의 기조와 곡선미



우리나라 사람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아름다운 자연과 벗할 수 있는 매력도 있지만 고즈넉이 자라잡고 있는 산사를 구경하는 재미가 산을 찾는 의미를 배가할 때가 많다.


종교적 의미를 제쳐놓고서라도 누구나 여행을 할 때면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 한 사찰을 구경하는 것은 필수코스처럼 되어 있다.

2년 전 2005년 양양 낙산사의 화재가 뉴스로 생생하게 전달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화염에 녹아버린 낙산사범종의 형체는 그것을 보는 내내 나 역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녹아내린 낙산사범종을 보면서 항상 휙 지나쳐버린 사찰의 범종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사찰을 방문하게 되면 대웅전의 불상, 사찰단청, 불화, 역사적인 석탑 등 유물을 만나기도 하고 오래된 보호수와 주변 경관을 음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범종은 보호각에 들어 있어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보거나 안내문을 읽는 정도이다. 보물이기 때문에 보호하려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범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국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흔치 않다. 그리고 몸 전체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형미를 놓치는 수가 많다.

소란스럽지 않게 언제나 늘 그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범종. 한국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불교문화 중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희망적 의미를 지닌 범종의 한국적 조형미감을 살펴보자.

시대의 독창적 조형미를 간직한 범종

범종은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교공예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식 법구로 금고(金鼓), 운판(雲版), 목어(木魚)와 함께 불전사물(佛前四物)의 하나이다. 범종은 경종(警鐘), 조종(釣鐘), 당종(撞鐘), 범종(梵鐘)이라고도 하며, 하늘과 땅 그리고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흔히 범종 종신의 상부에는 용종의 ‘뉴(鈕)’에 해당하는 천판(天板), 즉 종정(鐘頂)을 두 발로 딛고 머리를 숙여서 종 전체를 물어 올리는 듯한 용뉴가 만들어져 있으며, 구부린 용의 몸체에 철색을 끼워서 용뉴에 매달아 놓는다. 유곽에는 볼륨감 있는 아홉 개의 유두가 배치되어 있으며, 유곽 아래에는 보상살이나 비천상 그리고 연화문 당좌 등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범종은 크기와 모양이 일정하지 않으나 신라시대의 종이 조형미로 으뜸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갈수록 다소 변화하였으나 어느 시대든 나름대로 독창적인 조형미를 읽을 수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 종의 형태와는 다른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형태는 매달기에 편리하도록 용뉴(龍鈕)와 음향의 효과를 위한 용통(甬筒)이 종의 맨 윗부분에 있고, 그 아래 몸체는 상대(上臺), 중대(中臺), 하대(下臺)로 구분되고 이들 사이로 유곽(乳廓)과 당좌(撞座)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당좌 사이에는 비천(飛天)이나 불상, 보살상, 나한상들이 표현되기도 하는데 특히 비천상은 신라시대 종의 조각수법이 뛰어나다. 보통 청동으로 만든 것이 많지만 드물게 철로 주조된 예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헌상으로 《삼국유사》 권4, 〈황룡사종조(皇龍寺鐘條)〉에 신라 경덕왕이 754년 황룡사에 길이 1장 3촌, 무게 49만 근에 달하는 큰 종을 주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금속공예의 주조기술과 규모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남아 있는 유물 중에서는 신라시대의 상원사 동종이 가장 오래 되었다.

또 크기와 형태미를 대표하는 신라 성덕대왕신종이 있으며 실상사 범종과 선림원지 동종은 현재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신라 범종의 전통을 이어 많이 제작되었으나 형태가 투박해지고 문양표현을 위한 주조기술이 정교하지 못한 점 등 약간의 퇴보를 보이면서 크기도 작아져서 30㎝ 정도의 공예적인 성격이 강한 소종(小鐘)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범종은 고려종의 형식을 계승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보인다.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독창적인 한국의 아름다움도 차츰 퇴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시대별로 그 조형미감을 알아보기로 한다.

신라범종의 백미 상원사동종

신라의 범종은 그 형식이 중국이나 일본종과 크게 다르기 때문에 ‘한국종(韓國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종의 전체 형태는 대포 포탄의 머리를 잘라버린 것처럼 전체적으로 위로 좁아지는 원추형으로 되어 있다. 종신(鐘身)의 아랫부분 3분의 2 정도 되는 곳이 가장 넓고 그 밑은 다시 약간 축약되어 매우 안정되고 견고하고 매듭 지워진 외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종신의 상단에는 상대(上帶), 하단에는 하대(下帶)라고 불리는 무늬띠가 있다. 상대에는 사각형의 무늬띠로 둘러싼 유곽(乳廓)이 네 군데 똑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유곽 속에는 아홉 개의 유두(乳頭)가 3열로 박혀 있다.

