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종, 그 신기와 보문의 메아리
천 년을 갈고 다듬은 경어 한 마리 종체에 거세게 부딪히는 순간, 세찬 경련과 요동의 일각을 타고 파르르한 진동으로 파생되는 쇳소리, 사방에 번지는 거친 숨결, 이내 깊은 번뇌를 사르르 녹이는 참회의 소리, 삼매경 속 여음으로 만물을 깨치는 묘법의 메아리……
이것이 우리가 전통종을 떠올릴 때 흔히 생각하는 종소리의 이미지다. 그러나 그 소리보다 더욱 심오한 경지는 형체, 곧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구상 어디에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한국종만의 조형미다.
종은 무엇인가?
종은 악기로, 부장품으로, 의식구로, 신호도구로, 권력의 표징으로, 심지어 도량형기로까지, 종은 예로부터 인류의 삶이 녹아든 위대한 발명품의 하나였다. 즉 종은 금속으로 빚은 최초의 소리도구이자 인류문명의 탄생과 진화의 이기였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종을 사용하지 않는 민족은 드물다. 불교가 전래된 나라는 물론이거니와 프로방스의 호젓한 바닷가에서도 어김없이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제야의 타종식 같은 성대한 퍼포먼스로 새해를 맞는 민족은 드물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타종 의식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종을 가장 많이 만드는 제종강국이 된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 범종의 우수한 독창성이나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릴 만큼 장중하면서도 청아하고 긴 여음의 종소리가 갖는 미학적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심지어 작년 봄 낙산사 일대를 덮친 산불로 보물 제479호인 `낙산사동종`이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지만, 그 종의 진가를 아는 이가 드물기에 안타까움도 피상적인 인식에 그치고 말았다. 이제 긴 세월 동안 낙산팔경의 하나로 여겨질 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지녔고, 한국전쟁 때 파괴의 위기를 두 개의 총탄 구멍으로 극복한 우리의 소중한 성보는 사라졌다. 그리고 종은 산불의 흔적보다 더 빨리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지금 현전하는 우리의 범종들은 비록 낙산사동종처럼 소실되지는 않았더라도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져 민족정신이 응축된 조형예술과 첨단기술력의 진수로서의 그 존재가 잊혀지기는 마찬가지다.
이 책은 ‘코리언 벨’(Korean Bell)이라는 세계적인 학명을 얻을 만큼 우수한 우리종의 참다운 실체를 알리고, 한국종의 그 특이한 생김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논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법고창신의 자세로 연구해온 저자 곽동해의 지난한 연구 과정을 응축한 책이다. 또한 33년간 우리 민족문화 유산을 찾아다니며 사진작업을 해온 안장헌의 소금땀이 묻어나는 사진이 곁들여져 더 빛을 발한다. 책의 말미에는 우리종의 아름다운 문양과 심오한 종소리에 탄복한 일본이 약탈해간 우리종의 약사를 훑어보면서 천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일본 열도에서 망향의 한을 품은 채 울리고 있는 우리종을 살펴본다. 책을 읽다 보면 오늘날 우리를 아연실색케하는 ‘독도’ 문제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통감하게 된다.
중국 유래설을 뒤집는 한국종의 기원
우리는 흔히 중국이 우리에게 불교를 전래했으니, 불교 의식에 쓰이는 불구도 중국에서 유래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싶다. 오늘날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종은 725년에 조성된 오대산 상원사의 신라범종 개원13년명동종이다. 그리고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범종은 진태건7년명종(575년)으로 대략 6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과연 6세기 이전 우리 조상들은 당시 수준 높은 문화적 상징이었던 동종을 결코 생산하지 못했던 것인가?
한국범종이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사료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천가(天嘉) 6년에 진(陳)나라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観)이 내경(内徑)을 받들고 오니 절들은 별처럼 벌려 있고 탑들은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다. 이에 법당을 세우고 범종을 달자 용상석도(龍像釈徒)는 천하의 복전(福田)이 되고 대소 승법(乗法)은 경국(京国)의 자운(慈雲)이 되었다.”
