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한국의 종

korman 2008. 2. 2. 12:08

 

 

▲ 평창 상원사 범종 (국보 제36호)

 

 

영남불교문화연구원의 범종에 대한 기술

 

 

 

범종

 

                                         

 

 종의 목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목적과 용도는 같다. 시각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으거나  의식을 진행시킬 때 도구로 이용하거나 음악을 연주할 때 악기로 사용한다. 한국 종은 서양종과는 물론 같은 동양인 중국종(華鍾)과 일본종(和鍾)과도 차별되는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신라 종은 형태나 조각의 아름다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소리가 장중하고 청명하여 종중에 으뜸으로 친다. 이런 이유로 한국 종은 ‘코리언 벨’이라는 별도의 학명을 갖게 된 것이다.  종소리는 그 소리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곧잘 부처님의 法音으로 인식되어 왔다. 종소리를 들으면 지옥고를 받고 있는 지옥 중생들까지도 구제된다는 사상에 의하여 사찰에서는 일찍부터 중요한 法具의 하나로 사용하여 왔다. 이런 연유로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유입되면서 곧바로, 불상이나 탑처럼 종이 제작되었으리라고 여겨지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8세기 이후의 통일신라시대의 것들이다. ?��三國遺事?�� 권3, 原宗興法 厭髑滅身조에 천수 6년(565)에 범종을 사찰에 달았다1) 기록으로서도 일찍부터 범종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부여의 軍守里 사지와 金剛寺址 발굴조사에서 종루의 흔적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삼국시대인 6세기 경부터는 범종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의 기원

 

 

 

 종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대체로 중국 은대 이후 널리 제작된 古銅器 중에 禮器의 악기인 鎛, 鉦, 鍾 중에서 종을 모방하였다는 설과 鐸이 발전하여 되었다는 설과 인도의 고대 악기인 建椎(Ghanta)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대체로 종과 탁의 혼합된 형태가 발전하여 동양 종을 형성하였다고 보는 견해를 많이 따르고 있다.

 

 범종의 시원이 되는 악기로서의 ‘종’은 甬鍾을 말하는데, 이것은 은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周대에 성행하다가 전국시대 이후에는 다른 악기들과 함께 자취를 감춘 것 중에 하나다.

 

 현재까지 알려진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일본 奈良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陳 宣帝 太建七年(575)銘 범종이다. 종의 높이가 39.1cm, 종구의 지름이 21cm 밖에 안 되는 작은 종이지만 초기 범종의 형태나 발전 양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신라 범종양식의 특징

 

 

 

 우리나라 범종은 중국종이나 일본종과 구별되는 독특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세부적인 장식이 정교하고 울림소리가 웅장하여 동양 3국 종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친다.

 

 외형에서는 마치 김칫독을 엎어놓은 것처럼 위아래가 좁고 중간이 볼록하다. 종의 정상에는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가 용처럼 생긴 浦牢로 표현되어 있다. 목을 구부려 종을 물어 올리는 듯한 자세에, 발은 앞뒤로 뻗어 천판을 움켜잡고 있다. 이것을 보통 龍鈕라고 하나 실은 포뢰다. ?��삼국유사?�� 권3, 탑상 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조에 “종에 포뢰가 달렸고 종을 치는 撞木을 고래모양으로 만들었다"2) 라고 되어 있으니 앞으로는 龍鈕라는 말보다는 신라시대에 불렀던 것처럼 포뢰라고 해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포뢰는 용의 모습을 한 상상의 동물로 바다에 산다. 고래를 무서워하여 고래가 나타나면 뭍으로 올라와 우는데 그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좋은 소리를 내게 하려고 포뢰에다 고래를 등장시키는 등 무엇 하나 소홀히 다루지 않는 조상들의 슬기와 정성이 드러나는 기록이다.

 

 포뢰의 목 뒷부분에는 우리나라 범종에만 있는 독특한 양식인 音筒(音管) 또는 甬筒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이 음통은 안이 비어 있고 종과는 구멍으로 연결되어 있어 음향조절을 위한 장치라고도 하고 萬波息笛을 상징하고 있다고도 한다.

 

 종신 위와 아래에는 상대와 하대라는 띠를 둘렀는데 당초문, 보상화문 등의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상대 바로 밑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廓을 4개 만들고 그 안에 蓮蕾를 9개씩 도합 36개를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일본종의 꼭지와는 다르게 차음부터 피기직전의 연봉오리를 형상화한 것이므로 종유라 하지 말고 연뢰나 연봉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고, 이것을 싸고 있는 곽도 乳廓이 아닌 연곽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종의 둘레가 가장 긴 부분인 1/3 쯤에 종을 치는 撞座를 두 곳에 배치하였다. 이 당좌는 가운데 연밥이 장식된 자방을 만들고 그 가에 꽃잎을 새기고 바깥으로 연주문을 돌렸다. 당좌와 당좌 사이에는 奏樂飛天像이나 供養天人像을 부조하였다.

