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한국의 범종

korman 2006. 10. 24. 18:00

韓國의 梵鍾

 

종은 금속으로 주조한 타악기로 악종 경종 범종 등 그 범위가 넓지만, 우리나라 민족문화의 소산물로서 종이라 일컬을 때에는 범종을 말한다. 범종은 일반적으로 동종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중국과 같은 나라는 철제종이 많지만 우리나라는 모두 청동으로 주조하였기 때문이다.

범종은 법고, 목어, 운판과 함께 법구 사물 중의 하나로 중생을 제도하는 불구이나, 불구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금속공예 전반에서도 그 규모와 각부의 조각으로 보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동종이란 사찰에서 사용하는 동제의 범종으로, 대중을 모으기 위하여 또는 때를 알리기 위하여 울리는 종이다. 이 범종은 다른 불구와 달리 그 규격이 크기 때문에 흔히 종루나 종각을 짓고 달아두며, 중형이나 소형의 동종이면 현가를 설치하여 매달기도 하므로 목조가구와도 연관이 된다.

II. 종의 기원

범종의 기원은 지금까지 일반적 통설로서 두가지 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중국의 은나라 이후에 악기의 일종으로 사용되어왔던 고동기의 종을 본떠 오늘날 불교사원에서 볼 수 있는 범종의 조형이 비롯되었다는 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고대 중국의 종이나 탁을 혼합한 형식이 점점 발전되어 범종을 이루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 두가지 설에서 공통되는 점은 모두가 악기인 고동기의 일종인 종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발전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종이라는 것은 용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용종은 중국의 주대에 만들어져 성행하였는데, 주나라 말기인 전국시대 이후부터 다른 예기와 같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된 악기의 일종이다. 이와같은 용종을 모방하여 오늘날 한국종의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또한, 이러한 용종의 특징을 갖추고 있는 것이 8세기경에 들어와서 한국종의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상의 여러가지 점으로 미루어보아 용종과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 한국종인데, 중국이나 일본 종에 비하여 가장 고식의 양식과 특수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범종의 기원과 구조의 특징적인 연원에 대하여는 어러가지 설이 있으므로, 앞으로 좀더 연구할 문제라 하겠다.

한국범종의 특수한 구조를 살펴보면 종의 정상에 있는 용뉴 옆에 용통이 첨가 되었고, 유곽의 높이는 종신높이의 약 4분의1로 줄어들어 종견 밑의 네 곳에 배치되었으며, 유곽 안에 조식된 유두의 수는 1개의 유곽에 9개씩 배치되어 전부 36개이다. 그리고 종신에는 넓은 간지를 남겨 그곳에 주악비천상 또는 공양비천상과 당좌가 대칭으로 배치되었으며,간혹 명문이 조각된 예를 볼 수가 있다.

이러한 한국범종의 대표가 되고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상원사동종과 성덕대왕신종을 들 수 있다. 상원사 동종은 종의 모양이 포탄의 머리부분을 잘라낸 것과 같이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원추형이며, 또한 흔히 우리나라 가정에서 사용하는 장독을 엎어놓은 것 같은 형태이기도 하다.

종신의 밑부분 약 3분의2쯤 되는곳이 가장 넓고 그 밑은 조금 좁아져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는 외형을 갖추고 있다. 이들 신라종의 종신 상단에는 상대가 있고, 하단에는 하대라고 불리는 문양대가 돌려져 있는데 상대에 붙은 유곽내에는 9개의 유두가 조식되어 있다. 그리고 종복에는 2개의 당좌와 2군의 비천상이 서로 대칭되게 배치되어 있다.

종신의 상부에는 천정판을 두발로 딛고 용두를 숙여서 종 전체를 물어올리는 듯한 용두를 만등어 놓았으며, 구부린 용체에 철색을 끼워서 종뉴에 매달아 놓았다. 또한, 용뉴 옆에서 용종의 용에 해당하는 부분에 용통을 배치하였는데, 용종에 있어서의 용은 내부를 뚫지 않아 손잡이 밖에 되지 않았으나, 신라종의 용통은 내부를 뚫어 종신의 내면과 천판을 통하여 서로 맞뚫리게 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의 종에는 천판에 용통이 없고 용뉴도 한마리의 용이 아니라 쌍룡을 구부려서 배치하고 있으며, 종신에는 비천상을 배치하지 않고 종신 전부를 상하로 가득히 문양대를 조식하여 압박감을 주는 것이 한국종과 구별되는 다른 점이다.한국종의 각부 명칭을 살펴보면 종의 맨윗부분부터 용통 용두 천판 상대 유곽 유두 비천 당좌 하대로 구분된다.

이상은 통일신라시대 범종의 실례를 들어서 설명한 것이지만 고신라와 고구려, 백제는 뚜렷한 자료가 없어 한국종의 삼국시대부터 발전하여온 과정은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1974년 8월에 실시된 익산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금동제풍탁은 귀중한 자료로 주목된다. 이 풍탁은 신라종에서 볼 수 있는 원형이 아니고 용종과 같이 평면이 타원형인데, 상대나 하대, 유곽 부분에는 아무 조식이 없는 소문대이며, 유곽내에는 소문인 5개의 유두가 돌기되어있다.