“대통 원년(大通元年) 정미에 양제(梁帝)를 위해 웅천주(熊川州)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대통사(大通寺)라 하였다. ……의(義)에 따라 삶을 가볍게 여긴 것 이미 놀라기에 족하고, 천화(天花)와 백유(白乳) 더욱 단정하구나. 얼마 후 단칼에 몸이 죽었는데, 은은한 종소리 제경(帝京)에 울리네.”
분명히 종의 존재를 알리는 이 기사문들에서 ‘천가 6년’은 남북조시대 진의 연호로 신라 진흥왕 26년, 즉 565년에 해당하는 기록이며, ‘대통 원년’은 역시 남북조시대 양의 연호로 527년에 해당한다. 두 번째 기사문이 이차돈의 순교를 찬양하는 내용이 부가된 것으로 대통사 창건 시기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첫 번째 기사문은 명백히 당시 일어난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중국 최고종인 진태건7년명동종보다 10년이나 앞서는 기록이다.
문헌자료만 가지고 기원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면, 당시 종의 존재를 보여주는 생생한 그림을 증거로 제시할 수 있다. 그 예로 저자는 4세기 중엽 조성된 안악3호분의 동쪽 회랑 행렬도를 끄집어낸다. 여기에는 다양한 인물들과 함께 묘사된 고취악대 그림에 두 사람이 북과 종을 어깨에 걸쳐 메고 행진하는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물론 이 종은 범종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범종이 출현하기 전 고동기 악종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고증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밖에도 개원13년명동종 이전의 유물로서 미륵사지, 감은사지, 황룡사지 등에서 출토된 풍탁형 소종들을 주목할 만하다. 모두 7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유물들은 음통은 없지만 종몸체의 형상이 신라종과 매우 흡사하다.
결국 한국종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 이미 한반도에 존재했고, 이후 불교의 영향으로 중국과 비슷한 시기인 적어도 6세기 전반에는 범종이 출현했을 가능성이 짙다.
저자는 이러한 기원에 대한 의문을 방증하면서, 한국종의 독창적인 조형요소의 유래를 청동종의 효시국인 중국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다분히 문화종속적인 고정관념임을 꼬집는다.
한국종의 독창적 조형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 원통유절
한국의 범종이 일본종이나 중국종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단연 음통이다. 음관, 용통, 원통유절, 만파식적 등 다양하게 불리는 이것은 한국종에서만 볼 수 있는 조형요소로, 한국종의 정체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인 요소다.
신라종 음통의 탄생에 대한 일반적인 가설은 둘로 대별된다. 이른바 외국종 모방설과 신라 고유의 창출설이 바로 그것이다. 전자는 중국 주대에 크게 유행한 고동기 악종의 하나인 용종을 모방했다는 주장이며, 신라 창출설은 만파식적 상징설과 솟대 기원설이다. 그중 많은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이 ‘용종 모방설’과 ‘만파식적 상징설’이다.
‘용종 기원설’은 한국미술사학의 시조 격인 고유섭이 처음으로 “악종(樂鐘)의 형용(衡甬)에 해당한다”고 주장한 이후 1970년대 후반까지 거의 정설로 각인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1980년 황수영 박사가 “한국종의 음통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만파식적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이라는 주장을 발표하면서 한국종의 기원 문제가 본격적인 논쟁의 도마에 오르게 된다.
저자는 ‘용종 모방설’이 지닌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그에 대한 반론을 펼친다. 그가 제기하는 문제점은 네 가지로 정리된다.
1. 용종이 사라진 후 음통이 장식된 신라종의 출현까지는 약 700여 년의 공백기가 존재한다. 그런데 어떻게 중국에서조차 자취를 감춘 용종을 신라 장인이 모방할 수 있는가?
2. 용종의 ‘간’ 부분의 수두문이 용두로 변했다는 내용도 무리가 있다. 용종이 등장하기 시작한 무렵에는 수두문을 장식하지 않았고, 이후 이는 선각으로 묘사되어 형상이 지극히 미약하지만 신라종의 용두는 극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비교 자체가 비약이다.
