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종 | |
청동기 시대부터 우리나라는 동탁이나 風鐸이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쇳소리를 내는 작은 금속 악기들이 크게 변형되어 만들어진 것이 범종이라 보고 있다. 범종의 기원에는 몇가지 설이 있지만 일반적인 견해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의 은나라(B.C 1500년경) 이후에 악기의 일종으로 사용되었다가 주나라 말기인 전국시대부터 사라져 버린 용종(甬鐘)이라고 불리우는 악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설이다. 또 다른 하나는 고대 중국의 종이나 탁(鐸)을 혼합한 형태가 발전하여 극동의 불교사원에 있는 범종의 조형이 되었다고 하는 것 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불교와 더불어 인도에서 '건추(建椎)'가 들어와 이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자체에서 발전하였다는 설 등이 있으나 신빙성이 희박하다. 위 설들중 공통되는 점은 모두가 고동기(古銅器)의 악기의 일종인 종(鐘)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발전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종(鐘)이라는 것은 용종(甬鐘)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용종은 중국의 주시대(周時代)에 만들어져서 성행하였는데 주(周)나라의 末인 전국시대(戰國時代)이후부터 다른 예기(禮器)와 같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악기의 일종이다. 이와 같은 용종(甬鐘)을 모방하여 오늘날 한국종(韓國鐘)의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신라의종 신라시대에는 한국범종의 전형으로 대표가 되고 기본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범종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11구에 불구하여 안타깝다. 이 11구중 명이 있어서(有記銘) 연대와 소장 사찰이 확실한 것 이 6구 이고 무기명(無記銘)으로 된 것 이 5구 이다. 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유기명(有記銘) 범종 * 상원사 범종 (725年) * 일본 국부팔번궁사(國府八幡宮社)소장 범종 * 봉덕사 성덕대왕 신종 (771年) * 선림원 범종 (일명 월정사 범종이라고도 하나 6.25동란때 소실되어 현재 파편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 * 상궁신사(常宮神社) 범종 (재일본) * 우좌팔번궁(宇佐八幡宮社) 범종 (재일본) ⊙ 무기명(無記銘) 범종 * 청주박물관 소장 신라 범종 (청주 출토) *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실상사 파종 * 일본 광명사(光明社) 소장 신라 범종 * 일본 주길신사(住吉神社) 소장 신라 범종 * 일본 운수사(雲樹社) 소장 신라 범종. 신라종의 특징 한국 범종의 조형(祖形)이며 대표되는 신라 범종의 각부를 종신, 용뉴, 용통(음관), 상대 문양, 유곽의 문양, 하대 문양 그리고 비천상의 형상과 당좌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종신 범종의 몸체는 한국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김칫독을 엎어 놓은 것 같은 형태로 매우 안정감을 갖고 있으며, 종정에는 용뉴와 용통, 즉 음관이 있다. 또 당좌 2개와 주악하는 비천상 2구를 상호 교대로 배치하였으며, 상대와 하대를 갖춘 것 외에 상대에 접하여 네 군데에 9유두를 구비한 유곽을 배치하고 있다. 종정의 천판은 연꽃잎을 둘러서 장식하고 있는 것 등이 신라 범종 종신의 특징이다. 이와 아울러 종신과 종구의 비례는 2:1 내지 1.5:1의 비율에 가깝게 이루어져 있다. 종신의 단면을 도면으로 작성하여 볼 때 신라 범종은 종구 쪽이 기차 레일처럼 안쪽으로 약간 형으로 되면서 두껍고, 종복에 이르러서는 점차 얇아진다. 이것이 종정에 가까운쪽으로 올라갈수록 다시 두껍게 되나 종구 쪽보다는 약간 덜 두꺼운 상태이다. 이와 같이 상하가 다른 주물법도 신라 범종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용뉴와 용통(음관) 신라 범종의 종정에는 예외 없이 용뉴와 용통을 구비하고 있다. 