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비오는 금요일 전철 속 드라마

korman 2010. 9. 25. 18:28

 

 

 비오는 금요일 전철 속 드라마

   

태풍이 휘몰고 간 끝자락에서 하염없이 비가 내리던 금요일 저녁, 한달여의 시간을 서울에서 혼자 흘려버리고 마누라가 그립다며 자신이 살고 있는 남반구로 돌아가는 친구와 커피 한잔의 이별을 고하고는 인천의 내 집 앞으로 가는 광역버스를 타기 위하여 우산을 눌러 쓰고 강남역 사거리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였다. 늘 그렇듯이 강남역 사거리 광역버스 정류장에는 인천을 비롯하여 경기 남서부로 가는 버스들이 몰려있어 저녁 무렵에는 언제나 몇 겹의 긴 인간 띠가 생긴다. 특히 금요일 저녁 인천행 줄은 늦은 시각 까지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지하도 계단을 따라 내려와 자정을 넘기기까지 한다. 강남지역으로 출타를 하면 앉아 가겠다는 욕심에 그 긴 줄 끝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서 보지만 이내 발걸음을 지하철로 돌리곤 한다. 기다리는 시간에 서서 가더라도 전철을 타는 것이 시간상 낫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탓이었을까. 비오는 날에는 줄이 더 길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발걸음이 그 긴 줄의 끝을 찾아 옮겨졌다. 기실 다른 날의 저녁에도 강남역에서 앉을 확률은 그리 높지 못하다. 버스 초창기 양재동을 지나 오가던 날에는 강남역이 종점이었던 관계로 앉아 갔지만 이제는 우면산 터널을 지나 서울로 입성하여 서초역과 교대역을 거쳐 강남역에 닿기 때문에 이 두 지역에서 타고 오는 사람들 때문에 강남역에서는 줄이 그리 길지 않아도 보통 차를 두어 대는 보내야 앉을 기회가 주어지기 일쑤다. 그런데도 앉아 가겠다는 일념으로 그 긴 줄의 끝을 바라보다 문득 지하철 한정거장 먼저 교대역으로 차를 마중 가서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 깊은 땅 속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나 지하철도 그리 녹녹한 것은 아니었다.

 

이 역시 비오는 탓이었을까 아니면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체념하고 지하철로 몰린 것인가. 평소 그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지하철을 타면 이토록 붐비지는 않았음에도 예전 짐짝처럼 실려 가던 모습이 그날 그곳에서 생겨났다. 전동차 문이 열리 안으로 빨려 들어간 생면부지의 사람들은 자신이 서 있고 싶은 곳을 선택 할 권한도 박탈당한 채 그 움직일 수 없는 밀착된 몸을 전동차의 흔들림에 맡겨두었다. 순간 같은 처지에서 뒷주머니 넣어두었던 지갑이 없어졌던 예전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갑을 앞주머니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비틀어 손을 뒤로 보냈는데 손이 뒷주머니에 닿으려는 찰나에 손등에 무언가 통통한 곳의 부드러운 쿠션이 느껴졌다. 아차 싶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역시 통통한 얼굴의 한 아가씨가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그 아가씨의 토실한 엉덩이와 내 지갑사이에 손이 끼인 것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게 시비가 될 수 있기에 황급히 몸을 다시 비틀었다. 딸아이 시집보낼 나이에 이런 일로 망신은 당하지 말아야지.

 

가까스로 몸은 비틀었으나 버팀목이 없는 몸은 전동차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로 저리로 밀고 밀리는 훈련이 반복된다. 이런 민망한 순간이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야 괴롭겠지만 핑계가 없어 밀착하지 못하는 남녀지간이야 어떠하랴. 공공장소에서 보기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이해하고 보고 지나가야 하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몸을 틀어 시야를 바꾸자 그런 상황이 나타났다. 이들은 주어진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서로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얼굴에 웃음을 하나 가득 머금은 채 전동차 흔들림의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젊은 친구들의 미소에 요새 한창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내 딸아이는 대중 앞에서 저러지는 않겠지 하는 나의 마음과 몇 년 전 신도림역에서 사람들에 떠밀려 꼼짝 못하고 외간 남자와 마주하게 된 한 중년 여인이 몸을 비틀어도 돌리지 못하는 처지에서 민망한 얼굴로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관객에게 던진 말, 그 말이 겹쳐졌다. “아이고 나 우리 남편과도 이렇게 못해봤는데.”

 

교대역에서 또 밀려드는 사람들을 거의 힘으로 밀치다 싶이 하고 겨우 지상으로 올라온즉 비는 계속 내리고 여기 정류장 역시도 사람들로 넘쳐났다. 거리는 주차장 비슷하게 되어가고 이 상황에서 나를 태울 버스가 한 시간 내에 나타나기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난 그냥 잠시 짐짝으로 가자는 생각을 하고 다시 지하철로 빠져 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잠시 내렸다 다시 탄 지하철에는 더 이상의 인파도 없었고 짐짝도 없었다. 그저 서 있기에 편한 곳에 서 있었을 뿐. 그리고 갈아타는 신도림에서는 때맞추어 동인천행 급행이 도착되었고 난 거기서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라본 앞의 의자. 그 그림이 참 우스꽝스러웠다. 아니 그게 바라보는 사람이 시선을 돌려야 하리만치 민망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저 한 스물다섯 안짝이나 되었을까. 캐주얼한 옷차림의 아가씨 하나가 술을 좀 과하게 드셨는지 앞으로 옆으로 고개 운동을 심하게 하더니만 급기야는 무릎 위에 놓았던 가방이, 듣고 있던 MP3가, 끼고 있던 안경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줄줄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안방에 자리 깔고 누운 듯 몸에서 힘을 빼고 결국에는 보이지 말아야 할 은밀한 곳 까지 대중에 공개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성의 심리란 무엇인지 그녀의 양옆에 그 또래의 젊은 여성들이 앉아 있었지만 누구도 그런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좀 든 여자가 옆에 앉아 있었다면 그리 내버려 두었을까. 몇 정거장 지나 옆 사람들이 다 내렸음에도 그녀의 상태는 그대로 계속되고 나라도 어찌 해 주어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또 몇 정거장 지나는 사이 차는 종점 이르렀다. 깨우기라도 하고 내려야 하겠다 하고 텅 빈 차 안을 들러보다 마침 전동차의 앞쪽으로 가기 위하여 다른 칸에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젊은 여성이 있어 그녀를 좀 추슬러 주라고 부탁하고는 어깨를 두드려 안경부터 집어주는 것을 보며 출구로 향하였다. 또 딸아이 생각이 났다. 술은 안 먹으니 저리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비의 걱정은 늦은 시간에 본 전철 속 드라마로 이어진다. 비오는 금요일의 드라마였다.

 

2010년 9월 열 이렛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