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전생인연이 깊은 통도사 범종루와 신라범종 이야기

korman 2007. 4. 29. 23:08

 전생인연이 깊은 통도사 범종루와 신라범종 이야기  

 


 

 

 

1920년대 통도사 범종각과 만세루, 종이에 먹펜, 36X50cm, 2007

 

사진출처 : 조인스닷컴

 

 

 


통도사 범종루와 신라범종 이야기

한국 불교의 종가(宗家)라는 양산 통도사의 범종(梵鍾)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통도사에서는 새벽 3시와 저녁 6시에 범종을 칩니다.
제일 먼저 작은 범종을 치며 지옥을 파하고 중생을 구한다는 염불을 하고
그 다음 큰 법고(法敲)를 여러 스님이 번갈아 두드립니다.
장삼을 펄럭이며 법고의 가운데와 테두리를 번갈아가며 두드리는 모습은 참으로 멋이 있습니다.
통도사 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공부를 겸하여 치는 것인데
가장 솜씨가 좋은 고두장의 화려한 연주에는 관람객의 박수가 쏟아집니다. 
10여분에 걸친 법고 연주가 끝나면 목어(木魚)의 맑은 소리가 이어집니다.  
항상 눈을 뜨고 있는 물고기처럼 게으름 없이 수행을 하라는 뜻을 담은 목어를 두드리는 것은
물속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지요.
목탁이 휴대형 목어라는 것을 아십니까?
양쪽에 뚤린 구멍은 눈이고 가로 길게 뚤어놓은것은  입이지요.
이어서 구름모양으로 만든 청동 운판(雲版)을 댕 댕 댕 울려서 하늘을 나는 생명과 영혼을 구제합니다.
운판 소리에 이어 마지막으로 무게 일만 오천 근의 범종이 깊고 큰소리로 영축산 계곡을 뒤흔듭니다.
범종 소리를 들으면 목사나 수녀까지도 옷깃을 여미게 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까닭은 범종의 형태에 있습니다. 
    
통도사 범종은 1988년 전형적인 신라종의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신라 범종은 밑이 넓은 중국종과 다르게 밑 부분이 오므라든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종 윗부분에는 종을 걸기위한 용두(龍頭)옆에 음관(音管)이 있습니다.
종위에 구멍을 뚫고 피리모양의 원통을 붙인것이지요.
그래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바로 범종의 음관이란 주장도 있습니다.
신라종에만 있는 신비한 장치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음관의 역할이 무었인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첨단기기로 조사한 결과 8~10%의 소리가 음관을 통해 위로 나가며 높은 파장의 잡음이 제거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종 밑의 땅바닥을 둥글게 판 명동(鳴洞)도 세계에서 유일한 장치입니다.
이런 독창적인 장치로 신라종은 세계 어떤 종보다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또한 낮은 주파수의 소리로 땅속까지 울리며 소리가 멀리 퍼져갑니다.
특히 맥놀이 현상이 길어 긴 여음을 남깁니다.
일본 NHK에서 전 세계 유명한 종을 조사한 후
경주박물관에 걸린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에밀레종)의 소리가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를 내렸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어떤 음향과학기술이 있었기에 세계최고의 범종을 만들었을까요.
성덕대왕신종은 무게 12만근(약20톤)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 크기인데
49만근(약80톤)이나 되었다는 황룡사 대종이 남아있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울까요.
사용 할 수 있는 종으로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중국 북경 대종사(大鍾寺) 영락대종(永樂大鍾)의 무게가 46.5톤이라니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대종입니다.
성덕대왕신종은 밀납(蜜蠟-벌집)으로 종의 원형을 만들고
그 안과 밖에 니암(尼岩)가루와 모래로 외형틀(거푸집)을 짠 뒤
열을 가해 밀납을 녹여낸 공간에 청동 쇳물을 부어 만들었답니다.
그래서 표면이 곱고 아름다운 조각을 그대로 살려 낼 수 있었습니다. 
종 몸통의 위와 아래에는 당초문 띠를 아름답게 둘렀고,
상단에 사각형의 유곽(乳廓)과 유두(乳頭)를 양각하여 종의 품위를 높였습니다.
연꽃 모양의 당좌(撞座-종을 치는 곳)는 가장 타종에 적합한 위치랍니다. 
종의 몸통 좌우의 비천상(飛天像)은 우리 종에만 있는 조각인데
하늘로 날아오르는 천의의 유려한 선과 공양물을 들고 있는 천인의 자태는
세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장인이 아니면 어림도 없는 솜씨입니다. 
종 고리 역할을 하는 용두도 대단한 솜씨의 조각품입니다.
두 마리의 용으로 고리를 만드는 중국종이나 일본종과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용봉향로(龍鳳香爐)의 용 모양과 비견되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성덕대왕신종은 현대의 주조기술로도 똑같이 만들 수가 없답니다.
금년 2월 밀납주조방식으로 신라종을 복원했노라고 야단이어서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니
겨우 1톤짜리 조그만 종을 만들어 놓고는 그 요란이었습니다
    