용뉴에서는 용이 종정의 천판을 두 발로 힘차게 딛고 있는데 용두는 범종 전체를 물어서 들어 올리는 박진감 있고 사실적이며 긴박감이 감도는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또한 형태가 몸체를 역U자형으로 솟구치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공통된 특징이다. 여기에 부착된 용통(음관)을 몇 단으로 구분하여 화려한 당초나 보상화문 내지 연화문 등으로 외면을 장식하여 화려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이 용통의 내부가 관통되어 천판과 통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중국이나 일본의 화종과 다른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이며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견대(상대) 문양 국가나 사찰 자체의 불사로서 이루어진 신라의 범종들에 장식된 주문양은 통계적으로 보아도 반원권 문양을 주된 문양으로 사용하고 있고 봉덕사 성덕대왕 신종, 일본 상궁신사 소장 범종, 실상사 파종, 일본 운수사 소장 범종, 일본 광명사 소장 범종, 청주박물관 소장 범종 등 6구만이 다른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이 6구의 범종 중 유일하게 성덕대왕 신종이 보상 당초문으로만 주문양대를 이루고 있어 같은 연대에 속하는 다른 것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왕 같은 문양대로 장식한것은 훨씬 시대가 떨어지는 고려 초기의 통화 28년명 천흥사 범종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일설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금속 공예품에서 사용된 보상화문과 당초문은 7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전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초문은 5세기경에 속하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고려시대까지 벽화, 와당, 전, 불상의 광배, 일반 금속 공예품 등에 널리 보급되어 장식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유곽의 문양 견대 문양과 동일하게 반원권 문양대를 주문양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통례이고 그 중에는 보상 당초문, 천인상(天人像),천부상(天部像),화문(花文) 등으로 조식하는 이례적인 것도 있다. 하대 문양 성덕대왕 신종, 실상사 파종, 일본 상궁신사 범종 등에서는 보상 당초문과 파상문을 조식하고 있을 뿐 다른 범종들의 주문양은 견대나 유곽대의 문양과 동일하게 반원권 문양이다. 이 문양대의 내부에 주악상, 비천상, 연판문, 당초문, 유운문 등을 사용하여 장식하는 세부적인 차이는 있으나 주류를 이루는 문양대는 역시 반원권 문양이다. 비천상의 형상 대표적인 범종의 비천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상원사 범종 : 공후와 우(생)을 주악 일본 국부 팔번사 범종 : 횡적과 장고를 주악 성덕대왕 신종 : 무릎을 끓고 합장 공양 선림원 출토 정원 20년명 범종 : 횡적과 장고를 주악 일본 상궁신사 소장 범종과 일본 우좌 팔번궁사 범종 : 장고를 주악 청주박물관 소장 범종 : 비파 주악과 합장 실상사 파종 : 횡적과 생을 주악 일본 광명사 소장 범종 : 비파와 요고를 주악 일본 운수사 소장 범종 : 횡적과 요고를 주악 일본 주길신사 소장 범종 : 하늘에서 지상으로 하강 당좌 신라 범종은 종신에 비천상과 함께 대칭으로 2개의 당좌를 배치하고 있는 것이 거의 공식적인 수법이며 그 형태도 거의 같다. 형태는 당좌의 중심에 자방(子房)을 갖추고 주위에 여덟 잎의 연판을 배치하여 연판 외각에는 다시 당초문이나 보상화문을 두르고 외각선을 원형의 태선(太線)으로 마무리짓는 것이 신라 범종의 당좌 장식법의 통례이다. 신라 범종은 한국 범종의 전형으로서 대표가 되고 기본양식을 갖춘 범종이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있는 신라 시대의 범종은 국내외(國內外)를 막론하고 11구(口)가 넘지 못하는 실정이다. 