또한, 이 금동탁에도 신라종과 같이 당좌가 배치되었는데, 그 문양은 8판의 연판으로 전형적인 백제의 연판당좌인 것이 주목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백제시대의 범종 역시 신라의 범종과 비슷한 형태를 이루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유물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고구려와 백제의 범종이 어떠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는지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III. 시대적 변천과 특징

1. 신라시대의 범종

한국범종의 전형적인 양식과 형태는 통일신라시대에 주조된 상원사동종과 성덕대왕신종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서 조선시대에까지 이르는 범종의형태나 양식변천을 고찰함에는 이들에 기준을 두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하면,한국범종의 전형으로 대표가 되고 기본적인 양식을 갖춘 범종은 역시 신라시대의 범종이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범종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10구를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에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범종은 상원사동종(725, 강원도 평창군 상원사), 성덕대왕신종(771,국립경주박물관), 청주 운천동 출토 동종(9세기후반,국립공주박물관), 선림원동종(804,1951년 소실), 실상사동종(9세기중반, 동국대학교박물관) 등 5구로 이들 중 선림원동종과 실상사동종은 파손되어 완형이 아니므로 완전한 형태를 갖춘 것은 3구에 불과한 실정이다.

한편,일본에 건너간 신라시대의 범종은 6구가 알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4구만이 일본국내에 남아 있다. 그러므로 현재 남아있는 완형의 신라범종은 국내외를 합하여 모두 7구인데, 이들 신라범종의 형태와 각부의 양식 수법을 종합하여 좀더 세밀히 고찰하고 각 부분별로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특색을 들수 있다.

(1) 상대(견대라고도 함) : 신라시대 범종들의 주된 문양처리는 통계적으로 보아 반원권 문양을 사용한 것이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반원권의 문양들은 세부적인 차이점은 있으나 거의가 반원권이 중심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성덕대왕신종과 실상사파종만이 특수하게 보상당초문이 주문양을 이루었는데 이것은 다른 신라시대 종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점으로 주복된다.

(2) 유곽 : 상대의 문양과 같은 반원권 문양대를 사용하였으며, 이밖에 보상당초문, 천인상, 천부상, 기타 화문 등으로 조각하고 있다.

(3) 하대 : 성덕대왕신종 등 2, 3구의 종에서는 보상당초문과 파상문을 사용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이 상대나 유곽의 문양과 같은 반원권문양을 주된 문양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이 주문양대의 내부에 주악상·보살상·연화문· 당초문·운문 등을 조식하는 세부적인 문양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4) 비천상 : 신라종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비천상은 구름 위에서 무릎을 끓거나 세우고 앉거나, 또는 결가부좌한 상태로 천의를 날리며 악기를 들고 주악하거나 또는 합장하면서 공양하는 상 등으로 일관되고 있다.

(5) 용뉴와 용통 : 이 조각은 한국범종의 용뉴 부분을 형성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특히 용통의 기원은 큰 연구과제이다.

(6) 당좌 : 일반적으로 2개의 원형당좌를 종신에 배치하였는데, 이 당좌의 형태는 중심부에 자방을 갖춘 연화와 인동연화가 있고, 그 주위를 세각한 연주문대나 당초문으로 조식하였다. 당좌의 외곽부는 굵은 연주문대로 선각하여 더욱 화려한 느낌을 준다.

2. 고려시대의 범종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불교는 신라시대와 같이 호국불교로서 왕실은 물론, 일반국민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었으니, 범종을 주성하는 일도 성행하였다. 고려 왕조가 지속되는 동안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였던 고려시대 초기의 범종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양식적으로나 각부의 수법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고려는 13세기초 몽고에 병란을 당할 때까지를 전기라 하고 그 이후인 13세기 이후를 후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구분인데, 범종에 있어서도 전기와 후기에 따라 양식과 수법이 달라지고 있다.

전기는 북방 요의 연호를 사용하던 때로 신라종의 전통을 이어오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려의 미술은 조각적인 것에서 공예적인 방향으로 흘러 공예미술에서 특색을 나타내었다. 통일신라는 물론 대륙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고려청자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고려시대 문화가 최성기를 이루었던 때이기도 하였다.

한편, 후기에 들어와서는 다른 나라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간지'로써 기명을 나타내었는데, 고려예술의 각 부분이 치졸화되고 평민화되어가는 쇠퇴기에 들어서는 시기로 범종또한 신라종과는 달리 왜소하여진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고려의 동종은 전기에는 신라시대의 형태를 본받아서 대체적으로 상대 위에 입상화문이 없으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상대에 입상화문이 나타나고 종의 규모도 왜소하여지기 시작한다.

고려시대의 범종은 신라의 경우와달리 국외로 유출된 것도 많지만 국내에 보존되어 있는 것도 상당한데, 고려전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범종으로 천흥사동종(1010, 국립중앙박물관), 청녕4년명동종(1058, 국립중앙박물관), 용주사동종(국보 제120호,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송산리)의 3구를 들 수 있다.

