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운전자의 교통카드
친구들과의 모임을 파하고 늦은 시각 동인천역에 오는 마지막 전철을 탔다. 늘 그렇듯이 막차를 타고 동인천역에 도착하면 집 근처로 가는 버스가 끊어진 후이다. 동인천역에서 마지막 버스가 10여분쯤 후에 출발하면 마지막 전철로 도착한 사람들을 싣고 갈 수 있는데 연장되지 않는 것이 늘 아쉽다.
버스가 없으니 어쩌랴. 택시를 탔다. 택시는 지붕에 택시임을 알리는 파란 모자를 얹고 다닌다. 그 가운데서도 개인택시는 초록색 비슷한 색깔의 모자를 얹었다. 개인택시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다. 몇 년간의 모범운전 경력이 있어야 소유할 자격이 주어지고 시민들은 그들을 모범운전자라 부른다. 그래서 그런지 개인택시 지붕의 모자 빛깔이 일반 회사 소유의 택시와는 조금 다르다. 그런데 개인택시에는 모자 생김새의 정해진 표준은 없는지 어떤 택시에는 왕관 비슷하게 생긴 모자를 얹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어김없이 모자에 신호등 모양이 있고 한글로 “모범운전자” 그리고 영어로 “BEST DRIVER"라 써넣고 다닌다. 우리말의 모범을 누가 영어로 BEST라 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자화자찬이다.
자화자찬이 아니더라도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이들은 당연히 모범적이어야 하고 일반 택시들과는 다른 면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의 모임에서는 좋은 일도 많이 한다. 길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손님에게 보다 나은 친절도 베풀고. 예전에는 이들의 유니폼이 노란색이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혼자 택시를 타시는 일이 있으면 꼭 노란 옷을 입은 운전자를 골라 타시라는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사람에 따라서는 모범이라는 말이 무색한 개인택시들이 많이 있다. 요새 한창 말썽이 생기는 짝퉁 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울도 요새 교통카드로 요금을 지불하는 택시가 많이 생겼는데 인천에서는 몇 년 전부터 모든 택시의 요금으로 교통카드가 통용되고 있다. 단말기를 100% 달고 다니니 의무사항인 모양이다. 또 교통카드로 요금을 지불하면 요금도 깎아준다. 그래서 세상 참 편해졌구나 하고 택시를 탈 때면 거의 교통카드를 이용한다. 동전도 생기기 않고 얼마나 좋은가. 대부분의 기사들은 아무 말 없이 교통카드를 받는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그렇지 못한 기사도 경험하게 된다. 그것도 모범운전자라 자부하는 개인택시들 중에서. 개인택시는 개인사업체이니 자신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젯밤 내가 탔던 택시도 지붕에 특별한 왕관모양의 모자를 얹은 모범택시였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여 예의 그 교통카드를 내밀었다. 그러자 느닷없이 이 기사분께서는 버럭 화를 내시면서 왜 교통카드를 낸다고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하신다. 이건 무슨 말인가. 이 양반 아침에 마누라와 싸우고 나왔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잠시 어리둥절해진 기분을 추스르고 물었다. 왜 그 이야기를 미리 하여야 하냐고. 그랬더니만 더 화를 내신다. 교통카드를 받고 안받고는 의무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순전히 자기 마음이란다. 그래서 또 물었다. 의무사항이 아니라면 단말기는 왜 달고 다니냐고. 그 물음에 답이 궁했는지 목소리가 더 높아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목소리가 커야 상대를 제압한다는 사실을 증명이나 하려는 듯이. 이쯤 되면 나도 오기가 생긴다. 특히 그는 요란한 왕관을 얹은 모범운전자 아닌가. 의무사항이 아니라면 어떤 특별한 혜택이 주어지므로 단말기를 달고 다닐 텐데 그럼 주어진 혜택만 받고 혜택에 따르는 의무는 지키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모범운전자에게만 주어지는 개인택시로 그는 벌써 혜택을 누리고 있지 않는가. 다시 물었다. 그럼 시에다 이야기해도 되겠냐고. 그랬더니 그는 좀 더 큰소리로 대답한다. 제발 시에 이야기하여 단말기를 떼라고. 그러면서도 그는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그제서야 단말기를 켜고 그곳에 카드를 대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무엇에 �기 듯 어둠 속으로 재빨리 살아졌다. 살아져 가는 그 택시의 뒷번호판을 쳐다보며 번호를 외워야 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아파트 정문을 들어섰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택시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개중에 어떤 기사들은 회사택시나 개인택시를 떠나서 택시 승객인 내가 미안할 정도로 친절을 베푸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내가 오늘 겪은 이런 사람이 어찌 모범운전자라 불리어야 할까. 교통카드를 받기 싫으면 승객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좋은 말로 현찰을 부탁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분의 모범운전자 정신은 어디로 간 것일까. 현찰을 강요당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
2008년 4월 열 번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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