국내에 남아있는 신라 시대의 범종은 5구가 알려져 있는데 2구는 파손되어 완전한 것은 3구에 불과하고 일본에 건너간 신라 시대의 범종은 6구가 알려져 있다. < 국내 소장 신라 범종 > < 일본 소장 신라 범종 > ▶ 상원사(上院寺) 동종 ▶ 국부팔번사(國府八幡寺) 소장 범종 ▶ 봉덕사 성덕대왕(聖德大王) 신종 ▶ 상궁신사(常宮神寺) 소장 범종 ▶ 청주박물관 소장 범종 (청주운천 출토) ▶ 우좌팔번궁(宇佐八幡宮) 소장 범종 ▶ 선림원(禪林院) 범종 ▶ 주길신사(住吉神寺) 소장 범종 ▶ 실상사(實相寺) 파종 ▶ 운수사(雲樹寺) 소장 범종 ▶ 광명사(光明寺) 소장 범종 신라 石鐘의 유래 .... 손순과석종 옛날 신라 모량리 마을에 손순이라는 가난한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성품이 온순하고 너그러운 이들 내외는 위로 늙은 어머니와 슬하에 어린 아들 한 명을 두었다. 비록 품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했지만 내외의 효심은 지극했고 아들에 대한 사랑 또한 깊었다. 끼니를 구하러 집을 비우는 이들 부부는 자기들은 허리를 졸라매면서도 어머니 점심은 정성스레 차려 놓았다. 『어머니, 솥 안에 점심 담아 놓았으니 돌이 녀석 놀러나가거든 드세요.』 『오냐, 알았다. 어서들 다녀오너라.』 그러나 노모는 대답뿐, 늘 어린 손주에게만 밥을 먹이고 자신은 굶었다. 그러던 어느날, 소나기가 쏟아져 반나절 일을 채우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손순 내외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노모를 위해 아껴둔 찬밥덩이를 부엌에서 아들 돌이가 꺼내 먹고 있지 않은가. 『아니, 이 녀석아! 할머니 진지를 네가 먹으면 어떻게 해.』 『할머니가 먹으라고 하셨어요.』 『그래두 할머니 드시라고 권해야지 착한 손주지.』 『배가 고파 죽겠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날 밤 손순은 자는 아내를 깨워 밖으로 나왔다. 『방에서 말씀하시지 않고….』 『어머님께서 깨실까봐 그랬소.』 『무슨 이야긴지 어서 해 보세요.』 말을 할듯 할듯 하면서도 한동안 머뭇거리던 손순은 입을 열었다. 『부인, 어머님의 남은 여생을 위해 돌이를 버립시다. 자식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님은 한번 가시면 그만 아니오. 그 녀석이 어머님 음식을 늘 옆에서 축내고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별도리가 없구려.』 『여보, 하지만 어린 작식이 너무 가엾잖아요. 부모 잘 만났으면 호강하고 귀여움을 독차지할 텐데….』 『부인, 나 역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소. 허나 다 전생의 업연이라 생각합시다. 어찌 생각하면 돌이가 살아서 굶주리며 고생하느니 일찍 죽으면 더 좋은 인연 받을지 누가 아오?』 내외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돌이를 업고 뒷산으로 올랐다. 잘 먹이지도 못한 어린 생명을 생매장하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손순의 손은 무겁고 떨렸다. 얼마만큼 팠을까. 눈물을 흘리며 정신없이 괭이질을 하던 손순은 괭이 끝에서 「쨍」하는 쇳소리를 들었다. 산 목숨을 매장하려던 터라 가슴 조이던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흙을 파헤쳤다. 뭔지 분간키 어려운 둥근 돌 모양이 드러났다. 더 깊이 판 후 꺼내 보니 그것은 신비스런 모양의 석종이었다. 손순 부부는 생전 처음 보는 이 종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괭이 자루로 쳐 보았다. 『윙-윙』 맑고 청아한 울림이 울려나오자 내외는 깜짝 놀랐다. 『그것 참 이상하다. 돌종에서 쇠종소리가 나다니….』 돌이를 업고 지켜보던 아내가 말했다. 『여보, 이렇듯 이상한 물건을 얻게 됨은 필경 부처님께서 우리 돌이를 구해 주려는 뜻인 것 같아요. 그러니 돌이를 묻어선 안되겠어요. 돌종을 갖고 어서 집으로 갑시다.』 『당신 말대로 부처님 영험이 아니구선 이런 신비스런 돌종이 이런 곳에서 나올 리가 없지.』 에밀레종 어린아이의 한이 깃든 에밀레종 ....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이었다. 아버지 성덕대왕과 어머니 소덕태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구리 12만근을 들여 만들기를 수차례, 번번히 실패하고 오늘 다시 믿음과 정성으로 완성된 종이 처음으로 타종식을 거행하는 자리였다. 신라 35대 경덕왕이하 모든 대신들과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목을 잡은 자가 오시가 울리는 순간 힘껏 종을 때렸다. 꽝............ 드디어 종소리가 울렸으나 그것은 바라고 기원하던 소리가 아니고 깨어지고 금이간 실망의 소리였다. 