통도사 범종루는 조선조 숙종 12년(1686) 수오(守悟)대사가 세웠습니다.
중수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29년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을 보면
난간만 계자각 난간으로 바뀌었고 기둥 까지도 현재와 똑같습니다.
그 후 범종을 새로 달고 목어와 법고를 하나씩 늘렸습니다.
펜화가는 통도사 범종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울컥해지고 눈물이 납니다.
통도사와 인연이 깊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수행이 깊은 스님 말씀이 펜화가가 전생에 통도사에서 불화를 그리던 불모(佛母-불화를 그리는 스님)였답니다.
조선시대 3대 불화가로 보물 제1041호인 영산전 팔상탱(八相幀)을 그린 유성(有誠)스님이랍니다.
어쩐지 처음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갔을 때 팔상탱에 반해서 발이 떨어지지가 않더군요.
통도사 팔상탱은 섬세함과 색채 등 여러 면에서 불화뿐만 아니라
한국화를 통 털어서도 비견되는 작품을 보기가 어려운 명작입니다.
전생의 그림이라니 자화자찬이 되었네요.
통도사의 법당들을 펜화로 기록하는 업무를 맡아 1년 6개월을 통도사 법사실에서 지냈습니다.
법사실은 다른 절의 큰 스님이 통도사를 방문했을 때 잠시 머무는 방으로
통도사에 소임을 맡은 스님도 쓰기 어렵다는데
전생에 어떤 공덕이 있어서 그런 혜택이 주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통도사 생활이 고향집에 온 것처럼 편하고 좋으니 스님 말씀이 맞나 봅니다.
고집스러운 채식생활과 이절 저절 절집으로 도는 생활을 보고
"좋은 다비장도 있으니 머리깍고 통도사에 눌러 살라"는 스님 말씀도 있는데
집사람이 알면 그날이 다비장으로 가는 날이 될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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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의펜화기행] 엽서 덕에 풀린 미스터리

 

[중앙일보]

 

통도사 범종각·만세루

 

2002년 초부터 1년6개월 동안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살았습니다. 펜화로 캘린더를 만드는 소임을 맡아 법사실에 살림을 차린 것입니다. 전생에 어떤 공덕이 있어 스님도 배정받을 수 없다는 법사실에 살게 되었을까요? 기도를 많이 하였다는 스님이 “영산전 팔상탱(八相幀·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의 그림에 담은 불화)을 그린 유성(有誠) 스님이 당신의 전생이었네”라고 하더군요. 조선 최고의 불화가인 유성 스님이 그린 통도사 팔상탱은 보물 제1041호입니다. 색채의 아름다움과 섬세함에서 불화뿐만 아니라 한국화 중에서도 비교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전생의 화력이 있어 현생에서 세밀한 펜화를 그리나 봅니다.

통도사 법당들을 펜화로 그리면서 만세루(萬歲樓)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다른 절의 만세루는 벽체가 없는데 통도사 만세루만 4면 모두 벽으로 막혀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궁금증은 얼마 전 인사동 골동품가게에서 만난 사진엽서로 풀었습니다. 1930년대 까지만 해도 만세루 전면에 벽체가 없었던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사진엽서에 담긴 범종루는 현재의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기둥과 지붕을 받치는 활주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숙종 12년(1686) 수오대사가 세운 범종루는 중수한 기록이 없습니다. 사진엽서의 목재 상태를 보면 초창기 때 목재로 보입니다. 현재 범종루는 난간을 계자각 난간으로 바꾸었고 단청을 입혀 화려해 보입니다. 88년 1만5000근짜리 범종을 추가로 달았고, 법고와 목어도 하나씩 더 달았습니다.

2003년 캘린더를 펜화로 만들었고, 2004년 캘린더는 영산전 팔상탱의 훼손된 부분을 컴퓨터로 복원하여 만들었습니다. 현생의 작품과 전생의 작품으로 캘린더를 만들어 본 작가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김영택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