또한, 고려 후기에 속하는 범종으로는 정풍2년명동종(1157,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 박병래소장), 내소사동종(1222, 보물제277호 전라북도 부안군 산내면 석포리), 탑산사동종(보물 제8호,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대흥사), 죽장사기축명동종(1229, 호암미술관) 등이다. 이들 4구의 동종은 역시 상대 위에 산형의 입상화문이 돌려져 있어 고려후기 범종의 특징적인 면을 잘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조선시대의 범종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고려말기에 있어서 불교 그 자체의 쇠퇴와 요승들의 출현으로 말미암은 부패상이 새롭게 나타나 지배계급에 의하여 제거의 표적이 되었으며, 새로운 교화이념으로 유교가 숭상됨에 따라 신라와 고려를 통하여 800여 년이나 국교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던 불교가 유교로 대체되었다. 이와같은 중대한 변화는 당시의 조형미술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으니 자연히 불교 미술의 쇠퇴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있어서의 불교 미술은 그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여세와 태조, 세조 등 군주의 귀의, 또는 보호에 의하여 약간의 작품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1592)을 중심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고 있다. 전기는 고려시대의 여운을 엿 볼 수 있는 시기로 고려적인 조성 양식과 수법을 다소나마 간직한 작품들이 출현하여 오늘날 실제로 그 유례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인 후기에는 고려의 여운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도리어 전란 때문에 오랜 전통이 단절되고 조형 미술은 전반에 걸쳐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조선 전기의 범종은 10여구에 불과한데, 이것은 임진왜란과 그 이후의 많은 전재, 또는 한말 일본인들의 약탈에 의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대체적으로 조선 전기의 범종들은 그 규모가 거대한데, 이것은 당시 불교를 보호한 왕실과의 관계에서 주 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범종으로는 홍천사동종( 1461, 서울 덕수궁), 봉선사대종(1469, 보물 제397호,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낙산사동종(1469, 보물 제479호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해인사홍치4년명동종(1491,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등이다. 이들 4구의 범종 가운데 해인사동종을 제외한 3구는 모두 왕실과 관련된 주성의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역시 높이가 1.5에서 2.8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다.

조선 전기 범종들의 형태와 양식 수법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종신의 단면은 견부의 곡선을 제외하면 거의 장방형으로, 정상에는 쌍두의 용뉴가 있어 이 동체로 종을 매달게 하였다. 그리고 원주형의 용통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는데, 해인사동종과 같이 용통대신 하나의 원공을 시공하고 있는 예도 있다. 견부에는 복련대가 돌려졌으며, 복련장식의 견대가 있을 때에는 그 밑에 범자열을 돌려서 상대를 표시하고 있다. 한편, 범자의 양주는 고려시대보다 더욱 성행하였다.

4개의 유곽은 윗변의 상대에서 떨어져서 완전하게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으며, 유곽 사이 사이에는 1구씩의 보살상을 배치하고 있다. 종신의 중앙부에는 굵게 조각된 중대가 양주되고, 명문은 종신 전면에 새겨져 있는데 모두 해서로 양각되었다. 하대는 하단에서 약간 떨어진 윗부분에 마련되었고, 그 하대의 하선밑으로 하단에 이르기까지는 약간 두드러져 무문대를 이루고 있다. 당좌는 마련되지 않아서 종신 하대부의 무문대를 두드려 타종 하였기 때문에 그 흔적이 완연하다.

종의 구연부는 주물의 두께가 두툼하고 이 위의 종신부로 올라가면서 얇아지는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곧 한국 범종의 고유한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일면이라 하겠다.

조선 후기의 범종은 100구가 넘게 남아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전 시대를 통하여 가장 많은 수이다. 그런데 이들 후기의 범종들은 대개가 주성 연기가 있어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데 모두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보아 강희, 건륭 연간에 만들어진 동종이 많은데, 이것은 특히 '영,정조시대'라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아울러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후기의 범종은 전기와 같이 규모가 큰 작품이 없고 장식 문양에 있어서도 더욱 치졸하여졌음을 볼 수 있는데, 이 시기의 대표적인 범종으로는 보광사숭정7년명동종(1634,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영장리), 직지사순치15년명동종(1658, 경상북도 금릉군 대항면 운수리), 통도사강희25년명동종(1686,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범어사옹정6년명동종(1728, 부산직할시 동래구 청룡동), 영국사건륭26년명동종(1761,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등을 들 수 있다. 이 5구의 범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직지사 종으로 높이가 1.5m이고, 통도사종은 1.47m이며, 보광사종은 65cm이다. 역시 전기에 비하여 훨씬 규모가 작아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범종들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조형과 문양을 보이고 있다. 즉, 종신의 단면은 거의 장방형이거나 정상부에는 쌍룡두의 용뉴가 있으며 용통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견부에는 연화문이나 또는 범자가 돌려져 있으며, 상대에도 대체로 범자가 돌려져 있다. 사다리꼴 모양의 유곽이 4좌 배치 되었는데 그유곽의 사이사이에는 4구의 보살상이 배치 되어있다. 종신 중앙부의 굵게 조각된 중대는 생략되었으며, 명문은 양각 또는 음각되었거나 점선으로도 새겨져 있다.

