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평칭을 위하여

korman 2014. 2. 22. 14:41

 

 

 

 

 

평창을 위하여

 

그게 몇 년도쯤이었는지 기억이 없다.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쯤이었을까? 아무튼 어린 시절이었다고만 기억되는데 농촌에 ‘스피커 보내기 운동’ 이라는 게 있었다. 라디오가 부족했던 시절이라 마을마다 이장집 같은데 라디오 중계소가 있고 집집마다 스피커를 달아 라디오 방송을 중계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종의 라디오 유선방송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곧 이어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이어졌다. 요즈음 커다란 TV로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문득 예전에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가 외국에서, 비록 라디오였지만, 우리 선수들이 하는 경기를 처음 중계방송 하였던 때가 언제였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인터넷에서 기록을 뒤져보니 해외에서 처음 라디오 중계방송을 한 때가 우리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8년 7월 런던올림픽이라 적혀있다. 일반 가정에 라디오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니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중계를 들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지금은 위성이나 해저케이블을 통하여 쉽게 중계가 되지만 그 당시 어떤 경로를 거쳐 그 먼 런던에서 한국까지 목소리가 전달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앞선다. 전파가 당도하는 주변 국가마다 여기서 저기로 릴레이 해 주었을까? 선수들이 런던까지 가는 것도 어려웠을 테지만 중계시설이나 경험도 없었던 그 때 고국까지 목소리를 보내는 중계는 더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나 보다 나이가 조금 덜 먹은 사람들은 추억의 만홧가게에서 TV 보던 이야기를 한다.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세대이기는 하지만 제한된 지역에 TV방송이 시작되었을 때라 해도 라디오 보급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무렵이니 연속극이나 중계방송을 들으려 사람들이 라디오가 있는 집이나 유선스피커가 달려있는 곳에 모이곤 하였다. 그 당시 외국서 경기를 하는 우리나라 선수들의 모습을 국내에서 전해 듣는 사람들은 사뭇 경기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듯 진지하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 라디오 중계는 좀 문제가 있었다. 중계를 하는 아나운서의 팔이 안으로 굽는 애국심 때문이었는지 축구중계를 들으면 우리선수들이 공을 잘 차고 있고 권투중계를 들으면 잘 때리고 있어 우리가 이기는구나 생각하고 있으면 좀 있다가 “안타깝게도 골을 먹었습니다.” 아니면 “텃세에 밀려 졌습니다.”라는 중계가 심심치 않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시에 TV가 공급되면서 TV방송이 활성화되고 사람들은 라디오 대신에 전파사 앞이나 만홧가게 등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해외에서의 TV중계는 어려웠지만 국내에서의 중계는 별 문제 없이 이루어지고 따라서 무슨 기념일이면 외국팀을 초청하여 국내에서 친선경기를 하거나 정기적인 대회를 개최하였고 또 이것들은 TV로 중계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심판에 문제가 있었다. 지금이야 친선경기나 대회 모두 국제심판들이 관여하지만 그 당시에는, 특히 초청친선경기에는 개최국의 심판들이 나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 보니, 다른 나라도 그랬겠지만, 역시나 팔이 안으로 굽는 심판을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린 내가 보아도 저건 우리가 잘못한 것 같은데 생각되는 것도 상대 선수의 파울을 주는 경우도 있었고 특히 프로권투는 애매하게 무승부를 줘 타이틀을 방어하게 함으로써 그런 경향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당시 국민들이야 어찌 되었건 우리가 이기는 것이 기쁨이었으니 뭘 따지고 자시고 할 일은 아니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어느 경기에서나 판정시비는 자주 뒤따라 다닌다. 그리고 중계자의 애국적 발언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아울러 그 발달된 IT 때문에 많은 부작용도 나타난다. 이제 소치 동계올림픽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그간 우리가 목표로 하였던 게 많이 빗나갔다. 쇼트트랙이나 피규어에서 석연치 않은 일도 있었다. ‘빅토르 안’ 이라는 선수 때문에 갈등도 계속되고 있다. 어느 경기에서나 선수들은 넘어질 수 있고 실수를 할 수 있고 본의 아니게 상대 선수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심판들도 우리 생각과는 다른 선수의 팔을 들어 줄 수도 있으며 개최국의 이점이라는 것도 현실적으로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다고 특정 선수나 심판에게 위해에 가까운 협박을 한다는 것은 평창대회를 눈앞에 둔, 스스로 선진국민이라 일컫는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은 아니라 생각된다. 아무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 해도 한번 내려진 판정은 거의 뒤집혀지지 않고 또한 이런 일은 해당 단체에서 예의를 갖추어 국제단체에 공식적으로 제기해야 하는 것이 순리이다. 설사 각자가 그리 항의를 한다 하더라도 냉정하게 논리적이어야지 국제적으로 도를 넘는 욕설을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안에서는 끓되 밖으로 넘치게 하지는 말자. 그리되면 안 되겠지만 우리도 평창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한다.

 

우리는 하계올림픽, 월드컵, 동계올림픽을 모두 치르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그리고 교육수준도 최상위권에 있는 나라이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은 경기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국제대회에서 몇 개의 메달을 따느냐도 중요한 것이지만 경기에 참여하여 선의의 경쟁으로 국가 위상을 높이고 축제를 즐기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메달만을 원한다면 메달권에 있는 몇 선수들만 참가하면 될 경기에 무슨 이유로 그 많은 돈을 들여 대규모 인원을 참여시키겠는가. 이제 마음에 안 드는 결과나 심판에 대한 감정은 강물에 흘려버리고 그 IOC마저 걱정한다는 댓글이나 메신저도 그만두고 평창을 위하여 응원하자. 소치의 연극은 끝나고 지금 평창에 새 무대가 설치되고 있다.

 

 

2014년 2월 21일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