3. 용종의 ‘용’(甬)은 은대 후기 요(鐃)에 부착된 손잡이 병(柄)에서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용’에서 신라종과 같은 음통 기능이나 만파식적 같은 상징 의미를 찾기 힘들다.
4. 중국종이나 일본종의 용뉴는 좌우대칭이나, 신라종의 용뉴는 대칭성을 탈피해 있다.
그렇다면 황수영 박사의 견해를 쫓아 ‘만파식적 상징설’을 따르는 저자의 근거는 무엇일까?
만파식적 설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지어 추모하였는데, 죽어서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용을 시켜 동해 중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합하여 하나가 되는지라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현장에 나섰다. 이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으니, 용은 “비유컨대 한 손을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대나무란 물건은 합한 연후에야 소리가 나니,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상서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베어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후 그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뭄에 비가 내리고 장마가 멈추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이라 칭하고 국보라 일컬었다.
만파식적은 대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형세가 둥근 원통형이며 마디(죽절)가 있어야 한다. 그런 연유로 신라종 정상에 설치된 원통이 죽절을 닮은 마디를 이루므로 만파식적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신라종의 용 모습은 두 발을 앞뒤로 벌려 몸통 뒤에 밀착된 음통을 짊어지고 힘차게 기어오르는 모습인데, 이를 설화 내용 중 “동해의 용이 대나무를 등에 짊어지고 바다에서 육지로 힘차게 기어나오는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저자는 우선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대나무 형상’을 닮은 음통의 예를 제시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개원13년명동종, 고려시대 천흥사명동종, 청녕11년명동종, 일본 후쿠오카 쇼텐지에 소장되어 있는 동종이 그것으로 이들 종에서는 죽절의 형상이 확연히 나타난다.
또한 파도가 이는 ‘만파’라는 배경을 나타내고 있는 종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연천 출토 고려종과 후쿠오카 시립미술관에 소장된 고려동종을 들 수 있는데, 이들 종에서는 파도 조각의 천판이 확연하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다양한 방증자료와 문헌사료를 통해 그 설득력을 더한다.
한국종은 어떻게 조형적 발전과 변화를 거듭했나?
한국종의 전형 신라범종
한국종은 곧 신라종으로 통한다. 한국종이 ‘Korean Bell`이라는 세계적인 학명을 얻은 것도 신라종의 독창성이고 아름다운 조형성 때문이다. 현재까지 제작되고 있는 많은 범종들이 사실 신라범종의 양식을 따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라종은 단룡과 음통으로 구성된 용뉴, 상․하대, 유곽․유두, 전․후면 당좌, 천인상 등으로 구성된다. 모든 신라종은 이런 조형요소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천판 가장자리의 견대와 음통 하부의 받침을 연판대좌로 장식하고 있는 유일한 신라종이다. 또한 종몸체에 새겨진 문양은 신라, 고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천인상에서 불․보살상으로 변화하지만 신라종에는 유독 천인상만을 장식하고 있다.
계승과 변화의 모색, 고려 전기 범종
고려 전기 범종은 큰 변화 없이 신라 양식을 계승한 점이 특징이다. 그러나 유곽의 위치가 달라졌다거나 일부 범종에서 비천상과 함께 삼존불이 등장하는 등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새로운 조형의 시도, 고려 후기 범종
의종 원년인 1146년부터 고려 말기까지 조성된 종들을 고려 후기 범종으로 분류한다. 이 시기는 한국범종 양식사에서 또 하나의 독창성이 발휘된 때이다. 이른바 입상대라는 새로운 조형요소가 더해지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꽃잎을 세워 병립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입화문대라고도 불린다. 전기 양식의 어깨문양대가 변형되어 나타난 입상대는 음통을 짊어진 한 마리 용이 연꽃 위에 오른 모습을 연출하기 위한 조형장식이다. 또한 용의 한쪽 발에는 여의주가 부가되기 시작하는데, 음통 정상부에 2~8개의 구슬이 새롭게 나타난 것도 고려 후기 양식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밖에도 범자문(梵字文) 장식이 크게 유행하는데, 이는 몽고 침입 이후 전래된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중 교류의 혼효, 조선 전기 범종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한 조선시대 전기에는 불사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 조선 전기 범종은 조선 개국부터 임진왜란까지 약 2세기에 걸쳐 주성된 것을 말하는데, 조선 전기라 해도 15세기와 16세기 양식이 사뭇 다른 유형을 보인다. 즉 한중 혼합양식이 출현하는 15세기와 복고풍의 전통 사찰양식이 나타나는 16세기로 세분할 수 있다.
