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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梵鍾과 上元寺 梵鍾 (논문)

korman 2008. 2. 2. 11:50

新羅 梵鍾과 上元寺 梵鍾

 

Ⅰ. 머리말

 

Ⅱ. 梵鍾의 外形的 特徵

 1. 統一新羅 梵鍾의 樣式的 特徵

  2. 上元寺 梵鍾

 

Ⅲ. 梵鍾의 佛敎的 機能

 

Ⅳ. 맺음말

 

 

 

 

 

▲ 평창 상원사 범종 (국보 제36호)

 

 

Ⅰ. 머리말

 

  梵鍾이란 절에서 시간을 알릴 때나 大衆을 집합시키고 의식을 행할 때 쓰이는 종을 말한다. 지금도 우리는 사찰의 鍾閣이나 殿閣에 범종을 매달아놓고 아침, 저녁으로 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범종의 장엄하고도 청명한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참회토록 하고 불교의 理想과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 범종소리는 부처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며, 이 소리를 통해 지옥에서 고통 받는 衆生들까지 구제할 수 있다1)는 심오한 慈悲의 思想까지 내포하고 있다. 이 점에서 범종은 일찍부터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佛敎儀式 法具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삼국시대 불교전래 이후부터 제작, 사용된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의 작품뿐이다. 그러나 『三國遺事』卷3, ‘原宗興法 厭髑滅身’ 조의 기록 중에는 “天壽六年(565년)에 범종을 사찰에 걸었다”2)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6세기 후반 경부터는 이미 사찰에서 범종이 사용되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우리나라 범종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 설이 분명치 않다. 인도의 간타(Ghanta)라는 악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중국 殷代 이후 널리 제작된 古銅器의 일종인 鍾이나 鐸을 혼합한 형식에서 발전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범종에 보이는 독특한 의장면으로 미루어볼 때 그 기원을 대체로 ‘甬鍾’이라 불리는 중국 古銅器에서 변화·발전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러한 고대의 용종은 중국에 불교가 유입된 이후 佛敎梵音具로 활용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 범종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Ⅱ. 梵鐘의 外形的 特徵

 

1. 統一新羅 梵鐘

 

우리나라의 범종은 중국이나 일본종과 다른 독특한 형태와 意匠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 세부장식이 정교하고 울림소리(共鳴)가 웅장하다. 한국 범종의 기본형태를 살펴보면 그 외형이 마치 독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이 위가 좁고 배 부분이 불룩하다가 다시 鐘口 부분인 아래쪽으로 가면서 점차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 종의 정상부에는 용이 목을 구부리고 입을 벌려 마치 종을 물어 올리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으며 양 다리는 각각 앞뒤로 뻗어 발톱으로 종의 상부인 天板을 누르고 있다. 이 부분을 龍鈕라 부르며 종을 架에 매달기 위한 고리를 정식화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용뉴의 목 뒷부분에는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볼 수 있는 둥근 대롱 형태의 독특한  甬筒이 부착되어 있다. 용통은 종의 共鳴에 어떠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음향조절장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음통 내부가 비어있으며, 종신 내부와 관통하는 작은 구멍이 뚫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통도 시대가 지나면서 구멍이 막히거나, 공명과는 관계없는 小鍾에까지 사용되어 점차 형식적인 면이 강조된 장식물로 변화한다.

 

종의 몸체 상부와 鐘口 쪽의 하부에는 동일한 크기의 문양띠(文樣帶)를 둘렀는데, 이것을 각각 上帶와 下帶라 부르며 이곳에는 당초문, 보상화문, 연화문 등의 문양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상대 바로 아래의 네 방향에는 사다리꼴의 廓을 만들어 이 곽 안으로 9개씩 도합 36개의 鍾乳를 장식하였다.

 

종신의 하대 위에는 종을 치는 자리로서 별도로 마련된 원형의 撞座를 앞뒤면 두 곳에 배치하였는데, 그 위치는 대체로 종신의 1/3 부분쯤에 해당되는 가장 불룩하게 솟아오른 정점부에 해당된다. 이처럼 우리나라 범종은 당좌 부분에까지 종의 소리나 역학을 고려한 의도적인 배치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좌와 당좌 사이에 해당되는 종신 여면에는 飛天像, 供養者像이나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에서 날아 내리는 듯한 奏樂天人像을 조각하였다.