종신의 상부로 올라가면 천판(天板) 즉 무(舞)라고 불리는 부분에는 사지로 땅을 밟고 머리를 숙여 땅바닥을 물어뜯고 있는 듯한 용형상의 꼭지(龍形鈕)를 만들어 그 구부러진 구멍에 철색(鐵索)을 끼어 종루에 매달도록 하였다. 또 용뉴(龍鈕) 옆에는 음관(音管) 또는 용통(甬筒)이라고 불리는 가운데가 빈 대롱 모양의 유통(鈕筒)을 만들었다.

그런데 유곽을 보면 중국종은 ∧형의 꼭지끈(鈕) 뿐이고, 탁(鐸; 방울)에는 ∧형 대신 용(甬; 대롱)이 있을 뿐이다. 중국종의 용(甬)은 외형적으로는 우리나라 용통과 똑같이 보이나, 내부가 비워있지 않기 때문에 순전히 손잡이 역할만 한다. 신라종(新羅鐘)은 종(鐘)과 탁(鐸)을 혼합한 형식이긴 하지만 용(甬)의 내부를 비워서 종신과 서로 맞뚫리게 한 독창적인 형식이다.

한국종이 언제 어디에서 먼저 만들어졌는지는 현재 고구려나 백제의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725년에 주조된 오대산 상원사의 종이 가장 오랜 작품으로 남아 있다. 이 외의 신라종은 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771년), 파편만 남아 있는 선림원종(국립중앙박물관, 804년), 일본에 있는 상궁신사종(常宮神社鐘, 832년) 등이 있다.
어느 해 겨울 잔설이 제법 많이 남아 있을 즈음 오대산 상원사 사찰 마당에 창살로 된 범종각 사이로 좀 더 자세히 비천상을 보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상원사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 신라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모아 이룬 종으로 우리나라 종 중에서 조형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종이다. 종신 상부 천판의 명문에 의하면 725년 휴도리(休道里)라는 귀부인이 기증한 것으로 문양띠는 모두 당초문과 반원형 구획 속의 천인상(天人像)으로 장식되어 있다. 높이가 1.67미터이니 한국 남자 보통 키나 되는 큰 종이며 종의 어깨부터 종구(鐘口)에 이르는 종신의 긴 곡선은 은근스러우면서도 단아한 기품을 보이고 있어 소위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운 기조를 보여주고 있다.

종신에는 당초문대(唐草文帶)를 갓장식으로 한 연화문당좌와 나란히 마주 앉은 주악천인상을 두 군데 배치하고 있다. 또 유통에는 상하연판대와 화엄사 석등 간석(竿石)과 같은 꽃문양을 교대시키고 있다. 상원사종의 전체 모습과 무늬의 수법은 천인(天人)의 바람에 날리는 천의(天衣)자락의 선 등 모두 봉덕사종에 비해 부드럽고 간결하며 여러 점에서 현존하는 신라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봉덕사종(성덕대왕신종)은 일명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는데, 높이가 3.28미터이고, 아래 종통의 지름이 2.27미터, 두께가 23센티미터나 되는 거대한 종이다. 종에 새겨진 1000여자나 되는 긴 명문에 의하면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경덕왕과 혜공왕의 2대에 걸쳐 유아를 희생시켰다는 전설까지 낳는 고심 끝에 주조된 것이다.

형태는 상원사종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유두가 편평한 연화문으로 되어 있고 종 하단은 당나라의 여덟 개 모서리를 가진 거울 즉, 팔릉경(八稜鏡)처럼 팔릉화형(八稜花形)으로 되어 있으며 판단마다 연화문을 한 개씩 배치하고 있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종을 치는 당좌(撞座)는 유곽 사이의 아랫부분에 한 개씩 두 개가 있으나 긴 명문을 비천(飛天) 위치에 두었기 때문에 한 자리에 있어야 할 쌍비천을 둘로 갈라놓았다. 그 결과 유곽 아랫부분 공간에 하나씩 비천에 놓여 있다. 봉덕사종은 문양띠의 보상화문은 도안이라기보다는 그림처럼 사실적으로 힘 있게 묘사되어 있으며, 비천의 모습도 매우 입체적으로 되어 있으며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신라 전성기의 원숙한 미술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력 넘치는 정교한 아름다움과 숙련미는 804년 선림원종(禪林院鐘)에서 섬세함이 떨어지고 무력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832년 일본의 상궁신사종상궁신사종(常宮神社鐘)에 이르러서는 쇠퇴의 모습이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전의 상하대 당초문은 파문(波文) 같은 세선문(細線文)으로 바뀌고 비천도 약화되어 조잡해져 봉덕사종에 비하면 후퇴된 양상이 현저하다.

