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내가 늘 거주하는 방에서 창문을 열면 보이는 가로수들은 모두가 수령이 꽤 된 은행나무들이다. 창에서 보이지 않는 방향에도 물론 은행나무가 들어서 있다. 내가 사는 동네 가로수의 거의 전부가 은행나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암수가 섞여 있어 가을 초입 바람 부는 날이면 보행인들 전부는 길 곳곳에 떨어진 은행을 피해 다니느라 일반적인 보행을 하지 못한다. 은행을 잘못 밟으면, 은행 알이 아무리 맛이 있다고 하여도, 그 과피에서 나오는 냄새는 참을 수가 없다는 걸 모두 알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우리가 몰랐던 ‘두리안’이라는 동남아 지방의 열매나 비슷하다고나 할까. 예전에는 길가에 떨어진 은행을 봉지에 주워 담는 노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은 살아진지 오래다. 아마도 그 냄새 때문에 집에 있는 가족들이 싫어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가로수에서 열매를 따거나 떨어진 것을 주워도 법에 저촉된다는 것을 알린 이유도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관계기관에서 보행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끔 적시에 잘 처리해 주면 좋을 텐데 자동차 타이어나 사람들의 발아래서 뭉그러져 길거리의 시꺼먼 껌딱지가 된 은행으로 하여 거리엔 냄새를 풍기는 피카소의 입체 그림이 그려져 있다.
봄이 되면 이 은행나무들은 좀 불쌍해진다. 봄에 새잎이 돋기 시작하면 사람 태우는 바구니를 장착한 사다리차와 전기톱을 앞세운 한 무리의 사람들이 굉음을 내며 은행나무 가지들과 윗부분을 모두 잘라내기 때문이다. 나무가 잘 자라도록 가지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잘 자라지 못하도록 가지와 나무 위를 모두 짧게 잘라버리는 것이다. 정원수의 가지치기를 하는 것은 나무가 위로 잘 자라게 하는 것이고 위를 자르는 것은 나무가 위로 자라는 것 보다는 옆으로 풍성하게 퍼져 나가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내개는 매해 봄마다 여기저기를 마구 잘라 나무가 아니라 콘크리트기둥처럼 만드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위를 자르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나무 위를 지나는 전선을 보호하기 위함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선과 인접한 나무의 가지나 윗부분은 잘라 내더라도 그 외의 나무들은 가로수에 어울리는 손질만 잘 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모든 나무를 한결같이 큰 기둥만 남겨놓고 다 잘라버린다. 흡사 보통 정상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들을 봄에 해병대머리라고 불리는, 윗머리만 짧게 남겨두고 옆과 뒤를 모두 바리캉으로 밀어버린 스타일로 바꾸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이렇게 잘려나간 나무들은 그래도 봄이 무르익으면 새로운 가지를 만들고 새잎으로 풍성해지며 가을에는 반기는 사람도 없는 열매를 길거리에 떨어뜨리고 노란 물감으로 거리에 가을풍치를 만든다.
가을의 운치를 즐겨보자고 이달 둘째 주에 내가 속한 동네 단체에서 단풍의 명소로 알려진 내장산을 다녀왔다. 10월에 발표된 단풍지도에 의하면 10월 말경 그곳의 단풍이 절정에 이룰 것이라 하였고 지도에 나온 시기보다 10여일을 늦게 가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수 년 전 10월 말경에 이웃들과 그곳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일부 단풍나무 조금을 제외한 다른 나무들은 여름을 벗어나지 못해 아쉬웠던 기억으로 하여 이번에는 제대로 된 가을을 보게 되나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수년 전보다도 못한 산야의 모습에 실망감이 일었다. 단풍대신 만난 인산인해와 차산차해의 모습이 가을의 풍성함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개울을 끼고 차려진 음식점과 토산품점들이 고객의 이목을 끌기 위하여 근거리에 내세운 각기 다른 3팀의 품바가 경쟁하듯 두들겨대는 중복된 북소리와 스피커 볼륨을 최대한 키운 노래 소리는 그곳을 지나 주차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보다는 짜증을 유발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만 주어진 느낌인지도 모르겠지만.
요 며칠 창문을 열어 바라본 거리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나무는 아직 초록의 기운이 남아 있는데 유독 이 나무만이 만추를 보여주고 있었다. 더 멀리 떨어진 나무는 아직 노란 기운이 돌지도 않은 여름의 색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오늘 아침은 예고된 대로 어제와 비교하여 기온이 좀 많이 떨어졌다. 어제는 비도 내리고 바람도 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아침 바라본 그 가을이 익은 나무에는 절반도 안 되는 노란 잎만이 매달려 있었다. 아마 어제의 비와 바람에 자기 가을의 절반 정도를 내어 준것 같았다. 대신 초록색을 벗어나지 못하던 다른 나무들이 하룻밤 만에 가을을 품었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였던 나무들도 여름을 벗어나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은 두꺼운 옷을 입었다. 그러나 어제까지 며칠간은 여름옷을 벗어나지 않은 사람부터 두꺼운 옷가지를 걸친 사람까지 자신의 체력과 나이에 따라 다양한 옷차림이 있었다. 아마 나무도 사람들처럼 나이에 따라 혹은 자신이 느끼는 온도에 따라 가을을 준비하는 모습이 다른 모양이다. 사람에게나 나무에게나 계절을 맞는 세월의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단지 사람들은 기온이 내려가면 두꺼운 옷으로 몸을 풍성하게 만들지만 나무는 가지고 있는 잎의 풍성함을 떨어냄으로서 영양과 체온을 유지하려하는 모습은 사람들과 반대의 모습니다. 나무들은 한 해의 탈피를 위하여 사람들에게 단풍놀이라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내년 봄에는 동네의 은행나무들이 그리 잔인하게 잘려나기지 않기를 바래본다.
2024년 11월 17일
하늘빛
음악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qQlVtY9tWsU 링크
가을편지 (Autumn letter) - Korean Song - Classical Guitar - Arranged & Played by Dong-hwan Noh
'이야기 흐름속으로 > 내가 쓰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성과 지성의 전당 (2) | 2024.12.04 |
---|---|
혼숙(混宿) (5) | 2024.11.24 |
부여-보령 (4 마지막) (10) | 2024.10.16 |
부여-보령(3) (11) | 2024.10.14 |
부여-보령(2) (3) | 2024.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