하대는 대부분 구연부에 표시 되었거나 생략되었고, 당좌가 없으므로 하단부에 타종한 흔적을 볼 수 있다. 종의 구연부의 형태나 촉감은 고려시대와 같은데, 두께가 두툼하고 종신부의 위로 올라가면서 얇아지는 느낌을 주는 우리나라 고유한 특성을 본받고 있다고 하겠다. 


IV. 종의 상징적 의미

현재는 범종이 주종을 이루지만 종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

 

1. 방울

우리나라 종 가운데 가장 일찌기 선을 보인 것은 큰방울이다. 1960년대 초에 대전 괴정동에서 동으로 만들어진 큰방울이 거울, 칼과 함께 발굴되었다. 그것의 제작연대는 서기전 4세기로 추정되어 청동기시대 이후에도 큰방울은 줄곧 만들어져왔다. 그렇다면 우리 선인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일찍부터 방울을 만들었을까? 이에 대한 선인들의 기록은 아무데도 없다.

다만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 『후한서』,『진서』등에 기록된 마한전 속에 방울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이 보일 뿐이다. 이들 사서에는 다같이 "마한의 각 고을에는 소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곳에는 큰 나무를 세워두고 그위에다 작은 방울과 북을 달아놓고 귀신을 섬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지』"마한 사람들은 5월달에 파종을 마치고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술과 음식을 마시고 먹으면서 춤을 춘다.

그런데 그 춤추는 모습이 흡사 큰방울을 흔들면서 추는 탁무와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남의 역사책에 작은방울과 큰방울에 관한 기록이 약간 비치고 있다. 그런데 큰방울이 출토된 대전지역은 후에 마한의 한지역이 되었다. 바로 그 땅에서 제사가 행하여지고 방울을 흔들면서 춤추는 잔치와 굿이 벌어졌던 것이다. 물론 중국 역사책에는 북쪽땅인 예, 부여, 고구려 등 여러 부족들의 제사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아쉽게도 방울에 대한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소도는 물론 신이 내리고 오르는 신역이요 제단이며, 거기에 세워진 나무는 신간의 성격을 가진 성물이다. 그리고 거기에 오르고 내리는 신은 그 땅의 부족들의 생명과 재산과 풍요를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그러므로 파종을 마친 5월이나 가을 추수기에는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굿판도 벌어졌다. 그런데 사람과 귀신 사이에 벌어진 굿판에는 귀신을 즐겁게 만들고 달래는 일이 큰일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노래와 춤이 동원되고 그 굿판을 흥분과 황홀경에 젖어들게 하여 귀신을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서는 악기가 필요하였던 것으로, 그것이 방울과 북이었다. 악기가 사람과 귀신을 흥분시키고 움직이게 하며, 나아가서는 자연현상까지 변화하게 하는 성구라는 믿음은 우리 민족에게도 일찍부터 발달하었다. 적을 물리치고 병을 낫게 하고 비를 오게도 하고 개이게도 하며, 파도를 잠재우게도 하였던 <만파식적설화>는 그것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무교를 절대시하고 그 밑에서 집단을 영위하였던 원시인들로서는 굿이 최대의 행사였다.

그러기에 동을 다룰수 있는 문화가 열리게 되자 무엇보다도 먼저 신과 관련된 방울, 칼, 거울 등의 성구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괴정동에서 방울, 칼, 거울등이 함께 출토된 것도 흥미롭지만 오늘날까지도 무당의 춤에 방울, 칼, 거울이 가장 귀중한 무고로 사용되고 있음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의 무당춤에 사용된 방울은 대개 일곱개를 짧은 막대기에다 매달아 흔드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을 칠금령이라 한다. 그리고 방울은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 것이 보통이지만, 박수의 경우 방울을 쳐서 소리를 내면서 독경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불교의 독경법에서 영향을 입은 것이다. 이렇게 방울은 서기전 4세기부터 출현하여 무교에 있어서의 성구로 여겨져 왔다. 그곳은 또 오늘날의 무당굿으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방울은 무교문화의 상징물이다. 그 방울소리는 신의 음성이기도 하고 신을 즐겁게 만드는 악기이기도 하며, 악신을 몰아내고 선신을 맞아들이는 성구였던 것이다.

2. 범 종

범종은 방울보다 늦게 등장하였다. 최초의 범종은 상원사동종으로 보고되었는데, 이것은 725년 (성덕왕 24)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46년 뒤인 771년(혜공왕 7)에는 사상 최대의 걸작인 성덕대왕신종이 탄생하였다. 방울이 무교의 상징물이라면 범종은 불교의 상징물이다. 그리고 방울이 씨족이나 부족집단의 산물이라면 범종은 강력한 전제왕권국가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그 크기에 있어서도 종은 방울과는 비교도 안되게 우람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상징적 의미도 훨씬 심원하고도 철학적이다.

