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숙(混宿)
요즈음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내가 대학이라는 곳에 입학하였을 때는 전공을 선택하고 입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학년에서는 모든 입학생이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이 교향학부라는 이름으로 고등학교 3학년의 연장선상에 있는 공부를 하였다. 특히 국영수는 고등학교처럼 중요한 과목이었다. 그리고 입학 후 첫 국어시간에 교수님은 학생들의 단어와 한자 실력을 보겠다고 칠판에 한글로 커다랗게 ‘여인숙‘을 쓰시고 이 단어의 한자와 그 뜻을 답안지에 적으라고 요청하였다. 느닷없는 교수님의 첫 질문이 여인숙이라는 것도 어이가 좀 없었기로 학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우리가 써야하는 답에 대한 일종의 신호이기도 하였다.
요즈음이야 거의 모든 숙박업소 이름이 호텔, 모텔, 펜션, 리조트 등으로 그 가치와 용도에 따라 서구화된 이름이 붙여져 있지만 그 당시에는 큰 호텔을 제외하면 여관, 여인숙이라는 이름이 대세였다. 여관(旅館)은 찻길의 인접한 곳에, 여인숙(旅人宿)은 골목길 중간이나 끝에 위치하였었다는 게 지금의 기억이다. 요새는 거의 없어진 이름으로 좀 오래된 동네를 다녀도 이런 이름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몇 해 전 순천에 있는 영화촬영 세트장에서 그 이름을 발견하고는 교양학부 때의 그 교수님이 생각나 여러 사람들과 추억을 이야기 하며 웃은 적이 있다.
신호를 주고받은 우리는 여인숙의 ‘한자는 女人宿, 뜻은 여자들만 자는 곳’이라 적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자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우리는 일부 한자를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을 제외하면 宿자를 쓰지 못해 나를 포함하여 많은 친구들이 숙자는 한글로 적었었다. 답안지를 걷어보신 교수님의 첫 말씀은 길거리 널린 게 여인숙인데 한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무얼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게 말이 되느냐며 혀를 차셨다. 교수님 설명에 한 친구가 더하여 “교수님, 우리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벗어났고 대부분이 아직도 미성년으로 그런 데가 뭐하는 곳인지 가보질 못했는데 어떻게 알겠어요?”라는 대꾸를 하여 교수님과 더불어 웃은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자라는 게 뜻글자이니 女人宿이라 쓰고 여자들만의 숙소로 풀이하여도 안 되는 말은 아닌 듯싶기도 하다.
젊은 사람들이 ‘혼숙’이라는 단어를 ‘혼자 자는 것’으로 해석한다고 요 며칠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신문과 방송에서 젊은 사람들의 언어구사나 이해능력에 대한 지적이 많았다. 순간 여인숙이 생각나며 그 당시 왜 하필 ‘여인숙’이야 하던 의아함이 지금 왜 하필 ‘혼숙’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난 순간 시대흐름으로 봐서 젊은 사람들의 해석이 맞는다고 생각하였다.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을 겪으면서 평소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던 신조어가 많이 생겨났다. ‘혼숙’과 유사한 단어도 생겼다. ‘혼술’, ‘혼밥’ 같은 것들이다. 혼자 마시는 술이 ‘혼술’, 혼자 먹는 밥이 ‘혼밥’으로 탄생하였다. 그러니 ‘혼숙’이라는 것은 ‘혼자 자는 것’이라 해석되어도 현 우리 언어의 흐름으로 볼 때 전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혼숙이 뭐냐는 물음에 내가 여인숙을 답했던 것처럼 답한 젊은이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그 혼숙이라는 단어를 모른다고 걱정을 하는 매스컴이 나는 더 걱정스러웠다.
요즈음 TV 하단에 청소년의 언어순화에 대한 계몽성 자막이 수시로 흐른다. 여성가족부와 방송통신심의윈원회 등 관련기관들이 공동으로 내보내는 자막이다. 지금 모든 TV프로그램은 대상 시청자의 등급이 매겨져 있다. 12, 15. 19 등이다. 그 나이 등급에 알맞은 프로그램이라는 의미이며 등급은 방송국 스스로 정하게 한다고 한다. 요즈음 청소년들은 연예 오락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하며 그런 프로그램에서 유행어를 배워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방송국 스스로 자정하여야 하는데 12세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말을 막하고 그 말을 ‘삐’ 소리로 대신하던가 자막에 X표시를 한다. 프로그램을 즐겨보다 보면 아이들도 X가 무얼 의미하는지 안다. 15세 프로그램엔 술 마시는 장면이 아무렇지도 않게 많이 나온다. 그런데도 자정노력은 보이지 않고 청소년들에게 언어를 순화하라고 한다. TV가 순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며칠 전 채널을 돌리다가 유명 연예인이 진행하는 무슨 요리방송에 잠시 머물렀는데 화면 하단에 느닷없이 ‘잘알못’이라는 자막이 나타났다. 순간 저게 무슨 단어일까 생각하다가 프로그램 진행상 원어에 대한 설명은 없었어도 방송작가가 만들어낸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줄임말이라는 걸 알았다. ‘혼숙’이라는 단어를 모른다고 젊은이들을 몰아붙이는 매스컴 관계자들은 ‘잘알못’은 다 알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젊은 사람들의 언어 이해도와 구사능력을 탓하기 이전에 기성세대들은 요새 통용되는 젊은이들의 말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단어나 언어의 이해도는 기성세대라고 자유롭지는 않다.
멀쩡한 우리말 문화는 컬쳐, 잡지는 매거진, 생활은 라이프, 운동화는 스니커즈, 속옷은 인너웨어 등등 기성세대가 포함된 매스컴 관계자들이 시대의 흐름처럼 바꾸어 놓은 외국어는 ‘혼숙’을 이유로 법석을 떠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해하고 있을까? 다크투어리즘, 실버스테이, 어싱, 고더킹, 굿즈, 퍼포먼스, 니즈...... 우리의 기존 단어로 충분히 표기 가능한 말들까지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한글표기 외국어들로 하여 난 오늘도 인터넷을 찾아야 한다. 방송, 신문, 잡지, 정부의 새로운 사업 명, 전문가들이 아무데나 사용하는 전문용어 등 무분별하게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외국어 관련 용어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니즈나 굿즈를 모른다고 노인들의 언어능력을 탓하겠는가? 그러니 ‘혼숙’이라는 단어를 ‘혼자 자는 것’이라 한다고 젊은 세대의 언어능력을 탓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건 급하게 알 필요도 없지만 더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남녀가 혼숙하는 게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모르면 자연스레 핸드폰이나 컴퓨터 자판을 누르는 사람들이 요새 젊은이들 아닌가. 옷가지를 파는 쇼핑채널에 출연한 사람들이 컬러, 화이트, 레드, 블루, 옐로우, 버건디, 카키, 그린, 네이비 등등을 외칠 때 난 그들의 힘겨움을 느낀다. 혀와 귀에 익은 그 쉬운 빨주노초파남보는 어디에 두고....
이상한 ‘혼숙’이라는 단어를 골라 가지고 그걸 모른다고 젊은 세대를 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여인숙을 경험한 나의 생각이다.
2024년 11월 24일
하늘빛
음악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kO0YQ_KVlps 링크
첼로로 듣는 가을소나타- 16곡 명곡
'이야기 흐름속으로 > 내가 쓰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말의 잡념 (3) | 2024.12.18 |
---|---|
이성과 지성의 전당 (2) | 2024.12.04 |
은행나무 (3) | 2024.11.17 |
부여-보령 (4 마지막) (10) | 2024.10.16 |
부여-보령(3) (11) | 2024.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