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의 한켠을 버렸다
어느덧 새해 1월도 중순을 넘어섰다. 나한테만 빠른 세월은 아니니 신파극 대사를 외울 필요는 없겠지만 나이 들면 세월 타령이라니 코로나에 가두어진 방콕의 시계바늘은 힘겨움 없이 잘도 돌아간다. 세월 가는 게 싫다 싫다 하면서도 집안에 놓인 시계가 좀 느리다 싶으면 얼른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게 또 인간 아니겠나. 그래서 인간들은 늘 이중인격에 이율배반인 모양이다.
작년 말에 ‘이젠 정리 좀 해야겠다’ 하고 생각하였던 것들을 하지 못하고 또 해를 넘겼다. 기실 그것은 2019년 말에 하고자 했던 것이었는데 꺼냈다 넣었다 열었다 닫았다만 반복하다 해를 넘기며 ‘올해 까지만 남겨두고 내년에는 꼭 정리 해야지’라고 하였던 것을 내년의 내년을 넘긴 것이다. 무언가를 정리하고 버린다는 게, 그것이 물질적이기 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더 가까운 것이라면, 사람의 성격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얼른 없애기가 쉽지 않다.
지난 연말 우선 필요 없는 전화번호라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핸드폰의 전화번호리스트를 열었다. 떠나간 손위의 친지들, 별로 통화할 일 없는 손아래 친척들, 사회생활에서 사귀었던 사람들 역시 그러하고 간직한 번호라도 연락할일 없으니 있으나 마나 한 번호들이 많다. 그러니 몇 년 전에 지웠어도 됐을 번호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아직 잊고 싶지 않은 분들도 있고 떠난 친구지만 그 가족이 계속 사용하는 것으로 SNS에 나타나 지우지 못하는 번호도 있다. 그래서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작년 말에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오늘도 그냥 전화기만 만지작거리다 번호가 아무리 많은들 메모리를 차지하는 면적이야 태평양에 뜬 제주도보다도 작을 테니 애타게 지우겠다고 생각할 필요 있겠나 싶어 또 그대로 닫았다.
추억이 될 만한 것도 아니거늘 진작 재활용쓰레기봉투에 넣었어도 될 것들을 역시 작년 말에 ‘버려야겠다’ 생각하고는 전화번호 간직하듯 그렇게 버리지 못하고 간직한 것은 또 있다. 이제는 그만둔 일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언젠가 다시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살인사건의 공소시효(지금은 없어졌다함)보다도 더 긴 세월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계약서, 편지, 은행슬립, 통관서류 등등 하던 일과 관련되었던 각종 서류들이 그것이다. 당시에는 모두 향후 업무에 참고자료가 될 만한 것들만 선별하여 남겨두었던 것들이다. 발생일로부터 길게는 20년 이상 짧게는 10년을 훌쩍 넘긴 서류들이다. 해당 업체나 관청에서도 5년 정도면 폐기시킨다는 그런 종류의 문서들을 난 왜 그 긴 세월동안 무슨 미련으로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그것들은 대부분 스캔하여 컴퓨터에 pdf file로 저장된 것들이 아니던가. 아마 아무리 나 자신이 디지털시대에 적응을 잘 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내 세대 자체가 아날로그라는 용어조차 사용되지 않던, 그러니까 시작 항 때 보다는 끝날 때가 훨씬 가까운 세대이다 보니 정신적인 면이 우선 작용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에야 종류별로 분류하여 넣어 놓았던 두툼한 노란 봉투들 중 하나를 꺼냈다. 그런데 막상 버리려고 하니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 거래와 관련된 서류들이다 보니 곳곳에 개인정보가 숨어있는 것이다. 택배스티커조차 그냥 버리지 못하는 난세에 살고 있으니 버려야 할 서류들을 일일이 살펴 숨어있는 정보를 우선 제거하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였다. 아궁이나 난로가 있는 곳에 있으면 한 번에 훨훨 불살라 버리면 끝날 것을 재활용쓰레기봉투라 칭하는 그 속에 넣어 버려야 하니 도시의 한 모퉁이에 사는 불편함이 종잇조각 버리는 것에도 묻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서류봉투 하나를 버렸다. 20여년의 한켠을 없애버린 것이다.
버리기 시작하였으니 1월이 다 지나기 전에 남은 봉투에 들어있는 모든 서류뭉치들을 버리기는 하겠지만 아마 전화기에서 지워져도 될 번호들은 올해 연말까지도 그대로 남아있을 것 같다. 물질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무언가를 버리는 일이 쉬울까만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것들을 없애는 일은 기억을 지우는 것과 같은 일이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쉬운 일은 아닐성싶다.
2021년 1월 15일
하늘빛
음악: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fC4ybofD4K4
[오카리나] 일곱송이 수선화 (Seven Daffodils)
'이야기 흐름속으로 > 내가 쓰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월의 무게 (0) | 2021.02.05 |
---|---|
겨울비 (0) | 2021.01.24 |
수전세트의 너트 때문에 (0) | 2021.01.05 |
세월은 윤회도 없네 (0) | 2020.12.28 |
감사합니다 (0) | 2020.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