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어라
언제나 그랬듯이 올해도 12월이 되자 각종 미디어매체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사랑의 온도계’를 비롯하여 연인과 가족과 이웃 그리고 사회의 외진 곳에 대한 많은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러나 그 쓰임새에 따라서 의미가 다르겠지만 공통된 것은 그 속에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연말에 강조되는 사랑은 연인간의 사랑보다는 가족과 사회에 대한 사랑이다. 그래도 사랑이라는 단어에 순위가 부여된다면 이성간의 사랑이 제일 먼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0여 년 전쯤이었을까. 집에서 가까운 야산 공원둘레를 집사람과 손을 잡고 산책하고 있는데 지팡이를 짚고 홀로 나오신, 당시 나보다 20여세는 연배로 보였는데, 노인네 한 분이 우리를 지나치면서 으~음 하고 헛기침을 하셨다. 우리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 고로 그냥 웃으며 걸었다. “나이깨나 먹은 것들이 남사스럽게...”라는 의미 아니었을까? 만인에게 노출된 공간에서 연인이나 부부간에 손을 잡는 조그마한 애정 표현도 생각하기에 따라 헛기침이 나오는 세대는 아직도 존재한다.
요새 TV를 보면 노인부부만 사는 곳에, 주로 농촌이지만, 찾아가 그들의 생활과 노인 부부간의 애정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온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결혼 전에 얼굴도 보지 못하고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부모들의 뜻에 따라 맺어져 지금껏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무슨 대답이 나올까? 하기야 사랑을 말로 설명하라고 하면 누군들 제대로 된 설명을 할까마는 그러나 이들에게는 살아오면서 마음에 담긴 사랑이 존재한다. 방송진행자가 가끔은 짓궂게 배우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고 하면 “사랑은 마음속에 있는 거여”하고 심장 쪽 가슴을 두드리신다. 가끔 노출된 뽀뽀로 대신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난 그 대답이 사랑의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에 있는 사랑은 실천으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한 편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마다 늘 떠올려지는 2개의 상반된 말이 있다.
그 첫째가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이다. 1967년에 나온 청마 유치환의 서간집 책이름이다. 청마의 시 “행복”의 마지막 귀절 "나는 오늘도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했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 귀절의 대상이 청마의 배우자였더라면 행복은 배가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편지의 대상이 다른 여인이었음에도 그들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로 미화되었다. 배우자의 입장에서 보면 속 터지는 불륜일 텐데 문학의 이름으로 플라토닉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청마를 모욕하지 말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내가 3자로써 느끼는 것은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깝다. 서간집이 발간될 당시 그 행복의 대상이 되었던 여류시인이 보관하고 있던 편지가 6.25때 불타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도 5,000통 이상이 남아 있었다니 대단한 사랑이기는 해도 세속적으로 생각하면 엄연한 불륜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이라는 시는 정말 마음에 든다.
다른 하나는 유명한 말장난 “사랑하므로 헤어진다”라는 말이다. 이 말을 맨 처음 한 사람은 19세기 덴마크 철학자이며 종교학자 ‘키에르 케고르’가 사랑과 종교적 갈등 속에서 약혼지와 파혼하면서 남긴 이야기라고 하는데 내 기억에 우리나라에서도 누군가가 했던 말인 것 같아 찾아보니 1960년대 유명한 여배우 김아무개씨가 당시 유명한 남자배우 최아무개씨와 재혼하였다가 1969년 헤어지면서 하였다고 한다. 과연 이 말에 내포하고 있는 그들의 사랑에 대한 참뜻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진정 이들의 사랑은 마음속에 있었을까? 아니면 인생의 착오였을까? 이 말을 두고 내가 느끼는 것은 유명인으로 헤어지는 체면을 위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말도 있다. 가슴속 깊숙이 간직한 사랑이었다면 그저 뒤돌아 눈물만 흘렸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몸동작으로 표현한다. 처음에는 두 팔을 머리위로 올려 크게 표현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여주더니만 요새는 참 남사스럽게도 엄지와 검지를 빗긴 모양을 만들어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엄지와 검지를 빗긴 모양은 예전 같으면 좀 볼썽사나운 사람들이 선량한 사람들에게 돈을 내노라고 표현할 때 쓰던 동작이다. 그걸 요새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한다. 사랑이 자꾸만 작아지는 것 같아 섭섭하다.
청마는 우체국에서 편지를 쓴다고 하였다. 나도 집사람과 연애하던 시절 우체국에서 엽서를 썼다. 한 20여통을 연번으로 쓰고 며칠에 걸쳐 종로, 을지로, 광화문 등등 옮겨가면서 조금씩 우체통에 넣었다. 집사람이 그 엽서를 모두 수거하는 데는 10여일 걸렸다고 한다. 그 시절이 행복이라는 시에 오버랩된다.
2016년 12월 18일 하늘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