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의 봄 내음
오랜만에 파란 털실로 짜진 베레모를 머리에 얹었다. 1970년에 등산을 열심히 다니는 나에게 손재주 좋았던 작은 누님이 손으로 짜준 것이다. 머리에 얹고 다니는 것이므로 지금까지 원래의 모습으로 배낭 속에 넣어져 있다. 지금은 등산을 다니지 않으니 많이 쓰는 편은 아니지만 늦은 봄에서 초가을까지 더위를 느끼는 시기를 제외하곤 배낭을 메고 외지로 여행이라도 가는 길에는 아직 즐겨 쓰는 편이다. 나와 반백년을 같이 한 모자이니 많은 애착이 가고 요즈음은 속알머리가 없으니 더욱 더 필요한 개인 소품 중에 하나가 되었다.
얼마만의 강추위라고 방송에서 강조를 하였다. 체감온도는 영하 20도 아래라고 하였다. 왜 하필 내가 떠나려는데 이런 추위가 몰려왔을까 구시렁거리며 그래도 예약이 되었으니 배낭을 꾸렸다. 그리고 그 파란 베레모도 맨살머리 위에 꾹 눌러썼다. 추위를 많이 타는 집사람은 겹겹이 껴입더니만 가지고 있는 코트 중에서 가장 두꺼운 것을 골라 걸쳤다. 물론 모자에 목도리까지 더하여 내가 잡아주지 않으면 신발을 신다가 넘어질 정도로 중무장을 하였다. 그리고는 줄곧 잔소리를 해대었다. 이 추운데 바다를 보러가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더 있겠느냐, 가도 봄에 가지 왜 하필 이 추운 겨울에 가자고 성화냐, 예약한 거 지금 취소하면 얼마 손해 보느냐 등등. 그러면서도 싫지만은 않은 듯 따라 나섰다.
20대 청춘도 아니면서 문득 겨울 바다가 보고 싶어, 얼마 전에 내렸던 눈이 모래위에 아직 깔려 있으면 더 없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집사람에게는 사전에 의견도 묻자 않고 정동진행 KTX를 예약하였다. 물론 평일이라 경로 우대도 받았다. 그런데 내내 견딜만하게 좋던 날씨가 예약을 하자 떠나야 하는 그 주초부터 강추위가 몰려온다는 예보가 있더니 월요일부터 극심한 한파가 몰려왔다. 내가 가야하는 강원도에 대한 예보는 차마 가고 싶지 않을 만큼 몸을 움츠리게 하였다. 아직 그 강원도 추위에 노출되지도 않았는데 방송이 몸을 먼저 반응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기대감은 있었다. 내가 예약한 날이 목요일이고 그 때쯤 되면 좀 누그러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그러나 일기예보에선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배낭을 메고 나선 집밖의 기온은 이른 아침인데도 예보와는 딴판이었다. 물론 우리 동네였지만.
정동진역에서 집사람은 의아함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단 말야?” “이런 겨울에 바다를 보겠다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거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생각지도 않은 많은 사람에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젊은 청춘들도 있었지만 우리처럼 경로우대표를 받았음직한 사람들도 많았고 어느 단체인지 인식표를 붙인 사람들이며 심지어는 외국의 단체여행객들까지 역사 밖으로 펼쳐지는 바다와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에서 내뿜는 포말에 감탄하며 모두 바다로 향한 스마트폰의 방향을 바꿀 줄 몰랐다. 그리고 날씨는 외투의 지퍼를 열어도 될 만큼의 햇볕으로 기온을 영상으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흡사 인간이 만든 일기예보를 비웃기나 하는 듯이. 목도리를 끌러 배낭 속에 집어넣으며 집사람은 “강원도 날씨가 왜 이래? 우리 동네보다 훨씬 따뜻하네.” 노부부의 겨울 바닷가 데이트를 날씨는 그렇게 도와주고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높이 솟았다 바위에 뿌려지는 겨울 포말이 참 아름다웠다. 들물에 모두 씻겨 바다로 흘러갔는지 기대하였던 모래위 눈밭은 없었다.