경덕왕은 끝내 바라고 열망하던 신종을 만들지 못하고 실망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이어 혜공왕이 8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자 어머나 만월부인은 선왕의 한을 일께웠다. " 아버지 선왕이 이룩하지 못한 일을 자식이 성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반듯이 천하에 없는 신종을 만들고야 말겠습니다. " 하고 검교사령 김옹과 검교사숙정대령 감양상을 불러 신종을 만들 것을 명령하였다. 김옹과 김양상은 장인들을 시켜 종틀을 제작하고 비천상을 새기게 하여 쇳물만 부우면 되게 준비를 완료하였는데 실패에 대한 걱정이 앞서 쇳물을 종틀에 부울 수가 없었다. 이럴때 쯤 항간에는 이상한 말이 나돌았다. " 신비한 종을 만들려면 끓는 쇳물속에 천진난만하고 마음이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를 넣어야 된데.", " 다른 것이면 몰라도 누가 귀한 자식을 시주할 사람이 있겠어. " " 그렇다면 신종을 만들기엔 그른 일리지뭐. " 김옹과 김양상은 고심하다가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라도 쫓아 실행하여 볼 것을 논의하고 대책을 생각해 보았으나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승려들과 상의라도 해보면 혹 좋은 얘기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하여 나라안의 여러 승려들을 불러 논의하기에 이른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결론을 얻을 수 없었고 의논만 부분하였는데 신종을 불사하기 위해 시주를 다니던 승려 하나가 나서서 " 지난 날 시주를 받으러 이 마을 저 마을 다닐 때 어느 마을에 모녀가 가난하게 살고 있는 집을 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찾아간 뜻을 말하고 시주를 청하니 아이 어머니가 - 우리집은 가난하여 시주할 것이 없습니다. 가진 재산이라고는 이 아이 뿐인데 이 아이라도 받아가시려면 데려가시지요. - 하며 애기를 얼르고 있는데 가난속에서도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이 정겨워 앞난을 축원하고 돌아 왔습니다. 이제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 아이라도 시주받아 바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하고 얘기 하였다. 신하들과 승려들이 그 집을 찾아가 그때의 일을 얘기하며 아이를 시주하라고 했다. 아이 어머니는 농으로 한 말이라고 하였지만 부처님을 속일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며 아이를 강제로 뺏어다가 끊는 쇳물에 집어 넣었다. 세상을 진동하는 아이의 처절한 울음 소리가 그치고 쇳물을 종틀에 부었다. 아름답게 그림을 새기고 정성들여 만든 종틀에 쇳물이 부어지자 이번에는 금간데도 없고 구멍이 뚫린데도 없이 종신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타종의 그날을 맞아 서라벌의 떠들썩하던 장안의 소란스러움이 일순 멈추고 스치던 바람조차 숨을 죽였다. 당목이 움직이는 듯 하더니 " 에밀레................. " 부드럽고 맑으면서 애처러운 소리가 섞여 서라벌 장안에 울려 퍼졌다. 온 나라가 기원하고 바라던 훌륭한 신종이 완성된 것이다. 사람들은 엄마 품을 떠나 쇳물 속에 녹아든 어린 딸 아이의 슬픈 울음이 종소리에 섞여 울려퍼지는 것이라고 하며 " 에밀레종 " 이라 부르게 되었다. 범종소리와 귀신들.... 옛날 경주 땅 어떤 민가에 얼굴이 곱고 자태가 아름다운 한 여자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너무 예뻐 도화녀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 집에 대궐서 왔다는 장수 몇 명이 들이닥쳐 어명이라며 그녀를 궁궐로 데리고 갔다. 뜻밖의 왕의 부름을 받아 궁에 들어간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임금이 계신 은밀한 방으로 안내됐다. 임금은 그녀를 보는 순간 눈빛이 달라졌다. 『음, 오느라 수고했다. 네가 도화녀냐?』 『그러하옵니다.』 『과연 소문대로 네 미모가 출중하구나. 오늘부터 내 곁에 있도록 하여라.』 『황공하오나 그리할 수 없사옵니다. 예부터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인 줄 아옵니다. 