 

 이와 같은 양식적 특징을 가진 통일신라시대 종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보이게 되는데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 종신의 비천상이다. 비천상을 기준으로 전기(8세기초 ~ 9세기초)와 후기(9세기 전반이후)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종의 주악비천상은 2구 1조가 종신 앞뒤에 2조 4구가 배치된다. 구름 위에 앉은 주악상은 양 무릎을 꿇고 다리를 뒤로 젖힌 측면 자세이고 얼굴은 정면이다. 공후, 생황, 횡적, 장구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이나 성덕대왕 신종은 공양비천상으로 되어 있다.

 

 후기 종의 특징은 독립된 단독상이 횡적과 요고, 비파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으로 바뀐다. 종의 크기도 작아지지만 주악상의 모습도 줄어들면서 생기를 잃고 맥이 빠진 듯 느슨한 모습이다. 당시의 사회상이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었음을 증명해주는 자료라 하겠다. 

 

 신라종은 현재 우리나라에 5, 일본에 6 있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신라의 종

 

 

 

       1. 上院寺 銅鍾(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 상원사)

 

 

 

 높이 167cm, 종구지름 91cm로 현존하는 신라 종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종이고 또 가장 아름답다. 천판에 “開元十三年乙丑三月八日 鍾成記之 都合鍮三千三百鋌□□普衆 都唯乃孝□ 直歲都直 衆僧忠七沖安貞應 旦越有休大舍宅夫人 休道里德香舍上安舍 照南宅 匠仕□大舍”라는 명문이 있어 725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판에는 포뢰와 음통이 있고 종신에는 상대와 하대, 연뢰와 연곽, 비천과 당좌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한국범종의 특징을 가장 완벽하게 구비한 최고최미(最古最美)의 범종이라는데는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포뢰는 큰 머리를 숙여 크게 벌린 입으로 종을 물어 올리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 부리부리한 두 눈은 삿된 것은 끝까지 응징하겠다는 결의에 차있고. 날카로운 발톱의 두 발은 천판을 옹골차게 움켜잡고 있는 역강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굵은 음통은 앙련과 복련이 반복적으로 부조되어 화려하다. 상하대와 연곽은 모두 연주문으로 두르고 안은 유려한 당초문으로 채웠다. 4 개의 연곽 속에 들어 있는 9개씩의 연뢰는 연꽃으로 된 花座 위에 꽃무늬를 장식하여 돋보이게 돌출시켜 놓았다. 종신에서 가장 볼록한 부위에 앞뒤 대칭되게 주악비천상을 새겼다. 하늘에서 금방 내려오는 듯 표대를 바람에 휘날리면서 空侯와 笙篁을 연주하고 있다. 볼륨 있는 늘씬한 몸매, 토실토실한 얼굴의 생동감 넘치는 표현은 통일신라 전성기의 시대양식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것이다.

 

 비천과 비천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있다. 이 당좌는 중앙의 자방을 중심으로 8엽의 연꽃잎을 두르고 바깥 윈 안팎에는 섬세한 연주문을 돌리고 그 안에 당초문을 장식하였다.

 

 이 종은 안동부의 정문인 관풍루에 걸려 있었던 것인데 成化5년(1469) 기축, 즉 예종 원년에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지정하면서 옮겨왔다는 내용이 영가지에 실려 있다.3)

 

 

 

         2. 聖德大王 神鍾(국립경주박물관)

 

 

 

  높이 333cm, 종구 지름 227cm로 현재 국내에 있는 신라 종으로서는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양식적인 면에서 뛰어난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보통 봉덕사 종이라고도 하고 주조에 실패를 거듭하자 어린이를 넣어 완성했다 하여 에밀레종이라고 통칭되고 있다.4)

 

 종신에는 양각된 명문이 1000여 자 있는데 내용은 경덕왕이 선왕인 성덕왕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제작을 시작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 다음 임금인 혜공왕 7년(771)에 완성된 것으로 동 12만근이 소요되었다는 것과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이 원음이 되어 지옥중생들도 다 제도되기를 염원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종신의 상하대에는 주악상과 반원권문 대신에 당초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하대에는 종구가 8능형을 이룬 특수한 형태로 되어 있다. 능형부분에는 당좌와 비슷한 보상화문을 배치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연뢰가 돌출되지 아니하고 8엽의 연꽃으로만 납작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종신의 상도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비천상 대신에 천의 자락을 휘날리면서 향로를  받쳐 든 공양 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성덕대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모습으로 생각된다.

 

        

 

        3. 선림원지 동종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높이 122cm, 종구 68cm의 파종이다. 이 종은 1948년 오대산 북쪽사면의 선림원지인 강원도 명주군 신서면 미천리에서 출토되어 월정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1950년 월정사가 불 탈 때 녹아 내려 파편만 남아 있는 비운의 종이다. 

