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이성과 지성의 전당

korman 2024. 12. 4. 19:39

철 모르고 아파트 담장에 피어난 장미곷, 철 지난 후 철이 든 동네 공원 단풍 (2024년 12월 1일 현재)

이성과 지성의 전당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아파트의 내 집은 13층에 있었다. 복도식이 아니고 층마다 마주보는 집이 승강기 한 대를 쓰는 식이었다. 이사를 한지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금 살고 있는 곳도 그렇지만 아파트라는 곳이 일부로 알려고 하지 않는 한 몇 년을 살아도 서로 이웃이 누군지 잘 모르며 승강기에서 마주쳐도 상호 사전 인사가 없었던 사람들은 누가 어느 층에 사는지 별반 관심도 없다. 늘 문을 마주 대하고 있으니 앞집에 사는 사람정도야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기는 하지만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갖더라도 아래 위층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도 15층까지였던 그곳에 오래 살았더니 승강기를 같이 사용하는 라인의 이웃들은 거의 얼굴이 익어 어느 층에 사는지는 잘 모르더라도 만나면 건성으로라도 인사는 하는 사이가 되긴 했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아파트라는 곳이 층간 소음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관련법도 강화되고 소음을 해소시킨다는 바닥용 깔개 같은 것도 많이 발전된 상품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는 소음에 대해 무척 민감한 편이고 아이들의 소리가 아니라도 어쩔 수 없이 위, 아래층에서 나는 생활소음에까지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가끔 그들 사이의 시비가 매스컴의 관심이 되기도 한다. 내가 그런 소음에 대하여 이해심이나 참을성이 부족하였다면 아래 위층 이웃들과 매일 다투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소음에 대한 이해심이나 참을성은 제쳐두더라도 두 이웃과의 학연 관계가 그렇게 할 수 없게 하였다. 두 이웃의 딸과 내 작은 아이가 같은 학교 같은 반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13층, 그들은 12층과 14층에 살았다. 나는 아파트가 완공되고 처음부터 그곳에 살았지만 그들은 수년이 지난 다음에 내 아래 위층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두 집 아이들이 내 집에 놀러오면서부터 그 부모들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래 위층에서 저녁만 되면 큰 소리가 나고 살림살이가 부서지는 소리도 나며 아이들 울음소리도 나고 어른들의 걸음걸이가 내는 쿵쿵거리는 소리도 들리곤 하였다. 급기야는 밤이 깊은 시각에 모녀를 문 밖으로 내쫓은 아비의 횡포 때문에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아이와 어미의 울음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운 경우도 다반사였다. 어느 한 집이 아니라 거의 연이은 두 집의 부부싸움 소음 때문에 나와 내 가족들은 완전 소음의 샌드위치가 되기 일쑤였다. 그 바람에 이웃에 관심이 없던 같은 라인의 다른 이웃들도 모두 알게 되었고 때로는 우리 집을 걱정해주는 이웃들도 생겨났다. 어느 층의 부부싸움이 더 강도가 세었냐고 물어본다면 위층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위층에서는 살림살이가 깨어지는 소리도 심하게 났고 또 새로 들여놓는 집기도 여러 차례 보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신고에 의하여 경찰도 몇 차례 왔었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금요일 밤에 그리 싸우고 토요일 오전에 얼굴에 멍이 든 채로 팔짱을 끼고 외출하는 그 부부를 봤을 때는 다른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년을 지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아래층이 먼저 이사 가더니 1년도 안 되어 위층도 떠났다. 이웃들 보기가 부끄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나 시원하던지.

내가 그곳에서 이사한지 10년 정도가 지났는데 자기 살림을 스스로 부수고 또 그 살림을 다시 장만하며 부부싸움을 했던 그 부부가 어찌 갑자기 생각났을까? 뉴스를 보다 남녀공학에 반대한다고 시위를 하는 여대생들의 모습이 문득 그들을 떠올리게 하였다. TV화면에 보이는 학생들의 시위 모습에는 피켓 같은 각종 개인소지용 시위물품은 물론 현수막 등 행위 후에 손쉽게 철거 혹은 버릴 수 있는 많은 시위용품이 눈에 뜨였고 종이에 써서 학교 건물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각종 구호도 벽이나 기둥 및 창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역사와 전통에서 여대로 이름난 학교가 남녀공학을 하겠다고 하니 학생들이 반대하고 그 반대의 표현으로 시위를 하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여 변화하는 것이 학교 발전을 이룩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학생들에게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것도 명예를 지키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시위에 손쉽게 철거 가능한 시위물품만이 등장하였다면 나도 일면 학생들의 주장에 오른 손을 들어줄 수가 있었는데 여기저기 모든 학교건물과 길바닥에까지 페인트나 스프레이를 이용하여 그려놓은 구호를 보고는 이 사람들이 자기가 다니는 학교를 사랑하고 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기 위하여 시위로 그 표현을 하고 있는 대학생들이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꼭 자신의 살림살이를 부셔가며 부부싸움을 하던 그 이웃 같았기 때문이었다. 또 한편 경복궁 담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였던 그 철부지들도 생각났다. 

살림을 부수며 싸움을 하던 그 부부는 다음날에는 부순 살림을 보충하기 위하여 새로운 물건을 사들였다. 그러기 위하여 그들은 쓰지 않아도 될 돈을 쓰고 있었지만 그건 그들 자신들의 돈이기 때문에 그들이 알아서 하면 된다. 그런데 학생들은 어쩌나? 학교는 학생들이 내는 입학금이나 등록금을 가지고 운영한다. 따라서 여기저기 학교건물에 마구집이로 그려놓은 낙서성 구호를 지우기 위하여 학교에서는 그 운영비의 일부를 지불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돈을 불필요한 곳에 사용하여 예산을 낭비하는 꼴이 되겠고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낸 등록금을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사용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한 꼴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와야 하는 등록금의 혜택을 스스로 차버리는, 자신들의 살림살이를 스스로 부수는 흉한 몰골이 되는 것이다. 

대학교는 성인들이 다니는 학교다. 예전부터 대학은 이성과 지성의 전당이라 불려왔다.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를 그리 만드는 대학생들을 바라보며 과연 그들에게 이성과 지성은 있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내 위층에서 살림을 부수며 부부싸움을 하던 부부가 주말아침에 멍든 얼굴로 팔짱을 끼고 외출하던 것처럼 학교와 학생들이 팔짱을 끼고 학교 건물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문제가 남녀공학을 반대하는 시위보다 우선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24년 12월 3일
하늘빛

 

음악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UfENn-4CyWE 링크

Lo-Fi Jazz Piano: Soothing Winter Melodies to Wrap Your Soul in Warmth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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