남편이 있는데 또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일은 비록 만승〔天子〕의 위엄을 지녔다해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내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차라리 여기에서 목이 베어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딴 남자를 섬기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갈수록 자세가 꼿꼿해지는 여인 앞에 주색을 즐기는 왕은 더욱 재미를 느꼈는지 희롱하는 투로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되겠습니다.』 왕은 아무 말없이 순순히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해, 주색에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던 진지왕은 나라 사람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 후 2년이 지나 도화녀의 남편 또한 죽었다. 장례를 치르고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 폐위도니 진지왕은 어디서 들었는지 갑자기 도화녀의 방에 나타났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을 잊지 않았으렷다. 지금 네 남편이 없으니 내 뜻을 허락하겠느냐?』 도화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부모님께 고하고 오겠습니다.』 여인은 총총걸음으로 안방에 다달았다. 자다 말고 찾아온 딸을 보고 놀란 부모는 자초지종 사연을 듣고 딸을 달랬다. 『비록 지금은 폐위됐으나 임금님의 명인데 어찌 피할 수가 있겠느냐. 어서 임금이 계신 방으로 들어가도록 해라.』 임금은 그곳에 7일 동안 머물렀는데 그 동안 오색구름이 집을 덮었고, 방안에는 향기가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은 갑자기 사라졌고, 그로부터 이내 여인에겐 태기가 있었다. 다시 열 달 후 해산을 하는데 느닷없이 천지가 진동하더니 사내아이를 분만했다. 도화녀는 아이의 이름을 비형이라 불렀다. 진평왕은 돌아가신 선왕의 아기 비형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아이와 그의 어머니를 대궐에 살게 했다. 비형이 15세가 되던 해. 진평왕은 그에게 집사라는 벼슬을 주었다. 비형은 맡은바 일을 잘 처리해 임금의 신임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대궐에 파다했다. 비형이 밤이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새벽녘에야 돌아와 잠을 잔다는 것이었다. 이상히 여긴 왕은 장수들을 시켜 비형의 행동을 살피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대로 비형은 밤이 되니 성을 날아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서쪽 황천 언덕 위에 다다르더니 한무리의 귀신들을 데리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다. 장수들이 엎드려서 엿보니 귀신의 무리들은 새벽녘 여러 절이세 울려오는 범종소리를 듣더니 각각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비형도 대궐로 돌아왔다. 상세히 보고받은 왕은 비형을 불러 물었다. 『네가 밤마다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니 그게 사실이냐?』 『네, 그렇습니다.』 비형은 숨김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왕은 비형에게 뜻밖의 부탁을 했다. 『네가 귀신들과 그렇게 친하다니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개천에 돌다르를 놓도록 해라. 그곳은 모량내와 기린내, 그리고 물개내 세물줄기가 합치는 곳이므로 홍수때면 물살이 거칠어 나무다리는 견디지를 못하느니라. 그곳에 돌다리를 놓으면 그쪽 행인들이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그날 밤, 비형은 왕가숲 귀신들을 불러 임금님의 청을 이야기했다. 귀신들은 다리를 놓기 시작했다. 