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보내는 카톡 아침 신문을 보다가 울컥하는 마음 때문에 아직 여명이 가시지 않은 창밖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대답 없는 딸에게 매일 카톡을 보내는 50대의 한 아버지에 대한 기사였다. 21살에서 나이가 멈추어버린 그의 딸은 지금 아버지 곁에 없다. 어느 날 알바를 하고 귀가하다가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과 그의 후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방치되어 그의 곁을 떠났다고 한다. 재판에서 재판장이 범인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피해 여성을 왜 집에 데려다 주지 않았나” 그들은 실실 웃으며 “우리가 집을 모르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는 범인들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조차 들은바 없는데 범인들은 초심 형량이 높아 억울하다고 항소를 하고 재판정에서 그는 오열하였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설사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인권은 존재한다. 모두가 법의 테두리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을 권리도 있다. 그러나 난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누가 이런 계획적 흉악범들을 변론할까 그리고 무슨 이야기로 범인들의 바람막이가 되어줄까 그리고 내가 변호사라면 이런 사건에 변론을 하겠다고 나설 수 있을까 늘 그것이 궁금하다. 변호인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이런 흉악범들의 감형은 원치 않겠지만 사회 체제상 그리 하고 있는 것이겠지. 최종 결정이아 재판장의 몫이겠지만. 나에게도 딸이 있다. 다행이 아무 탈 없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이제 좀 있으면 한 아이의 어미가 된다. 그 아이가 중학교 다닐 때 아들만 있는 친구들이 물었다. “딸 키우는 재미가 어떠냐”고. 내 대답은 늘 “딸아이 가슴 커지는 것에 비례하여 애비 걱정도 커진다네.” 딸아이 가슴은 이제 곧 어미의 가슴이 되겠지만 그래도 세상이 하도 험악하여 지금도 퇴근 후 집에 잘 들어왔는지 늘 전화를 한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어린이집 다니는 손녀들에 대한 걱정이 앞장서간다. 언제 아름다운 세상임을 느낄 수 있으려나? 2013년 3월 20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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