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뉴스 때문에
요새 한 민간TV방송국에서 메인 뉴스 시간에 ‘배려(配慮)’를 큰 틀로 계도성 방송을 하고 있다. 배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관심을 가지고 이리저리 마음을 씀’이라고 되어 있다. 한자의 뜻이 아내配 생각할慮라고 한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자의적이지만, 아내를 생각하듯이 여러 면에서 마음을 쓰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날짜를 보내면서 많은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모두가 공감되는 이야기이고 많은 것들이 평소에 느껴지던 것들이다.
며칠 전 할아비 뉴스 보는데 옆에서 조잘조잘 귀를 간질이던 큰손주 녀석이 갑자기 뉴스에 귀를 기우리더니 배경으로 쓰인 글자를 더듬더듬 읽어 나가다가 갑자기 “할아버지, 배려가 뭐예요?” 하고 묻는다. 느닷없는 질문에 어찌 답해야 할지 몰라 사전을 찾았지만 그건 갑자기 어찌 답해야 할지 당황한 할아비의 우매한 행동이었을 뿐 사전을 읽어준들 이제 우리나이로 6살된 아이가 어찌 이해할까. 그걸 읽어준들 질문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할아비는 더 곤경에 처해질 텐데.
문득 아이가 아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이 녀석이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을 건너며 어린이집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손을 들었는데 그걸 무시하고 지나는 차에 “할아버지 저 사람 나쁘다. 손을 들고 건너는데 서야지” 했던 기억이 났다. 당시에 손들고 건너는데 왜 안서냐는 질문에 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순간을 모면하느라 애썼는데 그 때의 상황을 설명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그 때 네가 할아버지에게 그 사람 나쁘다고 하였지? 네가 손을 들었을 때 차가 섰다면 그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너를 생각해 잘 건너가라고 서주는 거야. 그렇지? 그런 걸 배려라고 해. 남을 생각해 주는 거. 그리고 길거리 지나가면서 네가 쓰레기 길에 버리는 건 나쁜 거라고 했지? 그래, 아무데나 쓰레기 버리지 않는 거, 그것도 배려라고 할 수 있어.”라는 설명으로 1차 관문은 통과하였지만 그리 설명하면서도 마음이 어지러웠다. 아이들이 손을 들고 길을 건넌다고 멈추어 주는 차 그리 많지 않으며 미화원이 지나가지 않은 거리에는 불법 쓰레기며 전단지 및 담배꽁초들이 널브러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늘 컴퓨터와 놀고 있는 방 동창의 간유리 덧문을 열면 자연스럽게 내려다보이는 곳이 신호등 없는 왕복2차선 도로의 사거리다. 난 그 창을 통하여 언젠가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같은 곳에만 주차하는 두 대의 차량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한 대는 파란색 1톤 트럭이고 다른 한 대는 검은색 스타렉스 차량이다. 이 도로에는 개구리주차장 형태로 길거리 주차장이 형성되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차들이 합법주차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시선이 늘 이 두 차에 멈추는 것은 합법이건 불법이건 다른 장소에 주차할 공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늘 사이좋게 건널목 양쪽을 가로막고 주차하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바라보다 몇 달이 지나갔지만 자신들의 영업장이 건널목 앞에 있는지 이들이 다른 곳에 주차한 것은 보지 못하였다. 이제는 저걸 구청에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차시설이 부족하니 합법주차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곳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렇다고 건널목이나 건물입구 혹은 골목진입로 등에 인도를 가로막고 주차한 차들을 보면 건널목 넓이만큼, 인도 넓이만큼 쇠톱으로 잘라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이 녀석이 다른 방에 가서 놀고 있기로 순간을 모면했나 생각하였는데 다시 쪼르르 다가오더니 “근데요, 또 뭐가 배려예요?” 하고 묻는다. 참, 이거 큰 낭패로세 생각하다가 동창의 덧문을 얼었다. 역시 그 두 차는 뉴스시간에도 거기에 있었다. 이 녀석을 책상에 세우고 가로등이 환하게 비추는 사거리 건널목을 가리키며 그곳에 주차한 두 차를 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이에게 물었다. “저기 건널목에 저렇게 차를 세워두면 되겠어? 사람도 건너야 하고 유모차도 건너야 하고 불편한 사람들이 타는 바퀴달린 유모차 같이 생긴 거 있지? 그것도 건너야 하는데.” 아이는 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안 된다는 대답을 하였다. “저런데 저렇게 주차하지 않는 것도 배려라는 것이란다.”라고 답하였다. 그렇게 예를 들어 설명은 하였으되 아이가 그 나이에 배려를 이해하였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최소한 건널목 주차가 나쁜 것임을 알기는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리 어른인 나의 낯은 간지러운 것일까? 글을 쓰다 밖을 봤다. 스타렉스가 그곳에 없었다. 하얀 승용차에게 먼저 자리를 뺏긴 스타렉스는 그러나 그 오른편 코너의 건널목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배려(配慮)! 급속도로 잊혀져 곧 멸종될 단어가 되지 않을까 하는, “배려(背戾) : 배반되고 어그러짐”, 이것만 남으면 어쩌나 하는 복합적인 걱정이, 아이가 그런 질문을 하여야 할 사회가 되었나 하는 생각에 겹쳐진다.
2015년 11월 8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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