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종의 일반적 이론

korman 2006. 9. 29. 23:21

(鍾)

 



요약

 

타악기의 하나. 금속으로 주조하여 때리거나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데, 신호용(信號用)으로 쓰이기도 한다.

설명

타악기의 하나. 금속으로 주조하여 때리거나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데, 신호용(信號用)으로 쓰이기도 한다. 발음체가 공명체를 겸하는 체명악기로, 큰 컵을 거꾸로 매단 형상이다. 당목(撞木)·망치 등으로 겉면을 두드리는 방식과 탁(鐸)과 같이 안에 매단 추를 흔들어 종의 안벽을 쳐서 소리를 내는 방식이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대개 대형 종은 당목식(撞木式), 소형은 추를 단 형태이지만 유럽에서는 추를 단 것이 주류를 이룬다. 용도가 한정된 음악 연주용 외에는 대부분 시각을 알리거나 신호를 보내는 데 쓰여서 시각을 알리는 시종(時鐘) 및 비상사태를 알리는 경종(警鐘)으로 구분된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지녀 재해·질병·악귀 등을 쫓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세계 각지에 전하는 민속전통의 종을 보면, 초기에는 흙·나무 등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나 야금(治金)·주금(鑄金) 기술의 발달과 함께 철·동합금 등의 것이 주류를 이룬다. 지역차도 있어서 동·서아시아에는 청동(靑銅), 아프리카에는 철, 고대이집트·중남미 등지에는 금·은을 이용한 것이 많다. 모양은 아가리(鐘口)가 원형인 것이 일반적이지만 타원·사각·직사각 등의 형태도 있다. 측면도 그에 따라 반원·반타원·삼각·직사각 등의 모양이 나타나고 꽃이나 동물 등 주로 상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무늬의 장식이 가미되는 경우도 많다.


서양
오리엔트문명의 중심지였던 바빌론에서는 3000여 년 전의 종이 발굴되어 세계 최고(最古)를 기록하고 있다. 그곳을 중심으로 추 달린 종이 많이 나타났는데 종은 이곳에서부터 서쪽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에 종이 들어온 것은 5세기 이래 켈트족에 의해서였으며 주조기술은 6세기 말 이후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 주조기술 전파의 매체 역할을 한 것은 그리스도교로, 13세기 장인(匠人)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수도원에서 종을 만들었다. 프로테스탄트와 달리 가톨릭에서는 성당에 반드시 종을 매달도록 하고 있는데, 보통 여러 개의 종이 동시에 흔들려 파도소리처럼 무질서한 소리가 나는 것이 특징이다. 또 동유럽의 그리스정교회에서는 종을 고정하고 끈이 달린 추를 당겨 울리는 방법을 쓴다. 종교적 용도 외에 시(市)와 같은 공공기관에서도 쓰이며 음악에도 널리 보급되어 13세기 무렵부터는 악기로서 중요시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한층 아름다운 음색을 내기 위해 윗부분은 원통형에 가깝고 아가리는 크게 벌어진 기능적인 종의 형태가 나타났다. 이것은 외부에 많은 장식과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주조 후에는 음 조정이 안되는 범종(梵鐘)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 밖에 방목하는 가축의 목에 작은 종을 다는 관습이 발칸반도나 터키 지방에 아직도 남아 있다.

중국
고대 중국의 종은 크기순으로 배열하여 음계를 만들고 나무망치로 쳐 소리를 내는 악기였다. 이를 편종(編鐘)이라 하는데, 지배자의 제례악(祭禮樂)에 쓰였으며 권위의 상징이자 국가의 보물로 다루어졌다. 종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어서 그 소리로 사악한 힘을 물리치고 정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는데, 종을 주조할 때 짐승을 제물로 하여 그 피를 바르는 일, 또는 변고가 생기면 종이 저절로 울렸다는 등의 전설은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종을 최초로 주조한 사람은 황제(黃帝)의 공인(工人)이던 수(垂)와 염제(炎帝)의 손자 고연(鼓延)이라는 설과, 고대 직능(職能) 집단의 한 계급으로 추정되는 부씨라는 설이 있다. 종을 가장 즐겨 사용하였던 시대는 은(殷)·주(周)의 청동기시대로 전하며 은나라 유적에서는 정(鉦)과 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정은 자루 부분인 용(甬)을 바닥에 박아 거꾸로 사용한 것으로 주나라에 이르면 용을 위로 매달아 쓰게 된다. 정·종·탁은 횡단면이 모두 방추형(紡錘形)인 점이 특징이다.