15세기는 주로 왕실 발원으로 주성된 것으로 한중 혼합이라고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중국종 양식을 따르면서 유곽이나 보살상, 덩굴문 등 일부 장식에서 한국종의 조형양식을 따른다. 즉 음통은 쌍룡뉴로, 천판은 완만한 원호형에서 중국종의 반구형으로 변모하고, 종몸체에는 범자 문양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중국종의 영향으로 팔괘 문양도 새로운 장식요소로 등장하는 반면 당좌는 사라지고, 비천상이나 불상 대신 보살입상이 등장한다.
16세기는 그 중반까지 범종 주성이 중단되었을 만큼 범종 제작의 암흑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중 사찰에서 발원한 범종 9구 가운데 갑사동종을 제외한 8구가 한국종의 절대적 조형요소인 음통을 재현하고 있고, 8구 모두 천판을 한국적인 원호형으로 구현했으며, 고려 후기 양식인 입상대가 부활했다. 이는 한국종 양식이 다시 부흥하는 전조이며, 얼어붙었던 사찰의 청정불사도 서서히 여명기를 맞이하는 징조이다. 용뉴에는 단룡과 음통이 부활하며, 고려 후기 양식인 입상대가 다시 나타난다. 반면 상대가 사라지고 견대 부분에 중국종의 특징인 넓은 연판문양이 장식되기 시작한다. 범자문이 본격적으로 장엄되기 시작하는데 특히 사라진 상대 자리에 원권 범자문양대의 장식이 두드러진다. 또한 유곽이 상대에서 분리되며, 비천상이나 불보살상이 장식되지 않은 사례도 거의 절반에 이른다.
신조와 복고의 병립, 조선 후기 범종
조선 후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7세기 초부터 대한제국이 건립되는 19세기 말까지 300년간을 말한다. 이 시기는 한중 혼합양식과 복고양식이 병립하는 17. 18세기와 양식의 쇠퇴기를 가져오는 19세기로 세분할 수 있다. 17, 18세기는 앞선 두 조선 초기 양식이 동시에 정착, 병립하는 양상을 보이며 양적으로도 활발한 주종사업이 이뤄져 한국종의 부흥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순조에서 철종까지 그리고 고종에서 순종까지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면서 범종양식 또한 쇠퇴기로 접어든다.
민족정신의 이상향이 응축된 고도의 조형예술, 범종
한 민족의 문화를 가늠할 때 단연 문자와 문양, 조형예술은 그 척도가 된다. 특히 첨단의 기술과 예술정신이 집약된 창작물은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적인 헤게모니까지도 전달하는 웅숭 깊은 매체로서 기능한다. 범종은 단지 불교의 의식구라는 차원을 넘어 우리 민족정신의 이상향이 응축된 조형예술로서 거기에는 상징성, 예술성, 창의성, 역사성을 반영하는 민족문화의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문자와 달리 심오한 상징성과 응축된 조형성으로 후대에 자칫 그 의미가 희석되거나 잘못 전달될 가능성이 높다. 석굴암 본존불의 실체라든지, 백제 금동용봉대향로의 사상적인 배경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채 많은 가설이 범람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이다.
이 책은 그동안 한국범종의 독창적인 조형창출을 둘러싼 무수한 논쟁의 한가운데서, 설득력 있는 마침표를 하나 찍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신기의 조형을 창출해낸 선조의 예술정신을 오롯이 살려내고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침묵으로 말하고 있는 우리범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출처 : 한길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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