한편에선 돌을 나르고 한쪽에선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아름답고 튼튼한 다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오자 귀신들의 일손은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신원사 범종소리를 비롯 경주 곳곳 사찰에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다리는 완성되었고, 귀신들은 종소리를 들으며 흡족한 표정으로 모두 제각기 흩어졌다. 그 후 사람들은 사람의 재주로는 도저히 이룩할 수 없는 훌륭한 다리를 귀신들이 놓았다 하여 이 다리 이름을 귀교라 불렀다. 지금은 탑동 오능 부근 신원사 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약간의 석재가 남아 옛 전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왕은 「반은 귀신이고 반은 사람」이라고 여기저기서 쑤군댈 만큼 비형이 일을 잘해내자 또 물었다. 『귀신들 중에 사람으로 출현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길달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그 길로 길달을 데려다 집사 벼슬을 주니 그는 충성스럽고 정직했다. 그 후 길달을 시켜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하고 밤마다 길달이 그 문루 위에서 자니 그 문을 길달문이라고 했다. 귀신들은 그 후 왕가숲 입구에 영묘사 절터를 골라 하룻밤 사이에 절을 지었다 한다. 얼마 전 흥륜사 터로 불리던 경주시 사정동에서 영묘사(靈廟寺), 영묘사(令妙寺)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내외는 기쁜 마음으로 돌종을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마당 나뭇가지에 종을 매달고 다시 쳐 보았다. 웅장하고 신비스런 종소리가 울려퍼지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손순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구경꾼들은 매일 몰려 왔고,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손순 부부의 효심을 칭송했다. 『암, 부처님이 무심치 않으신 게야.』 『그렇지, 그토록 지극한 효심에 어찌 부처님께서 감응치 않으시겠나.』 마을 사람들도 부처님의 거룩하신 영험에 감사하고 감격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울리는 아름다운 종소리는 대궐에까지 은은하게 들렸다. 『거 참으로 청아한 종소리로구나. 마치 하늘에서 울려오는 듯한 저 신비로운 종소리가 아무래도 보통 종소리 같지 않으니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아오도록 해라.』 흥덕왕은 서쪽 들에서 조석으로 울려오는 종소리의 정체를 알아오도록 좌우에 명을 내렸다. 대궐 신하가 손순의 집에 가서 종을 보고 그 사연을 다 듣고는 임금님께 아뢰었다. 효심 지극한 손순 부부의 간절한 사연을 다 듣고 난 임금은 몹시 흐뭇해 했다. 『옛날 중국 한나라에도 손순 같은 효자 곽거가 있어 어머니를 위해 아들을 땅에 묻으려고 구덩이를 파니 그곳에서 금솥이 나왔다더니 손순의 경우 석종이 솟은 것은 필시 전세의 효도와 후세의 효도를 천지가 함께 보시는 것이로구나. 특히 불보인 석종이 출현했으니 이 어찌 신라의 경사가 아니겠느냐. 불국토에 내린 부처님의 가피로구나.』 왕의 치사에 조정 대신들도 머리를 조아리며 입을 모았다. 『이 모두 대왕의 선정인가 하옵니다. 이 부부에게 후한 상을 내려서 백성들의 귀감이 되게 하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부처님께서 이미 그들 부부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석종을 주셨으니 내 마땅히 그들의 가난을 구할 것이니라.』 왕은 손순 부부에게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석씩을 하사토록 해 그들의 순후한 효성을 표창했다. 손순 부부는 석종을 왕에게 바치려 했으나 흥덕왕은 사양했다. 『부처님께서 효성을 가상히 여겨 베푸신 은혜의 신종을 어찌 과인이 받을 수 있겠느냐?』 그 후 손순은 부처님 은혜에 보답키 위해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정진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큰스님이 되길 기다리며 노모를 봉양하면서 돌이를 잘 길렸다. 스님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손순은 자기가 살던 옛집을 절로 만들고 재가승이 되었다. 