 

 전체적으로 상원사 종과 성덕대왕신종과 유사한 양식과 수법을 갖추고는 있으나 웅건하고 단아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각 부의 양식도 신라 종의 특징을 다 갖추고 있지만 세련미가 떨어지고 있다.

 

 종신의 상은 당좌와 교대로 나타나고 있는데 주악비천상으로 되어 있다. 나는 구름 위에 결가부좌하여 橫笛과 장구를 연주하는 상으로 천의는 위로 휘날리고 있다.

 

 명문이 있어 정원 20년(804) 3월 23일에 완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4. 청주박물관 소장 범종

 

 

 

 높이 78cm, 종구 47cm의 종으로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0년 무심천 상류인 운천동에서 금동보살상과 발우, 금고 등과 함께 발굴 되었다.

 

 종신에는 2 구의 비천상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에 한 구는 주악비천상으로 비파를 연주하고 있고 나머지 한 구는 승천하는 합장공양상이다. 명문이 없어 고려시대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으나 주악비천상이 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점과 포뢰가 천판을 물어 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리라 여겨진다.

 

 

 

        5. 실상사 파종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파종이다. 1967년 전북 남원시 산내면의 실상사에서 발굴되었다. 발굴 때부터 종신의 윗부분이 상실되어 전체의 형태와 상대, 포뢰, 연뢰, 연곽 등의 양식을 알 수 없는 종이다.

 

 종신의 상은 주악비천상으로 횡적과 생황을 구름위의 연화좌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연주하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종구의 모양이 8능형으로 성덕대왕신종의 것과 비슷하다.

 

 명문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형태와 양식으로 보아 선림원지 동종과 흡사한 점이 많아 같은 시대인 9세기 경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고려종

 

 

 

 고려시대는 국가의 막강한 지원아래 불교가 크게 융성하고 도선 3800비보라 일컬어 지듯이 곳곳에 많은 사찰이 건립된다. 따라서 많은 수의 종들이 주조되었다. 고려시대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해오면서 점차적으로 고려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다양한 형태로 변모된다. 종신의 외형이 곧은 선으로 변하면서 밑으로 내려올수록 벌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후기에 오면서 천판과 상대가 맞닿는 경계선에 꽃잎을 세운 立狀花文帶가 돌출한 양상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상대 위에 낮은 돌기의 흔적만 보이다가 점차 높아지면서 꽃잎의 형태를 갖추어 상대와는 독립된 문양을 이루게 되어 종의 편년에 기준이 되고 있다.      

 

 푀뢰는 목이 가늘어지면서 길어지고 점차적으로 영어의 S자 모양으로 굴곡을 이루면서 복잡해지고 있다.  포뢰의 머리는 천판에서 떨어져 앞을 바라보고 입안에 있던 여의주를 발로 움켜쥐는 형상으로 나타나고 목덜미에 타오르는 불꽃같은 장식이 첨가된다.

 

 종신의 상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신라시대의 비천이 불보살상으로 바뀌어 나간다. 상하대에는 당초나 보상화문 외에 뇌문, 국화문과 기하학적인 도형이 장식된다. 당좌도 2개에서 4개로 늘어나 기능적인 면보다 장식적인 면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종들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점 소형화되고 있다. 이는 지방 군현의 소규모 집단에서도 주종이 성행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양식을 보이다가 14세기 개성 연복사에서 중국형 종이 만들어지면서 고려 종 양식은 단절되고 만다.

 

고려 종은 무신란 이전의 종이 11점, 이 후의 종이 63점이 국내에 있고 23 점이 일본에 있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조선 종

 

 

 

 ��형 종이 고려 말에 등장하면서 고려종 양식의 맥은 끊어지고 새로운 형식의 조선종 양식이 등장한다. 형식적으로나마 있어 왔던 음통이 없어지고 천판에 구멍만 하나 뚫린다.

 

 한 마리의 포뢰가 두 마리가 붙은 쌍포뢰로 바뀐다. 상대와 천판 사이이 입상화문대는 없어지고, 연곽은 상대에서 떨어져 점점 밑으로 내려온다. 당좌가 없어지고, 있다 해도 위치와 수량이 일정치 않고 종을 치는 장소적 기능보다는 장식적인 면으로 바뀌었다.

 

 하대가 위쪽으로 올라가 마치 중국 종의 횡대처럼 두세 줄의 양각선이 도드라져 있다. 종신의 상은 보살입상이 나타나고 범자. 용, 팔괘, 파도문양 등 번잡한 장식으로 가득 차 있다.

 

 양각의 명문이 발원문과 시주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아주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현존하는 180여 개의 조선종 중 명문이 있는 것이 94 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