신라종을 대표하는 상원사종이나 봉덕사종은 용뉴의 섬세한 용 형상도 빼어나지만 종신의 공간과 비천, 당좌의 크기, 위치 등 공간 구성도 매우 빼어나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 한국적 조형미가 잘 표현된 미술사적 가치도 크다.

조각수법이 빼어난 고려 탑산사동종

고려시대에는 종을 만들기 위해 구리로 만든 그릇 등을 기부하도록 강요를 하여 불가사리라는 괴물 전설까지 낳게 하였다. 그러나 종의 크기는 작아지고 시대가 내려가면서 제작이 조잡해져서 화려하고 독창적인 통일신라 종의 전통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고려 종의 특징으로는 첫째, 경구에 대한 종의 높이의 비율을 보면 신라종의 경우는 1대 1.3 내외인데 비해, 고려종은 전기에는 1.2 내지 1.1로 내려가며, 그것도 12세기 이후에는 입지름이 40센티미터 미만의 소형으로 변하고 구경과 종의 높이가 대략 비슷해진다. 둘째, 상대상반부에 연판대가 부가되다가 12세기에는 그것이 더 올라가 밖으로 차양처럼 돌출하며, 12세기경부터 유통 위 끝에 구형의 장식이 부착된다. 그리고 비천상 대신 여래상이나 보살상 등 입상(立像)이 나타난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종은 모두 합해 최소 70구를 넘을 것인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010년에 주조된 천흥사종과 1058년에 주조된 여주 상품리의 청녕4년명종(淸寧四年銘鐘)이 있으며 1222년 주조된 내소사종, 1223년의 월봉사종이 있다. 그리고 1249년에 만든 오성사종은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연대명이 없는 것으로 해남 대흥사의 탑산사종, 고려대학교박물관의 두정사종(頭正寺鐘), 숭실대학교박물관의 매산고고관종(梅山考古館鐘) 등이 있다.

고려범종 중 성거산천흥사동종(聖居山天興寺銅鐘)은 국보 제280호로 11세기 초의 작품이다. 국내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종 가운데 가장 커다란 종으로 크기는 종 높이 1.33미터, 종 입구 96센티미터이다. 종위에는 종의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소리 울림을 도와준다는 용통은 대나무 모양이며, 편평한 부분인 천판 가장자리에는 연꽃무늬를 돌렸다. 몸체의 아래와 위에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한 너비 10센티미터 정도의 띠를 두르고 꽃과 덩굴로 안을 채워 넣었다.

유곽 아래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원형으로 2곳에 두었고, 구슬로 테두리하고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당좌 사이에는 2구의 비천상을 두었는데, 1구씩 대각선상에 배치하여 신라종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용뉴나 유통, 유곽, 상하문대, 비천 등 모두 신라종 그대로이며 충실하게 모방한 고려종 중 빼어난 조형미를 갖춘 종이다.

그리고 여주출토 청녕4년명동종(驪州出土 淸寧四年銘銅鐘)은 1967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품리에서 고철 수집 때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는 한마리의 용이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이며, 소리의 울림을 돕는 용통은 6단으로 구분되어 있다. 용통의 각 부분마다 덩굴무늬를 양각하였다.
종의 상단과 하단, 9개의 돌출된 모양의 유두를 둘러싼 사각형의 유곽에는 가늘게 연이은 구슬 모양의 띠를 돌리고, 그 내부에 모란 덩굴무늬를 장식하였다. 유곽내의 유두는 꽃으로 도드라지게 표현하였다. 종 몸통에 있는 비천상은 천흥사종(국보 제280호)과는 달리 4곳에 있으며, 특히 대칭대는 곳에 보관을 쓴 2구의 보살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 역시 종 몸통에 보살상과 교대로 4곳에 있다.