그리고 석종을 본존으로 모시는 한편 절 이름을 홍효사라 불렀다. 그 종은 진성왕 때 후백제의 침입 당시 없어졌다. 종이 발견된 곳을 사람들은 완호평이라 부르다 그 후 잘못 전해져 지량평이라 불리었다. 고려시대의 종 종의특징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불교는 신라시대와 같이 호국불교로서 왕실은 물론, 일반국민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었으니, 범종을 주성하는 일도 성행하였다. 고려왕조가 지속되는 동안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였던 고려시대 초기의 범종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양식적으로나 각부의 수볍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12세기 초 몽고에 병란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에는 북방 요의 연호를 사용하던 때로 신라종의 전통을 이어오던 시기이다. 후기에는 다른 나라의 연호대신 독자적인 '간지'로써 기명을 나타내었는데, 고려예술의 각 부분이 치졸화되고 평민화되어가는 쇠퇴기에 들어서는 기기로 범종 또한 신라종과는 달리 외소하였다. 고려의 동종은 전기에는 신라시댜의 형태를 본받아서 대체적으로 상대위에 입상화문이 없으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상대에 입상화문이 나타나고 종의 규모도 왜소하여지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종으로는 전기에는 천흥사동종, 청녕4년명동종, 용주사동종 등이 있고 후기에는 정풍2년 명동종, 내소사동종, 탑산사동종, 죽장사기축명동종 등이 있다. 고려전기의 종 고려전기 의 종은 900년대부터 1150년대까지로 구분하는데 이 때에 속하는 범종은 성거산 천흥사 범종(통화 28년명, 1010년)을 비롯하여 10구에 달한다. ▶ 성지산 천흥사 범종 ▶ 경기도 여주출토 청녕(淸寧) 4년명 범종 ▶ 화성 용주사(龍珠寺) 범종 ▶ 전(傳) 부안 출토 고려범종 ▶ 전등사 범종 ▶ 월봉사지 출토 범종 ▶ 오어사 고려 범종 고려후기의 종 고려후기 의 종은 1150년부터 1392년 고려가 멸망할 때 까지의 것으로 '내소사(來蘇寺) 범종'을 비롯하여 국내에 현존하는 것으로는 대략 64점에 이르고 있다. ▶ 내소사(來蘇寺) 범종 ▶ 안수사(安水寺) 정사명(丁巳銘) 동종 ▶ 정풍(正豊) 2년명(二年銘) 범종 ▶ 죽장사(竹丈寺) 기축명(己丑銘) 동종 ▶ 탑산사(塔山寺) 계사(癸巳)명 범종 ▶ 청동범종(靑銅梵鐘) ▶ 원대 철제 범종 ▶ 송대 철제 범종 조선시대의 종 종의 특징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고려말기에 있어서 불교 그 자체의 쇠퇴와 요승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은 부패상이 나타난 지배계급에 의하여 제계의 표적이 되었으며, 새로운 교화이념으로 유교가 숭상됨에 따라 신라와 고려를 통하여 800여년이나 국교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불교가 유교로 되체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불교미술의 쇠퇴를 가져오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을 중심으로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고 있다. 전기는 고려시대의 여운을 엿볼 수 있는 시기로 그 유래를 보이고 있다. 규모도 거대한데, 이것은 당시 불교를 보호한 왕실과의 관계서 중성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흥선사동종, 봉선사대종, 낙산사동종, 해인사홍치4녀명동종 등이다. 후기에는 고려의 여운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전란으로 인하여 오랜 전통이 단절되고 조형미술은 전반에 걸쳐 새로운 방향을 찾게되었다고 한다. 후기의 범종은 100구가 넘게 남아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전시대를 통하여 가장 많은 수 이다. 후기의 범종들은 대개가 주성연기가 있어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데 모두 청나라의 연호(강희.건륭)를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광사숭정 7년 명동종, 직지사순치 15년명동종, 통도사강희25년명동종, 범어서웅정 6년명동종, 영국사건륭26년명동종 등이 있다. 