범종은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종을 만들어서 부처님의 진리나 자비를 담아서 온 누리에 퍼지게도 하고, 역사에 기록될만한 대왕의 공덕과 위업을 종에다 담아 그것을 국토에 퍼지게 하여 호국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였으며, 중생들은 부처에게 종을 만들어 시주함으로써 소원을 빌기도 하였던 것이다. 결국, 종소리야말로 높은 세계의 뜻을 아래로 하달할 수도 있고, 아래 세계의 뜻을 높은 세계로 상달할 수도 있는 신구였던 것이다.

3. 악 종

악종은 이름 그대로 음악에 소요되는 악기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방울과 범종을 무교나 불교같은 종교와 관련짓는다면, 악종은 유교의 예악사상과 관련지을 수 있다. 특히, 조선 전기는 불교가 배척되고 유교의 예악사상이 고취되던 때였다. 그래서 음악이론도 정비되고 악기도 정비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예악사상에서는 악기를 연주함으로써 신을 즐겁게 만든다거나 종교적 발원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인간의 성정을 순수하게 하고, 성정이 순수하게 되면 도덕이 순화되고, 도덕이 순화되면 정치가 잘 될 수 있다는 지극히 효용적인 사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개국 공신인 권근은 여러가지 국기를 바로잡는 일 가운데에서도 음악을 바로잡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협연을 하면 조화를 이루고, 이것이 마침내는 천지와 조화를 이루어서 인간의 성정을 도와 도덕적으로 순화되며 바른 정치에 이바지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악종의 상징적 의미를 두었던 것이다.

 

V. 조각과 명문

1. 조각 및 문양

종의 의장은 각 부위의 특성에 따라 각기 환조, 부조, 양각, 음각 등 조각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종의 정부에 설치된 용뉴는 용 한마리로 조각되었는데, 허리를 구부려 고리를 이루어 이 고리를 통하여 종을 매달게 되었다. 용두의 형태는 대개 두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일신쌍두의 쌍룡으로 된것이며, 또 하나는 상반신만 나타낸 한 마리의 용으로 된 것이다.

용두는 목을 구부려 아래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으로 매우 생동감있게 조각되고 있다. 용두의 주형은 정밀한 납형 등이 주조에 사용되었고, 재료에 있어서도 질이 좋고 발색이 아름다운 청동조각의 특성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용두는 그 형상이 복잡하게 조성됨에 따라 여러 개로 분할된 거푸집이 주로 쓰이며, 용두의 기능이 종을 걸어 매다는 고리를 형성하는 데 있으므로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주조로 내부를 꽉 차게 주조하였다. 용두에 붙여서 음향조절을 하는 원통형의 음관이 설치되어 있어 종의 내부와 관통되었는데 그 형식은 주대의 종인 용종의 형식에서 유래된다.

이 용통은 3∼6단으로 구획하여 앙련과 복련이 대상으로 돌려지고, 또 대상에는 연꽃 모양의 화문이 장식되었다. 용통의 의장문양은 양주되어 매우 정치하게 조식되었다. 종 상하 끝, 즉 종견과 종의 주둥이 부분에는 문양대가 정교하게 조식되었다. 그 문양은 일반적으로 당초문형식이 쓰였다. 그 당초문은 구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매우 유연한 곡선과 화려한 꽃무늬가 어우러져 한층 공교롭게 의장된다. 그 문양은 양각으로 조식되며 상하 주연에 잘잘한 주문대가 장식되었다.

종견문양대에 붙여서 대칭되는 네 곳에는 이른바 유곽이라 불리는 방형곽이 설치되어 그 안에는 각기 9개씩 합계 36개의 유가 배치되어 있다. 이 유곽의 둘레에는 역시 문양대가 돌려져 유곽대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문양도 주로 화려한 당초문을 양각하여 장식하고, 또 주연에는 연주문이 돌려진다. 고려시대의 동종에서는 종견 위에 입화장식이 붙고 또 음관 위에 여러 개의 보주가 붙는 등 다소 양식적인 변화가 있으며, 종견 상하대의 당초문도 반화형의 화문이나 비천문 또는 뇌문으로 대체된 것도 볼 수 있다.

유는 연화를 양각한 유좌 중앙부에 자방이 있는 단순한 연화좌로 된 것과 그 연화좌 중앙부에 연봉 모양이 돌출되어 커다란 꼭지를 이룬 두가지 형식을 볼수 있다. 상원사종을 비롯한 통일신라기의 범종은 대개 6-8엽의 연화좌 중앙에 연봉이 돌출되어 있는데, 연봉에 연판과 여의두문에 연자등이 양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성덕대왕신종의 경우에는 유가 돌출되지 않고 연꽃만으로 표현되어 있다.

종의 몸체는 네 곳의 유곽 이외에 많은 공간이 이루어져 이 공간에는 주로 비천상과 당좌가 설치되고, 때로는 종의 소속 사찰과 제작연대, 제작경위 등을 새긴 간단한 명문이 있다. 한편,통일 신라기의 범종에는 주로 비천상이 부조 되었으나 고려시대에 와서는 여래상, 보살상 등이 새겨지기도 하였다. 조각수법도 고려시대에는 매우 사실적인 부조수법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었으나 고려 이후로는 선조로된 매우 졸렬한 표현의 양각모양으로 나타난다.