정동진역 앞의 허름한 집 대게칼국수가 무한정 맛있다고 댓글이 많이 달린 집에서 기대에 부풀어 칼국수를 주문하였다. 한 술 뜨는 순간 내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맛없다고 했다가 주인으로부터 충고를 들었다는 이야기. “맛이 없다고 하면 안 되죠. 내 입맛에는 안 맞는다고 해야죠.” 나도 그런 충고를 들을까봐 그저 잘 먹었다고 건성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서둘러 나왔다. ‘인터넷에 속았구나~~또 속았구나~~’를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속은 건 그 뿐이 아니었다. 숙소 예약 사이트를 통하여 예약을 한 숙소가 막상 가서 보니 예약 사이트에 지불한 금액보다 현지 금액이 5,000원씩이나 낮았다. 사이트에서 예약을 하면 현지보다 쌀 것이라는 인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숙소예약사이트를 이용하기 전에 숙소에 직접 연락을 해 금액을 확인 후 예약하는 게 현명한 것임을 느끼게 해 주는 순간이었다.
아침에 정동진역에서 강릉행 기차를 탔다. 15분 만에 도착한 강릉역에는 청소년 동계 올림픽 때문인지 외국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역 앞에서는 버스킹도 진행되었다. 버스를 기다려 안목해변 커피거리로 향했다. 기온은 이상하리만치 영상으로 올라 있었고 해변에서 마침내 집사람도 두꺼운 외투를 벗어 들었다. 내가 쓰고 있는 베레모조차도 벗어야 할 정도로 해변을 산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고 한여름이 무색하게 많은 사람들이 모래를 밟고 있었다. 날씨가 춥지 않은 탓인지 해변에서 바라본 카페마다 만들어 놓은 2층 통유리벽 안에는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커피거리라니 커피 한잔에 통유리 밖 해변을 느끼러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이토록 한가하게 한참동안이나 커피와 바다를 음미하며 시간을 보낸 적이 언제였나 스스로의 물음에 대답은 없었다.
강릉 중앙시장 통로를 살피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줄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칼국수를 기다리는 줄이었다. 여기가 칼국수 맛집인가보다 생각하는 순간 그 가격이 우리 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한 그릇에 일금삼천원정. 기다리는 지루함을 없애려 시장 다른 곳을 먼저 둘러보기로 하고 여기저기 기웃기웃 하다 보니 한 골목 전체가 닭강정과 호떡집으로 채워져 있는 골목도 있었다. 그리고 그 골목 역시 코너마다 긴 줄로 이어지고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닭강정 상자와 호떡이 담긴 종이컵을 이사람 저 사람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다시 칼국수집으로 갔다. 기다리는 줄이 많이 줄어들었기로 나도 잠시 기다리기로 하였다.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엿듣자니 대부분 가격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새 어떻게 삼천 원에 칼국수를 제공할 수가 있겠냐는 게 화제였다. 또 모두가 그 맛을 궁금해 하였다. 20여분 기다려 칼국수 두 그릇과 겉절이 김치 한 접시를 받았다. 첫 째로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일반 시중 칼국수와 비교하여 곱빼기는 되어 보이는 그 양이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그 맛. 인터넷 댓글이 무색하게 대게칼국수는 옆에도 못 올 맛이었다. 어떻게 삼천 원에 그 양에 그 맛을 낼 수가 있는지 참 궁금하였다. 계산을 하며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인터넷을 불태운, 어제 점심에 먹은 대게칼국수가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맛입니다.” 내 입맛에는 정말 그랬다.
강릉역에 돌아오니 예정된 출발시간보다 1시간30분이 남았다. 매표창구에 가서 표를 보여주고 먼저 떠나는 차에 태워줄 수 있냐고 물었다. 자판을 두들기던 역무원이 쭉 하고 표 두 장을 프린트하여 내주었다. 신기하게 강릉을 떠난 그 KTX는 중간에 한 번만 기착하고 청량리역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그 덕에 비록 라면이었지만 집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겨울바다에서 봄 내음을 느끼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자꾸 배낭을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집사람 하는 말 “그러다 버릇돼요.” 자동차 운전 보다는 배낭을 메는 게 훨씬 여유 있는 여행임을 다시 느꼈다.
1/25 집(버스)-동인천(전철)-서울역(KTX)-정동진(도보, 점심)-숙소(저녁, 숙박)
1/26 숙소(아침, 도보)-정동진역(누리호 기차)-강릉역(버스)-안목해변커피거리(커피, 버스)-
중앙시장(점심, 버스)-강릉역(KTX)-청량리(전철)-동인천(버스)-집
2024년 2월 5일
하늘빛
음악 : 유투브 https://www.youtube.com/watch?v=O6F--Q_b8cA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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