조선전기의 종 조선시대에는 제 14대 25년(1592)에 임진왜란이라는 큰 國이 있어 이 시기를 중심하여 전.후의 로 구별하고 있다. 조선전기는 전대인 고려시대의 여운을 엿볼 수 있는 시기로서 고려적인 조성양식과 수법을 다소나마 간직한 작품이 출현할 수 있었던 여건을 갖추고 있어서 오늘날 실제로 그 유례를 보이고 있다. 전기의 범종은 다음과 같다. ▶ 보신각 성화 4년명 범종 ▶ 안정사 만력 8년명 범종 ▶ 봉은사 홍무25년명 범종 ▶ 광흥사 만력 11년명 범종 ▶ 낙산사 동종 ▶ 갑사 동종 ▶ 봉선사 동종 ▶ 만연사 범종 ▶ 백련사 융경 3년명 범종 ▶ 해인사 홍치 4년명 범종 ▶ 태안사 순천원년 동종 ▶ 흥천사 동종 조선후기의 종 조선 후기의 범종은 1600년경 이후부터로 이?에는 본래의 한국 범종의 형태나 양식을 상실한 중국 범종의 모방 형식을 거의 따르고 있는 변질적인 형태가 되었다. 다시말하면 완전히 본래의 전통 양식이나 형태를 상실한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중국 범종의 본래 양식과도 차이가 있는 또 다른 혼합 형태의 범종이 나타나고 있다. ▶ 화계사 강희 22년명 범종 ▶ 보광사 숭청 7년명 동종 ▶ 봉은사 강희 21년명 범종 ▶ 선암사 대각암 순치 14년명 동종 ▶ 선원사 동종 ▶ 직지사 순치 15년명 동종 ▶ 능가사 범종(楞伽寺 梵鐘) ▶ 송광사 숭정 7년명 범종 ▶ 대복사 범종 ▶ 용흥사 순치 원년명 범종 ▶ 법주사 숭정9년명(法住寺 崇楨九年銘) 동종 ▶ 범어사 옹정 6년명 동종 ▶ 강화 동종 ▶ 탑산사 동종 ▶ 통도사 강희 25년명(通度寺 康熙二十五年銘) 동종 ▶ 만수사 범종 ▶ 영랑사 범종 ▶ 영탑사 범종 ▶ 성주사 동종(聖住寺 銅鐘) ▶ 마곡사 동종 ▶ 칠장사 동종 ▶ 개암사 동종(開岩寺 銅鐘) ▶ 영랑사 범종 ▶ 영탑사 범종 ▶ 영국사 동종 ▶ 선운사 범종 (禪雲寺 梵鐘) ▶ 반룡사 동종 (盤龍寺 銅鍾) ▶ 양양 명주사 범종 ▶ 팔당문 동종 ▶ 희방사 범종 ▶ 참당암 동종 ▶ 종 이야기 대종천의 종 》 토함산 추령에서 대왕암 부근으로 흘러 들어가는 냇물을 대종천이라 한다. 감은사에는 크고 훌륭한 동종이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울려 은은하게 들로, 산으로, 바다로, 맑은 소리가 퍼졌는데 임진왜란(AD 1592)때 왜병들이 감은사에 침입하여 대종을 훔쳐 일본으로 가려고 배에 실었다. 그러나 배가 떠나려 할 때 갑자기 천둥이 치며 큰 풍파가 일어나 배는 파선되어 부서지고 왜병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오직 감은사의 대종만은 옛 주인을 찾아 대왕암 곁 물 밑에 가라 앉게 되었다. 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대종은 은은히 울리며 옛님의 넋을 위로하고 있었으므로 그로 인해 냇물을 대종천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지금도 날씨가 고요할 때면 가끔 종소리가 들려 온다고 한다. 성지 소리못 》 성지리 소리못 경주시 천북면 성지리에 소리못이라는 곳이 있다. 신라시대에는 이곳을 광곡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조선 초기에 못이 이루어져 이곳이 농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기도 했다. 어느 날 이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고 전해 오는데 그 소리는 다름아닌 종소리였다고 한다. 이 못둑에 들어서면 봉덕사 봉덕사 종소리가 바로 가까이서 들려오는 것 같아 이 곳 주민들은 이 종소리를 들으려고 못으로 달려가 거짓인양 들려오는 종소리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조선 정조때 손녀원이란 선비가 소리지라고 불러 이 곳 마을 이름도 성지로 개칭하여 아직 성지라 불리워 지고 있다. 이 곳 성지의 소리못은 지금도 많은 세인들에게 알려져, 휴양 및 낚시를 즐기려고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종 참고서적 1. 김현준, 『사찰 그 속에 깃든 의미』, 도서출판 효림, 1997 2.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3. 『국립경주박물관』, 도판 115, 1997 4. 한국의 미 23 『금속공예』, 정영호외 편, 중앙일보사, 1985 5. 『범종』, 대원사 6. 건천읍지, 단석사, 『아래마을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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