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전 수요일 카톡이 울리더니 기차표 4장이 떴다. 일요일 춘천 호반의 가을을 즐기라고 큰 아이가 보내온 용산-춘천 ITX 청춘열차 왕복 승차권이었다. 이심전심이었나. 그걸 한 번 타봐야겠다고 철도청 예약사이트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2층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한 열차편에 단 두 량만이 2층 칸이라 자리 잡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은 수도권 전철이 춘천까지 가는 고로 다리를 조금만 고생시키고 세월아 네월아 하고 다녀오면 예약도 필요 없지만 굳이 청춘열차를 찾은 것은 2층에 미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르는 강변의 풍경은 2층에서 바라보아야 더 제격이 아니겠는가.
경인지방에서 오래전에 학창시절을 보낸 중장년치고 경춘가도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서클활동이나 학과 야유회며 개인적인 데이트까지 통기타를 둘러멘 청춘들이 몰리던 곳이 모두 경춘가도에 있지 않은가! 앙수리,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 등등. 막걸리 한 사발과 도토리묵 한 점에 기타 줄이 튕겨지고 청춘들은 그게 낭만이라고 목청을 돋웠다. 지금은 뼈가 없는 닭갈비가 대세지만 뼈있는 닭갈비, 그야말로 버리자니 아깝고 먹자니 고달픈 계륵볶음에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깡통맥주 그리고 공지천의 이디오피아산 커피 한 잔은 데이트의 필수요건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 그 각종 모임들은 MT, OT로 불리고 있으며 양철깡통으로 되어 깡통맥주로 불리던 것은 알루미늄으로 되어 캔맥주라 불린다. 세월의 흐름이 말에게도 변화를 가져왔다.
춘천역에서 강원도립화목원(수목원)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요새 웬만한 곳에는 버스정류장마다 그늘막이 지어져 있고 버스 도착을 알려주는 교통정보시스템이라는 것이 설치되어 있어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내가 탈 버스가 도착하는지 수시로 알려준다. 그런데 그곳에 정차하는 버스번호는 10여개가 넘는데 모니터에 나오는 것은 단 두 대 뿐이었다. 이런데 와서는 그냥 못 본척하면 좋으련만 이놈의 성격은 꼭 한 번은 따져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이런 시스템 만드는데 천문학적 예산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관리가 잘못되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단지 보여주기식 행정을 위한 시설물로밖에는 인식이 되지 않는다. 이 교통시스템은 지금 여러 나라로 수출되는 아주 좋은 프로그램이라는데. 언제 버스가 오는지 찾아보라고 차근대는 집사람 요구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바쁘게 다니려고 온 거 아니니 그냥 느긋하게 기다려보자고 그늘막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총천연색 옷차림에 각종 사투리를 써 가며 이리로 저리로 버스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이런 여행의 한 즐거움 아니겠는가.
국화꽃 향기와 각종 단풍에 취한 채 화목원을 나와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정류장에 앉았다. 긴 나무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한적한 정류장에는 바로 옆 토속음식점에서 흘러나오는 흘러간 노래들만 추억을 부를 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또 오가는 버스도 없었다. 근처 밭에 나온 분에게 물어보니 “버스, 기다리면 오겠지” 하고 기다려야 한단다. 크래커 한 봉지와 보온병의 커피로 버스정류장 벤치의 정찬을 즐기며 스마트폰 어플에 정류소 번호를 넣었다. 45분을 가다려야 한다고 했다. 45분의 어슬렁거림도 여행의 미학이 아니겠는가. 괜히 실없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정류장에 붙어있는 노선별 행선표지에 눈동자가 멈췄다. 시내로 들어가는 방향으로 화살표가 표시 되어야 하는데 일률적으로 모두 외곽으로, 즉 반대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이런 건 살피지 말자 하였는데 또 거기에 눈동자가 멈추어버렸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주점의 메뉴를 살피며 한낮의 막걸리 한 잔이 국화와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집사람에게 춘천 명동의 닭갈비 골목에 가서 막국수를 먹으라 하였는 고로 혓바닥만 입속에서 한번 돌리고 버스에 올랐다.
그 골목, 연기와 냄새가 자욱하다. 처음 찾아왔으니 우선 골목 탐방이 필요했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 모든 집이 가득 찼다. 골목을 꽉 채운 중국말 소리가 닭갈비의 위력을 실감케 하였다. 기본 2인분. 닭고기 알레르기가 있는 집사람은 막국수 한 그릇을 시켰지만 2인분이나 되는 닭갈비를 소주친구도 없이 혼자 점심에 먹기는 고역이었다. 공지천엘 가야하니 혼자 홀짝일 수도 없고. 맛? 예전에 어떤 맛이었을까? 기억에 없으니 그냥 맛있었다고 하자. 예전 막국수에서는 토속적인 메밀맛이 났던 것 같은데 내가 앉았던 집의 그것은 현대인의 입맛에 맞추었는지 전분이 들어간 면의 동침이 냉면에 다진 양념을 섞은 맛아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였던가. 아침에 시작하였다는 춘천마라톤이 버스가 가는 길을 계속 막아서고 있다. 길바닥에서 오랜 시간을 다 허비하면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공지천에 도착하였다. 마라톤 코스가 공지천을 출발하여 의암댐을 왕복하는 코스이고 누군가의 설명에 의하면,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행사를 위하여 전국에서 등록 선수들은 물론이고 동호회까지 몰려들어 7만(?)여 명이 춘천에 집결하였다고 하였다. 예전처럼 공지천이 바라보이는 창가에 앉아 이디오피아산 커피를 한 잔 해야겠는 생각은 착각으로 변하고 우선은 인파를 벗어나기 위하여 산책로를 따라 느긋이 걸었다.
가을 호수에 드리운 만추가 못마땅하였는지 짧은 해가 호수에 짙은 그림자를 만들 즈음 수상카페들의 소음 같은 섞인 음악에 공지천에 대한 청춘의 추억이 혼미해져감을 느끼며 발길을 돌렸다. 몇 미터 간격으로 붙어있는 카페들이 서로 협의하면 소음이 아니라 호수위에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을...... 두서없는 춘천 나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