일본
일본의 종은 한국의 고대 청동제 탁에 그 원류를 두고 있다. 야요이시대[彌生時代(미생시대)]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서쪽 지방에서 사용된 것이 가장 오래된 예로, 종교의식에 주로 쓰였으나 악기로도 중요시되었다. 그러다가 불교문화가 발달하면서 범종이 등장하는데 초기에는 중국·한국에서 전래되다가 698년 무렵부터 자체적으로 주조하게 되었다. 한편 많은 전설을 통해, 중국에서와 같이 일본인들도 종에 대해 신비로운 믿음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종이 물속에서는 뱀이나 용으로 변해 있다든지 땅속에 묻힌 종이 시각을 알려 준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특히 범종을 주조할 때 여인의 속옷 한벌을 함께 넣지 않으면 종이 울리지 않으며 제물이 된 옷의 주인은 반드시 죽는다고 여기는 <희생신앙>은 한국 봉덕사(奉德寺)의 종에 얽힌 전실과 유사하다. 사원에서의 쓰임 외에 신사(神社)의 경내나 거리에 설치되어 시간을 알리는 역할도 하였다. 에도시대[江戶時代(강호시대)] 이후에는 화재나 수해 등 비상시에 쓰인 경종도 등장하였는데 근대화되면서 점차 모습을 감추었다.

한국

분류·기원·특징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종에는 종·순(錞)·탁·박·요·탁(鐸)·편종·특종(特鐘)·영(鈴)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는 크게 3가지로 구분한다. 즉 방울류의 탁·영, 한국 민족문학 소산물로서의 범종, 악기로 쓰인 편종·특종·순·요·박·탁·경(磬) 등이다. 그 중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 탁(鐸)·영으로, BC 4세기 무렵의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기록으로 전하는 것이 없어서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주로 제사나 잔치 등에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사람과 귀신을 흥분시키고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는 영은 칼·거울과 함께 무교(巫敎)의 성구(聖臭)로 전해오고 있다. 한편 불교의 상징물인 범종은 725년(성덕왕24)에 만들어진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이 최초의 것으로 전한다. 방울과는 비교도 안되는 규모로, 크고 우람하여 강력한 전제국가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소리는 지도(至道)와 대음(大音)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 해석되며 부처의 진리와 자비를 담은 것, 선왕의 공덕과 위엄을 기린 것 등 주조 의미도 심오한 것이 특징이다. 그 밖에 중생이 자신들의 기원을 담아 주조한 것도 있다. 악종(樂鐘)은 말 그대로 음악에 사용된 것으로 조선시대 유교의 예악과 함께 정비되었다. 예악 사상은 인성·도덕·정치순학 등의 효용성에 음악의 가치를 둔 것이 특징인데 세종 때에는 그 격법(擊法)·협연법(協演法) 등 악종 자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다.