양각수법은 형상 외부를 깎아내려서 두께를 강조하는 제작방법이다. 동종에 새겨진 명문은 양각과 음각의 두가지 방법이 쓰이는데, 이들 표현방식은 사물을 선으로 표현하는데 적합하기로 곧잘 명문이나 상징적인 도형에 사용되었다. 종의 문양은 당초문, 연판문, 연주문, 뇌문, 범문, 운문, 해파문, 능화문 등 부수적인 장식문양과 비천상, 여래상, 보살상 동자상 등 상징적인 조상으로 그 유형을 나눌 수 있다. 당초문은 무늬의 형식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무늬의 형태에 따라 시대적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인동당초문은 인동덩굴의 뻗어나가는 형상을 도안한 무늬로,그 형식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 고대미술에서는 한대 운문형식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여 다양하여 다양하게 쓰였던 고식의 당초문이다. 보상당초문이란 당초덩굴에 보상화를 결속하여 이루어진 화문형식으로 화문을 덩굴무늬에 결합한 것이다. 이 문양이 성립하기까지에는 여러 종교적 건축기념물에 장식물로 쓰였기 때문에 본래부터 불교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통일 신라시대에 성행되었다. 이 시기의 모든 공예미술에서는 모란, 국화, 포도, 석류 등 화문을 보상화문으로 변화시킨 다채롭고 다양한 당초문이 나타나며, 불교미술의 특징적 장식요소를 이루게 되었다.

연판문또한 보상화 형식으로 화려한 양상을 띠게되었고, 또 서역적 장식요소인 연주문이 가미되었다. 고려시대 이후에도 대체로 신라의 양식은 주종을 이루었으나 점점 정교한 조각수법을 떠나 음각, 양각등 선적인 도형으로 형식화 되었다. 비천상은 천의자락이나 얼굴 표현,몸체의 율동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부조수법을 보여주는데, 대개 공양비천상과 주악상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비천상은 2구가 한쌍으로 각기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상원사종의 예와,비천 한쌍이 종의 전후에 각각 따로 배치된 성덕대왕신종의 예를볼 수 있다.

2. 명 문

미술사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는 미술품의 조성연대 추정이다. 그리하여 어떠한 유물이든 그 조성연대를 알아내기 위하여 양식수법이나 성행 배경등을 연구하게 되는것이다. 그런데 범종은 조성연대가 명기된 것이 어느 미술품보다도 많아서 각부의 조성양식 및 조각수법, 비천상이나 보살상 또는 각종 문양의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

예컨대, 상원사동종은 천판 상면의 용뉴 양측에 음각한 명문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 동종은 개원 13년 3월8일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개원 13년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해당되므로 이렇듯 뚜렷한 주종명문에 의하여 조성된 절대연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각부의 양각이나 조각수법 등은 모두 주종명의 절대연대인 성덕왕 24년에 이루어진 것이니, 연화문이나 당초문등은 문양사연구에 있어 하나의 기준이 될것이고 비천상 또한 그러할 것이며, 정상부의 용뉴는 한국의 용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된다.

다음으로, 성덕대왕신종은 종신 중간쯤의 간지에다 1,000자가 넘는 명문을 양각하였는대, 끝부분에 주종연대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당나라의 대력 6년은 신라 혜공왕 7년(771)에 해당하며, 앞에서 살펴본 상원사동종보다 46년이 뒤진다. 성덕대왕신종은 현재 남아있는 한국종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규모가 거대한 범종이다. 이 종에 조각된 비천상이나 당좌, 8능형의 종구와 상·하대, 유곽의 문양 등이 일찍부터 크게 주목되었던 것인데, 여기에는 특히 조성연기와 더불어 조성 절대연대가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주조된 범종을 살펴보면, 천흥사동종은 양각된 2행의 명문이 있어 이 동종이 고려 현종1년(1010)에 주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동종에서는 정상부의 용뉴와 용통, 종신에 있어서 상대와 유곽내 8개의 유두, 당좌, 하대등은 신라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비천에 있어서는 많은 변형을 보이며, 특히 명문을 새긴 것도 유곽 밑에 위패 모양을 조각하고 그 안에 양각하여, 이 시대에 나타나는 새로운 형식임을 알 수 있다.

근년에 출토된 청녕4년명동종은 종신하부에 이르러 당좌 사이의 하대 한곳에 연꽃으로 장식한 방액을 마련하고, 그 안에 명문을 음각하였는데, 그 명문 말미에 주종연대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 청녕 4년은 고려 문종 12년(1058)에 해당되는데 천흥사동종보다 48년이 늦다. 이 동종에 있어서도 비천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신라시대의 양식수법을 따르로 있다.

즉, 네곳의 유곽 밑에 가늘게 조각한 구름 위의 불보살을 각각 1좌씩 조각하였는데 이후로 조성되는 비천은 모두 불보살로 변하고 있으니, 종신부에서의 불보살의 출현은 대체로 11세기중엽부터라는 짐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종견에 있어서도 얕은 귀꽃 모양이 붙어 있으니,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입화식의 시원을 여기에둘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양식상에 있어서 많은 변형을 볼 수 있는데, 그 종에서도 대표작으로 흥천사동종을 들 수 있다. 종의 견부에는 볼록한 두 줄기 선을 돌리고 그 위에 단판 연화문을 양각하였다. 종신 중앙에는 세 가닥의 굵고 볼록한 횡선을 돌려서 상·하로 구분하였고 하구 중앙에 다시 볼록하게 두 줄기 선을 돌려 하대 모양을 취하고 그 사이에 파상문을 양각하였다. 당초문이 양각된 유곽 사이에는 원형의 두광을 갖추고 연화좌 위에 반측면상을 취한 보살입상이 1구씩 양주되어 있다.

