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유리병이 그립다
아마도 이제 자기가 나서 자란 가지에 매달일 힘조차 없는 모양이다. 얼마 전 며칠간 추적추적 반갑지 않은 가을비가 계속 내리고 바람까지 불어댄 날씨에 가로수 가지마다 남아있는 잎사귀들이 절반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날이 차가워지기는 하였지만 미풍조차 불지 않는 오늘에도 동네 은행나무 대부분은 몸을 털어내는 소리마저 들릴 듯 여기서 툭 저기서 툭 노란 이파리들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직 힘겹게 빛바랜 초록빛을 간직한 나무가 있는가하면 노란색이 온 몸을 감싸기는 하였지만 비와 바람을 굳건히 버티며 온전한 몸을 간직하고 있는 나무도 있다. 자신은 아직 땅으로 내리거나 바람에 실려 가야 할 정도로 가을을 타지는 않는다는 뜻인지.
사람들 대부분이 계절이나 날씨에 민감하기는 하지만 각자의 체질에 따라 입는 옷의 두께가 다르고 옷매무새도 다르다. 또한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나이가 비슷하더라도 피부색이나 주름살 등 변화되는 모습도 다르다. 특히 통칭 노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서는 각자 그 변화된 겉모습으로 그들이 지나온 세월의 길이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그 노인층에서도 계절을 인식하는 모습 또한 각자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과 잎을 떨어뜨리는 가로수를 창밖으로 바라보다 같은 은행나무이면서도 하나하나의 다른 모습에서 나무도 그 환경에 따라 사람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 창문 바로 아래로 바라보이는 나무는 아직 초록색 티를 벗지 않았다. 색 바랜 오래된 옷 같은 모습이기는 해도 계절의 바뀜을 이겨보기라도 하려는 듯 아직 노란 물감을 덮어 쓰지는 않았다. 이 나무 옆 전주에는 변압기 2개가 매달려있다. 그리고, 변압기와 가지들이 서로 살을 맞대면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가끔 윗가지가 강제로 잘려나가기는 하지만, 그 변압기에서 나무에 실어주는 전기적인 에너지 때문인지 아직 노란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 사람도 전기에 감전되면 전신에 쇼크가 일어나 건강에 이상이 생기듯 이 나무도 변압기로부터 받는 전기적 충격으로 인하여 동료들처럼 계절에 순응하는 자연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홀로 이대로 빛바랜 초록 이파리를 떨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흡사 제때에 적절히 옷을 갈아입지 못해 돌봄이 필요하거나 혹은 시대적 변화에 적절하게 적응하지 못해 혼란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렇지 않겠나 하는 생각과 함께.
신호등 없는 사거리 코너에는 같은 시기에 심어진 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하나는 세월이 가는대로 잘 적응하면서 콘크리트 전주보다도 더 굵게 자랐지만 다른 하나는 좀 약하게 자랐다. 흡사 새의 둥지 속 알에서 부화된 새끼들 중 힘이 제일 좋은 놈이 어미가 가져다주는 먹이를 독차지하여 홀로 크듯이 큰 나무가 옆의 작은 나무쪽으로 뿌리를 뻗어 영양을 다 가로채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다. 자연의 약육강식 원리가 인간이 심어놓은 가로수조차 피해가지는 못하는지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한편 그 작은 나무 바로 앞에는 전자담배가게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 아래서 담배를 피운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의 작은 나무에 비하여 이 나무의 이파리는 너무 많이 떨어졌다. 거의 나신이 되었다. 전자담배연기의 위험도가 일반담배연기보다 결코 낮지는 않다고 하니 큰 나무에 영양을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엎친데 덮친다고 담배연기까지 씌워져서 그랬을까 아니면 몸도 허약한데 그 앞에 불법주차하는 자동차들의 매연이 견디기 힘든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이제 온 동네를 물들이던 노란 가로수들은 가을의 흐름을 따라 나신의 가지를 내보이고 있다. 이때쯤 되면 늘 ‘마지막 잎새’라는 작품 이름의 애절함에 더하여 ‘잎새’라는 이름과 ‘대나무 이파리’가 그려진 초록색 유리병과 그 유리병을 같이 마주할 친구가 늘 그리워진다. 아마 나도 가을을 타는 모양이다.
2021년 11월 18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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