한국종의 특징
이상에서 방울류·범종·악종 등을 구분해 보았는데 그 중 범종은 <한국종>이라는 학명이 붙을 만큼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본류는 중국 주나라의 용종(甬鐘)을 모방한 것으로 전하지만 중국과는 다른 특수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용종의 자루(甬) 부분이 한국종의 용뉴이며, 수두문(獸頭文)은 용두(龍頭), 종신(鐘身)에 있는 36개의 돌기인 매(枚)는 한국종의 유두(乳頭), 수(隧)에 해당하는 것이 당좌(撞座)라는 등의 견해는 <모방>에 대한 근거이다. 그러나 종꼭대기 부분에 음통(音筒)이 첨가되고 용종과 달리 내부가 뚫려 있으며, 유곽(乳廓)이 종견(鐘肩)의 4곳에 배치되고 그 안에 9개씩의 유두가 조식된 것, 대칭으로 배치된 공양비천상(供養飛天像)과 당좌 및 명문의 조각 등은 한국종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한국종의 전형은 신라시대에 이루어졌으며 상원사 동종과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771)으로 대표된다. 그 세부 명칭은 〔그림〕과 같다. 형식적인 특징 외에 소리에 있어서도 맑고 청아한 음색에 긴 여운과 뚜렷한 맥놀이를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용통(甬筒)이라고도 하는 음통에 대해서는, 타종시 내부잡음을 감소시키고 음향 확산에 도움을 준다는 공학적인 해석이 붙기도 하였다. 또한 종아래에 항아리를 놓거나 땅을 파서 명동(鳴洞)을 만드는 것도 독특한데 그 역할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신라시대
앞서 말한 대로 한국 범종의 선형을 이루는 신라시대 범종은 주로 반원권문(半圓圈文)을 사용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성덕대왕신종과 실상사파종(實相寺破鐘, 9세기 중반)만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을 주문양으로 하고 있으며 부수적으로는 보살상·연화문(蓮花文)·당초문·운문(雲文) 등이 새겨지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종신에는 비천상이 새겨진 것이 많은데 그 사실적인 부조범은 정교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또 대부분의 범종에는 조성연대 및 사연을 기록한 명문이 있어서 그 조성 연대는 물론 각 부분의 조성양식·조각수법 등의 연구자료로 쓰인다. 세계적으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성덕대왕신종의 경우 1000자가 넘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명문의 내용에는 당시의 관등(官等)을 나타낸 것도 있어서 주종사업이 국가적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처럼 정교하고 화려한 신라의 범종이 파손되지 않고 전하는 것은 국내외를 통틀어 7구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중 4구는 일본에 있어 우리 것의 아름다움에 대한 아쉬움을 더해 주고 있다. 한편 고구려·백제에 대해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그 발전 과정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나, 1974년 출토된 백제의 금동제풍탁(金銅製風鐸)이 신라 종과 몇 가지 유사한 특징을 지닌 점으로 미루어 범종 역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고려시대
신라의 양식을 이은 고려 초의 범종은 호국불교사상과 함께 일반 백성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어 개인적인 발원을 담은 주조 활동도 성행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수법이나 규모에 많은 변화를 보였다. 그 가장 큰 원인은 12세기 몽고의 침입으로, 이전까지 이어오던 신라의 전통에서 벗어나 예술성도 퇴화하며 왜소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구체적인 특징으로 상대에 입상학문(立狀花文)이 나타나며 정교한 조각 수법보다는 음·양각의 선적(線的)인 도형으로 형식화되어 졸렬한 느낌을 준다. 명문은 유곽 안에 위패(位牌) 모양을 조각하여 그 안에 양각하는 새로운 형식을 사용하였다. 신라범종에 비해 국내에 보존된 것이 상당히 많으며, 천흥사동종(天興寺銅鐘, 1010)·청녕사년명동종(淸寧四年銘銅鐘, 1058)·정풍이년명동종(正豊二年銘銅鐘, 1157)·내소사동종(來蘇寺銅鐘, 1222) 등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조선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은 조형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후기의 특징을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전기 범종은 고려의 특성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으며 비교적 규모가 거대하여 높이가 2.8m에 이르는 것도 있다. 이에 반해 후기에는 주조된 수는 많으나 높이 65㎝ 정도의 것이 나타나는가 하면 장식 문양도 더욱 치졸해진다. 형식면에서의 차이로는 견부(肩部)에 복련대(覆蓮帶)가 돌려지던 것이 후기에는 연화문이나 범자열(梵字列)이 돌려졌다는것, 전기에는 명문을 종신 전면에 해서(楷書)로 양각했는데 후기에는 양각·음각·점선각이 나타났으며 주성연기(鑄成緣記)는 모두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그 밖에 후기의 특징으로는 용뉴가 쌍두(雙頭)라는 것, 용통이 없는 것도 많이 나타난다는 것, 유곽이 상대에서 완전히 떨어진 사다리꼴이고 유곽 사이에 보살상이 1구씩 새겨져 있다는 것, 당좌가 없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아가리에서 종신부로 올라갈수록 두께가 조금씩 얇아지는 전통적 특성을 지키고 있었다. 대표적인 범종으로는 전기의 흥천사동종(興天寺銅鐘, 1461)·봉선사대종(奉先寺大鐘, 1469) 및 후기의 보광사숭정칠년명동종(普光寺崇禎七年銘銅鐘, 1634)·직지사순치십오년명동종(直指寺順治十五年銘銅鐘,165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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