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한국종

korman 2006. 10. 24. 17:50

 

  한국종의 특징 / 신라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종에는 종·순(錞)·탁·박·요·탁(鐸)·편종·특종(特鐘)·영(鈴)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는 크게 3가지로 구분한다.  즉 방울류의 탁·영, 한국 민족문화 소산물로서의 범종, 악기로 쓰인 편종·특종·순·요·박·탁·경(磬) 등이다.
   그중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탁(鐸)·영으로, B.C. 4세기 무렵의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없어서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주로 제사나 잔치 등에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사람과 귀신을 흥분시키고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는 영은 칼·거울과 함께 무교(巫敎)의 성스러운 도구(聖具)로 전해오고 있다.
   한편 불교의 상징물인 범종은 725년(성덕왕 24)에 만들어진 상원사동종이 최초의 것으로 전한다. 방울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로, 크고 우람하여 강력한 전제국가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소리는 지도(至道)와 대음(大音)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부처의 진리와 자비를 담은 것, 선왕의 공덕과 위엄을 기린 것 등 주조 의미도 심오한 것이 특징이다. 그 밖에 중생이 자신들의 기원을 담아 주조한 것도 있다.
   악종(樂鐘)은 말 그대로 음악에 사용된 것으로 조선시대 유교의 예악과 함께 정비되었다. 예악 사상은 인성·도덕·정치순화 등의 효용성에 음악의 가치를 둔 것이 특징인데 세종 때에는 그 격법(擊法)·협연법(協演法) 등 악종 자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범종은 <한국종>이라는 학명이 붙을 만큼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범종이 만들어진 것은 처음에 중국 주나라의 용종(甬鐘)을 모방한 것으로 전하지만 중국과는 다른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용종의 자루(甬) 부분이 한국종의 용뉴이며, 수두문(獸頭文)은 용두(龍頭), 종신(鐘身)에 있는 36개의 돌기인 매(枚)는 한국종의 유두(乳頭), 수(隧)에 해당하는 것이 당좌(撞座)라는 등의 견해는 <모방>에 대한 근거이다.
   그러나 종 꼭대기 부분에 음통(音筒)이 첨가되고 용종과 달리 내부가 뚫려 있으며, 유곽(乳廓)이 종견(鐘肩)의 4곳에 배치되고 그 안에 9개씩의 유두가 조식된 것, 대칭으로 배치된 공양비천상(供養飛天像)과 당좌 및 명문의 조각 등은 한국종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한국종의 전형은 신라시대에 이루어졌으며 상원사동종과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771)으로 대표된다.
   형식적인 특징 외에 소리에 있어서도 맑고 청아한 음색에 긴 여운과 뚜렷한 맥놀이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용통(甬筒)이라고도 하는 음통에 대해서는, 타종시 내부 잡음을 감소시키고 음향 확산에 도움을 준다는 공학적인 해석이 붙기도 하였다. 또한 종 아래에 항아리를 놓거나 땅을 파서 명동(嗚洞)을 만드는 것도 독특한데 그 역할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한국 범종의 전형을 이루는 신라시대 범종은 주로 반원권문(半圓圈文)을 사용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성덕대왕신종과 실상사파종(9세기 중반)만 보상당초문을 주문양으로 하고 있으며 부수적으로는 보살상·연화문(蓮花文)·당초문·운문 등이 새겨지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종신에는 비천상이 새겨진 것이 많은데 그 사실적인 부조법은 정교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또 대부분의 범종에는 조성연대 및 사연을 기록한 명문이 있어서 그 조성 연대는 물론 각 부분의 조성양식·조각수법 등의 연구자료로 쓰인다.
   세계적으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성덕대왕신종의 경우 1,000자가 넘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명문의 내용에는 당시의 관등을 나타낸 것도 있어서 주종사업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정교하고 화려한 신라의 범종이 파손되지 않고 전하는 것은 국내외를 통틀어 7구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 중 4구는 일본에 있어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대한 아쉬움을 더해 주고 있다.
   한편 고구려·백제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그 발전 과정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나, 1974년 출토된 백제의 금동제풍탁이 신라 종과 몇 가지 유사한 특징을 지닌 점으로 미루어 범종 역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신라의 양식을 이은 고려 초의 범종은 호국불교사상과 함께 일반 백성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어 개인적인 발원을 담은 주조활동도 성행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수법이나 규모에 많은 변화를 보였다. 그 가장 큰 원인은 12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이전까지 이어오던 신라의 전통에서 벗어나 예술성도 퇴화하며 왜소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구체적인 특징으로 상대에 입상화문(立狀花文)이 나타나며 정교한 조각 수법보다는 음·양각의 선적인 도형으로 형식화되어 졸렬한 느낌을 준다. 명문은 유곽 안에 위패(位牌) 모양을 조각하여 그 안에 양각하는 새로운 형식을 사용하였다.
   신라범종에 비해 국내에 보존된 것이 상당히 많으며, 천흥사동종(1010년)·청녕사년명동종(1058년)·정풍이년명동종(1157년)·내소사동종(1222년)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은 조형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후기의 특징을 구분해볼 수 있다.
   먼저 전기 범종은 고려의 특성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으며 비교적 규모가 거대하여 높이가 2.8m에 이르는 것도 있다. 이에 반해 후기에는 주조된 수는 많으나 높이 65cm 정도의 것이 나타나는가 하면 장식 문양도 더욱 치졸해진다.
   형식면에서의 차이로는 견부(肩部)에 복련대(覆蓮帶)가 돌려지던 것이 후기에는 연화문이나 범자열(梵字列)이 돌려졌다는 것, 전기에는 명문을 종신 전면에 해서체로 양각했는데 후기에는 양각·음각·점선각이 나타났으며 주성연기(鑄成緣記)는 모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그 밖에 후기의 특징으로는 용뉴가 쌍두(雙頭)라는 것, 용통이 없는 것도 많이 나타난다는 것, 유곽이 상대에서 완전히 떨어진 사다리꼴이고 유곽 사이에 보살상이 1구씩 새겨져 있다는 것, 당좌가 없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아가리에서 종신부로 올라갈수록 두께가 조금씩 얇아지는 전통적 특성을 지키고 있었다.
   대표적인 범종으로는 전기의 흥천사동종(1461)·봉선사대종(1469) 및 후기의 갑사동종(1584년), 보광사숭정칠년명동종(1634)·직지사순치십오년명동종(1658) 등이 있다

 

출처 : 천리안 생각해보기

'역사의 울림 속으로 > 우리 종 공부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종  (0) 2006.10.25
한국의 범종  (0) 2006.10.24
문화유산열전 : 종  (0) 2006.10.17
한국의 전통문화 - 종  (0) 2006.10.16
에밀레종 이야기  (0) 2006.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