이 동종은 종신 중앙의 세 가닥 융기선 밑의 넓은 간지에 장문의 명문이 양각되었는데, 그 명문의 말미에 주성연대를 밝히고 있어 제7대 세조 8년(1462)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봉선사대종을 살펴보면, 종신 하구간지에 가득하게 양각된 명문이 있는데, 그 끝부분에 동종의 조성연대가 세조 15년(1469)임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보살입상의 주변과 종신 중앙부의 세 가닥 융기선 상연부에 범자가 양각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VI. 종의 제조법과 소리


한국종을 창출한 신라사람들이 현대기술로도 재현할 수 없는 상원사종, 성덕대왕신종 등과 같은 명종을 만들어 종각에 어떻게 걸었는지 생각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주종에 대한 기록이 없고 신라시대의 전통적인 주조비술이 도중에 단절되어 고대의 주종기술을 찾을 길이 없다. 종의 생명인 '청아하고 은은한 종소리', '아름다운 문양의 미'를 겸비한 신라사람의 주종기술은 우리의 호기심을 더욱 크게 한다. 여기에서는 현존하고 있는 신라종을 토대로 하고, 현대의 주조기술과 관련시키면서 종의 제조법과 소리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1. 종의 제조법

종의 제조과정은 (1)용융금속을 주형에 주입하여 만드는 주조법, 즉 범종. 동탁 등과, (2)청동을 단련하여 만드는 단조법, 즉 금고. 동라 등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주조법은 무게가 커서 종거리에 걸어 고정시켜 타종하고, 단조법으로 만든 것은 가볍고 크지 않아 이동시키기 쉬운 장점이 있다.

(1) 설 계

종을 만들기 위하여 종제작을 의뢰한 사람의 요구, 종의 역할, 종의 크기, 종의 형상과 문양을 구상하고, 구체적인 치수와 문양에 대한 도면을 작성하는 것을 종설계라고 한다. 여기에서는 종의 두께변화에 따른 음향설계와 각 부위의 문양에 대한 문양설계도 함께 한다. 또한 종제작에 관한 주형, 금속용해법과 기타 필요한 사항 등을 설계에서 정한다. 종이 설계되면 종의 중량-구경치수-종의높이-음통높이-두께-상대-하대-유곽-당좌-비천상-용두의 크기와 형상치수 및 문양이 확정되어 주조에 들어간다.

(2) 재 료

종은 금속으로 만든 일종의 타명기로, 금속 종에서 청동으로 만든 청동종과 주철로 만든 무쇠종으로 크게 나눈다. 『천공개물』에는 "종을 주조할 때 상등은 청동으로 만들고, 하등은 주철을 사용한다."라고 하였다. 한국종은 거의 전부가 청동이고, 주철은 몇 개에 불과하다. 한국범종에 사용된 청동은 동과 주석의 합금으로 동에 주석 12-18%를 첨가한 청동이다. 일반적으로 주석량이 많아지면 종소리가 맑고 여운이 길지만, 다소 균열이 생기기 쉬운 결점이 있다.

(3) 제작공정

종제작 공정은 주형공정과 용해공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주형공정은 모형제작. 지문판제작. 밀랍형제작과 조형제작 등으로 분업하여 준비된 것을 조립, 쇳물을 주입한 거푸집인 주형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주조공정은 청동의 용해작업, 청동의 주입 작업과 의식절차를 말한다.

2. 종소리

(1) 진동과 음향

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이다. 종은 타종하면 종의 진동이 공기를 진동시키고, 공기의 진동이 사람의 고막을 진동시켜 뇌에 전달되면 소리를 감지하게 된다. 종에서 소리가 발생하는 것은 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금속원자의 진동에 따라 종체의 탄성 변형이 공기 중에 전파되기 때문이다. 종의 진동은 종의 크기 및 형상에 따라 다르고 또한 종의 재질, 타봉종류 등 많은 인자들이 영향을 미친다. 종에서 '좋은 종소리'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시한다.

첫째 맑은 소리로 잡음이 없고 귀에서 아름다운 소리로 감지될 수 있어야 하며, 둘째 종의 여운이 길어야 하고, 세째 뚜렷한 맥놀이가 있어야 한다. 이와같은 세 요소는 종에 사용한 합금, 쇳물의 냉각속도, 종의 형상, 두께분포, 문양배치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2) 진동모드

종의 진동은 반경방향. 원주방향 및 길이방향 등의 진동방향에 따라 다르나, 그 중에서도 반경방향의 진폭이 가장 크고, 길이방향이 가장 작다. 따라서, 종의 반경방향의 진동변형이 주로 종소리로 들리게 된다. 또한, 종의 진동 크기를 표시하는 진폭은 타종 위치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종구에 가까운 종 하부를 타종하였을 때가 가장 크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종소리가 작아진다.