 

2. 上元寺 梵鍾

 

725년에 제작된 오대산 상원사의 범종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종이다. 이 종은 新羅梵鍾의 전형양식을 모두 갖춘 작품으로서, 龍鈕造形은 큰 머리에 甬筒을 짊어지고 크게 벌린 입을 天板에 밀착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乳廓안에 장식된 9개씩의 乳頭는 鈕形으로 돌출되어 연꽃봉우리를 충실히 묘사하고 있다.

 

鍾腹의 전·후면에는 蓮花와 唐草紋으로 장식된 撞座가 배치되었고, 다시 90° 회전한 양쪽에는 2軀의 天人像이 악기를 연주하며 날아오는 듯한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다. 上·下帶, 乳廓帶에는 奏樂天人像이 장식된 半圓圈文과 唐草文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 종의 天板에는 鑄成과 관련된 銘文이 새겨졌는데, 통일신라 문무왕 7년(725년)의 鑄成년대를 확인할 수 있다.

 

              開元十三年乙牙正月

            八日鐘成記文部合鍮

              三千三白餘兩重普衆

              都唯乃□歲道直

            衆僧忠七沖安貞應

              旦越有休六舍宅夫人

              休道里德香舍上安舍

              照南乇匠仕□大舍

 

           < 上元寺 梵鍾 銘文 >

 

上院寺鍾은 가장 오래된 韓國鍾임에도 불구하고 세련된 조각과 주조기술로 탄생된 걸작품이다. 문양장식에 細緻한 조각수법을 이용하였으며, 뛰어난 주조기술로서 그것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종은 주조기술의 많은 경험이 축적된 결과로 탄생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상원사종 이전에 이미 많은 梵鍾의 鑄成이 선행되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Ⅲ. 梵鐘의 佛敎的 機能

범종은 불교의 전래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겠지만 그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 행렬처럼 연이어 섰다. 法幢을 세우고 梵鍾을 달았다.

 

이는 元和年間(806~821)에 一念이 쓴 「髑香墳禮佛結社文」3)에서 신라불교의 융성에 대해서 말한 대목이지만 특히 범종을 달았다는 구절은 주목된다. 진평왕(579~632) 때의 鼻荊郞은 밤에 귀신들과 놀았는데 귀신들은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졌다고 한다.4) 이로써 새벽이면 각 절에서 종을 쳤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효소왕(692~702) 때 모량부 益宣의 잘못에 연루되어 모량리 사람들은 승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승려가 된 경우라도 鍾鼓寺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5) 아마도 범종과 홍고 등을 제대로 갖춘 鍾鼓寺는 그렇지 못한 절에 비해서 寺格이 높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 같다. 오대산의 眞如院에는 가끔 文殊菩薩이 36鍾形으로 그 모습을 變現했는데 그 중에는 金鍾形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6)

 

범종은 때를 알리거나 대중을 모으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金富軾(1075~1151)이 「兜率院鍾銘」에서

  (이 精舍에서) 식사도 하고 講經도 하기를 밤에도 하고 새벽에도 한다. 밤에 자고 새벽에 일어날 시간을 방마다 알리기가 어려워서 큰 종을 달았다.7)

 

고 한 것이 바로 이 경우다. 비형랑과 함께 놀던 귀신들이 절의 새벽종 소리를 듣고 흩어졌다고 한 것은 종소리로 새벽이 온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절에서 새벽이나 저녁에 종을 쳐서 禮佛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는 전통이다. 

 

그러나 범종의 기능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로써 중생을 깨우치는 것이다. 『三國遺事』孫順埋兒설화의 중심은 孝에 있지만, 鍾의 의미도 함께 강조되어 있다. 신라 하대 興德王(809~826) 때의 일이다.