내소사고려동종(來蘇寺高麗銅鐘)은 고려 시대 동종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종으로 종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고, 어깨부분에는 꽃무늬 장식을 하였다. 종의 어깨 밑에는 사각형의 유곽이 4개 있고, 그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유두가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는 연꽃으로 장식했고, 종의 몸통에는 구름 위에 삼존상이 새겨 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좌·우 양쪽에 협시불이 서 있다. 종 정상부에는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과 큰 용머리를 가진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가 있다. 1222년(고려 고종 9년)에 청림사 종으로 만들었으나, 1850년(조선 철종 원년)에 내소사로 옮겼다.

한국 종의 전통을 잘 계승한 종으로, 그 표현이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고려 후기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외에도 탑산사동종(塔山寺銅鍾)은 신라 형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에 새로 나타난 특징들을 잘 보여주는데, 전체 형태는 상원사 동종을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운 선을 갖고 있으며, 각종 조각 수법이 빼어나 고려시대 걸작으로 손꼽힌다.

독창성과 변화의 조화 조선 화계사동종

조선시대 범종은 고려종의 형식을 계승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상대 아래에 새로운 범자대(梵字帶)가 돈다든가 그러한 부가된 문양대에 의해 유곽이 부득이 상대에서 떨어져나가 종신 쪽으로 내려오는 등의 변화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범종은 상당수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1462년의 천흥사종, 1468년의 보신각종, 1491년의 해인사적광전종, 1584년의 공주갑사종 등이 있다.

갑사동종(甲寺銅鐘)은 조선 초기의 종으로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매달 목적으로 1584년(선조 17년)에 만들어졌다. 종의 어깨에는 물결모양으로 꽃무늬를 둘렀고, 바로 밑에는 위 아래로 나누어 위에는 연꽃무늬를, 아래에는 범자를 촘촘히 새겼다. 그 아래 4곳에는 사각형모양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는 가운데가 볼록한 연꽃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종의 몸통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따로 두었고, 그 사이에는 구름위에 지팡이를 들고 있는 지장보살이 서 있다. 종 입구 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다. 이 종은 일제강점기 때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되었다가, 광복 후 갑사로 옮겨온 민족과 수난을 같이 한 종이다.

2005년에 소실된 낙산사동종은 보물 479호로 강원 양양군에 1469년(조선 예종 1년)에 그의 아버지인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布施)한 종이다. 종 꼭대기에는 사실적이고 기품 있어 보이는 용 2마리가 서로 등지고 있어 종의 고리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 부분에는 연꽃잎으로 띠를 둘렀다. 몸통에는 가운데 굵은 3줄을 그어 상·하로 나누고, 위로 보살상 4구를 새겼다. 보살상 사이사이에는 가로로 범자를 4자씩 새기고, 보살상 머리 위로는 16자씩을 새겨 넣었다.

몸통 아래로는 만든 시기와 만들 때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종의 밑 부분에는 너비 9.5센티미터의 가로줄이 있어, 그 안에 당시에 유행하던 물결무늬를 새겨 넣었다. 큰 종으로는 조각수법이 뚜렷하고 모양이 아름다워 한국 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손꼽혔으나 안타깝게도 전소되었다가 다시 복원하였다.

서울 화계사동종과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의왕 청계사동종(儀旺淸溪寺銅鍾)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보물 제11호인 강화동종, 포항 보경사의 서운암동종, 문경 김룡사동종, 홍천 수타산동종, 양산 통도사동종, 안성 청룡사동종 등 현존하는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는데 그의 작품들은 우수성을 인정받아 8구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 중 의왕청계사동종의 높이는 115센티미터, 입지름은 71센티미터이며, 무게가 700근이나 나가는 큰 종이다. 종의 꼭대기에는 두 마리의 용이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고, 어깨와 종 입구 부분에는 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가 있다. 어깨 띠 아래로는 연꽃모양의 9개의 돌기가 사각형의 유곽 안에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보살상들이 서있다. 종의 허리에는 중국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2줄의 굵은 횡선이 둘러져 있고, 그 아래로 글이 남아 있어 만든 사람과 시기를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종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사찰마다 먼저 눈에 띄는 범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곡선의 아름다움과 전통문양을 알 수 있는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건, 다른 종교인이든 간에 이러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내는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의 복됨과 좋은 길로의 구제를 기원하며 가까이 있는 범종을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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