(3) 구간음

종소리의 3개 구간음과 여운 종소리는 수많은 부분음으로 구성된 복합음으로,타종하였을때 3개 구간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구간음은 타종 직후 1초이내에 소멸되는 소리로 타음이라고도 한다. 이 소리는 '꽝'하는 순간음으로서 많은 부분음이 포함되어 있다. 제2구간음은 타종한뒤 5-10초 전후까지 계속되고 이것이 먼곳까지 전달 되므로 원음이라고 하며, 멀리까지 들리는 종소리가 이 소리이다. 제3구간음은 타종한 뒤 30초-1분이상 계속되면서 점점 감쇠되는 종소리로서 여운이라고도 한다.

여운은 기본 진동모드에만 관계되고 은은하고 뚜렷한 강약의 맥동, 즉 맥놀이가 있고 긴 종이 좋다. 종은 표면의 문양배치 및 주형제작에서 오는 두께 및 형상의 비대칭 때문에 각 진동모드에 주파수가 약간 차이나는 서로 다른 고주파수 및 저주파수로 구성되는 경우가 있다. 이 고(H)및 저(L)주파수의 차인 H-L 값이 여운의 울림(또는 맥놀이라고 한다)의 주파수가 된다. 맥놀이는 고주파수와 저주파수가 공명이 생길 때 나타난다.

(4) 대표적인 한국종의 고유진동수

한국종의 특색은 맑고 청아한 음색을 가지며, 또한 긴 여운과 뚜렷한 맥놀이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원사종(725)의 고유진동수는 102Hz이며, 고진동수(H) 103.02 Hz와 저진동수(L) 101Hz가 합성되어 맥놀이 주파수2.02Hz가 형성한 국내에서 가장 좋은 종소리로 평가되고 있다.

상원사종의 특색을 『한국의 법종』에서 "종의 양성적인 소리는 엄숙하고 장중한 성품으로, 저음의 느린 울림과 애타게 절규하듯 중심음이 한없이 길게 푸른 허공 속으로 아름다운 선을 그어나간다."라고 평하였다. 실제로 상원사의 종소리를 들은 사람 중에는 종소리가 명실공히 국내에서 제일 아름다운 종소리라고 평하는 사람이 많다.

신라종으로서 국내 최대 종인 성덕대왕신종의 기본고유진동수는 65Hz이고, 맥놀이 주파수는 0.35Hz이다. 그러므로 약 3초에 한번씩 여운에 울림이 생기면서 종소리가 퍼져나간다. 이 종의 특색을 『한국의 범종』에서 "태산이 무너질듯 장중하며 호연히 천지에 토해내는 사자후 같이 굵기도 하며, 낮은 매듭 속에 또한 못내 자비로운 높은 여운은 그칠 줄 모르고 또 깊게 사바속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실로 이 세계적 거종의 생명은 그 종소리와 더불어 영원하기만 하다."라고 평하였다. 이 종은 1,20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간 많은 역사가 변하였으나, 통일 신라시대의 금속공예의 진수와 불음을 그대로 전하여주고있다.

 

(5) 한국종의 음통과 명동

한국범종의 종정에는 중국종, 일본종에서 픶아볼 수 없는 음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중국고대의 용종과 관련시켜 용통이라고도 부르고, 또한 음향과 관련이있을 것이라 하여 음관(음통)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또한 그 역할과 기능에 관하여서도 고고학적으로나 공학적으로나 완전히 구명되어 있지 않다. 1982년 황수영은 『삼국유사』의 만파식적을 인용하여 신라종정에 있는 원통은 신라 제일의 국보이고, 신기인 만파식적에 유래한다는 학설을 발표한 바 있다. 한편, 신라종정의 원통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음관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붙였을 것이라는 추정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입증할 만한 보고가 없었다. 한국 범종의 권위자인 서울공대의 염영하교수는 1982년 『한국종의 음관에 대한 연구』에서 음통은 용두와 더불어 종을 종가에 걸때 지주역할과 종을 주조할 때 주형내부의 가스배출에 기여하며, 음향학적으로는 음향필터로 타종하였을때 종 내부의 잡음을 감소시키고 음향 확산효과에 도움을 준다는 공학적인 해석을 하였다. 음통은 앞으로 더욱 연구할 과제로 남아 있다.

한국종의 하부에는 옛날부터 항아리를 놓거나 땅을 움푹하게 파서 명동을 만드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이 명동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철호가 실물로 1948년 강원도 양양의 선림원지에서 출토된 바 있고, 그 외에는 실례를 픶을 수 없다. 이 명동의 역할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비한 상태에 있어 더욱 자세한 것은 앞으로의 연구에 기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종은 한국고유의 창출로 '소리' 및 아름다운 '미'에서 세계 제일로 평가되는 우리나라 금속공예품으로서, 민족의 긍지를 후손에게 남겨준 귀중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조사자 : 김 병 락)

출처 : 야후 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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