 

  모량리의 손순은 아내와 함께 품팔이로 곡식을 얻어서 노모를 봉양했다. 손순의 어린 아이가 언제나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이에 손순은 아내에게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모시기 어려운데 아이가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가 얼마나 배고프겠소. 그러니 이 아이를 매장해 버리고 어머니를 배부르게 합시다”라고 했다. 이에 아이를 업고 모량리 서북쪽 취산 북쪽으로 가서 땅을 파다가 문득 기이한 石鍾을 얻었다. 부부는 놀라고 기이하게 여겨 숲의 나무 위에 걸어 놓고 두드려 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여 들을만 했다. 아내가 말하기를 “이 이상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 이 아이의 복인 듯 하니 묻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남편도 또한 그렇게 여겨서 아이와 돌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들보에 달아 두었더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식을 듣고 측근의 신하에게 말했다.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데 맑고 멀리 들리니 보통 종이 아니오. 빨리 이를 알아보시오.” 왕의 使者가 그 집에 가서 알아보고 사실을 자세히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말했다. “옛날에 郭巨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솥을 주었더니 이제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고 하자 땅에서 돌종이 솟아 나왔으니 前世의 효자와 後世의 효자를 천지가 똑같이 살피신 것이다.” 이에 집 한 채를 내리고 해마다 벼 50섬을 주었으며, 지극한 효도를 표상했다. 손순은 자기 옛 집을 내놓아 절로 삼고 절 이름을 弘孝寺라 하고 돌종을 달아 두었다.8)

 

이상이 손순매아설화이다. 이 설화에서 종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종의 출현은 손순의 효도에 천지가 감응한 결과로 설명되고 있다. 또한 아이의 죽음을 면하게 해 준 것도 공의 공덕이다. 종소리는 멀리 대궐의 국왕에까지 전달되어 이를 계기로 흥덕왕은 손순의 효성을 알게 되었고, 이에 왕은 손순의 효성을 표상하여 집과 곡식을 하사하게 되었다. 결국 종소리는 손순의 효성을 국왕에게까지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빈곤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손순의 옛집은 弘孝寺가 됨으로써 초라하던 세속적인 공간이 신성하고 의미 있는 종교적인 공간으로 변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돌종의 소리 이미지와 결합한 충족의 기능은 종교적인 구원의 차원으로까지 의미를 확대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Ⅳ. 맺음말

어느 사찰을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梵鍾은 法具四物 중의 하나이다. 범종을 비롯한 弘鼓, 雲板, 木魚 등의 四物은 禮佛時에 사용되는 것이기에 佛典四物이라고도 한다. 이들 사물은 모두 소리로서 佛音을 전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범종은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홍고는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운판은 허공을 나는 짐승을 향하여, 목어는 물 속의 어류를 향하여 소리를 내보내어 각각 이들을 구제한다고 한다. 물론 이들은 다같이 불교의 의식에 사용되고 있어서 음악을 통한 교화 이외에도 의식을 장엄하는 구실도 하고 있다. 이들 四物 중에서도 보편화한 것은 범종이다. 범종이란 사찰에서 쓰는 종, 즉 청정한 불사에서 쓰는 종이라는 뜻이다. 범종은 불교의 의식에 사용됨은 물론이고 절에서 때를 알리고 대중을 모으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범종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소리로서 중생을 깨우치는 것이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강진옥, 1985,「三國遺事 孝善篇 硏究」,『國語國文學』93.

金相鉉, 1999,「梵鍾의 佛敎的 機能과 意味」,『丹豪文化硏究』4.

곽동해, 2000,『韓·中·日 鍾의 造形樣式硏究』, 東國大學校大學院 美術史學科 博士學位論文.

이호관, 1985,「신라 범종」,『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6.

정명호, 1984,「통일신라시대의 공예미술연구 : 신라범종의 주조술에 대한 연구」,『미술사학연구』162.

文年順, 1979,「新羅梵鐘身에 鑄刻된 飛天紋의 硏究」,『東國思想』12.

鄭美永, 2006,「統一新羅時代 飛天像 硏究 :梵鐘을 中心으로」, 東國大學校大學院 美術史學科 碩士學位論文.

최응천, 1997,「통일신라 범종의 특성과 변천 - 秦樂天人像 변화를 중심으로」,『경주사학』16.

홍윤식, 1984,「조선초기 상원사 문수동자상에 대하여」,『미술사학연구』164.

 

원문 : http://blog.daum.net/uper007/12050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