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중생을 제도하는 유현한 법열의 소리, 범종

korman 2007. 5. 2. 23:41


해질 녘, 깊은 산길을 걸을 때, 어디선가 멀리 산사에서 울리는 범종소리를 듣게 되면 형언할 수 없는감동에 젖게 된다. 이런 감동이 바로 불자들이 체험해볼 만한 법열의 경지가 아닐까. 더구나 지친 몸으로 먼 길을 걸어온 운수납자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런 감동은 불자만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중국의소상팔경에 한산모종寒山暮鐘이라는 것이 있다. 중국양자강 중류 소상강 팔경 가운데 하나가 해 저문 강가에서 듣는 한산사의 종소리이다. 당나라 시인 장계의‘풍교야박楓橋夜泊’이라는 시에도 이 종소리가나온다.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밖한산사에夜半鐘聲到客船저녁종소리가객선에들리네우리나라 시조에도 산사의 종소리를 읊고 있는 것이더러 보이는데, 해질 무렵의 종소리에 감동하는 것은 세속인도마찬가지인것같다.


사찰의 종루에 걸린 범종이 울릴 때면 나는 항상 끝없는 상념에 잠긴다. 법고가 법어로서 새벽의 빗장을 여는것이라면 범종은 법어로서 저녁의 빗장을 닫는 것이리라. 밤이 되면 누군들 쉬고 싶지 않겠는가. 고해에 고달픈 중생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 하랴. 범종은 일체중생을스스럼없이 껴안아 법의 자리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자비이다. 중생의 모든 고통은 범종의 저음에 얼싸안겨 해탈의바다로흘러가는것이리라.


지금도‘제야의 종소리’라 하여 섣달 그믐이 되면 종로 인경을 친다. 조선시대에 저녁이면 28점을 쳐 통행을금했는데 이를 인정人定이라 하고, 새벽에 33점을 쳐 통중생을 제도하는 유현한 법열의 소리, 범종금을 해제했는데 이를 파루罷漏라 했다. 제야의 종소리는여기에서비롯된것이라한다.판소리 춘향가의 사랑가에‘저녁에는 이십팔수 새벽에는삼십삼천그저뎅-뎅-’이라하는데서알수있듯이 28점을치는것은이십팔수二十八宿를의미하고, 33점을 치는 것을 삼십삼천三十三天을 의미한다. 28수는 하늘의 별자리에서 나온 것이고 33천은 분명 불교의 천상세계에서 나온말이다.


그런데 불자들은 절에서 치는 범종을 그렇게 단순히 해석하지 않는다. 욕계의 6천과 색계의 18천 그리고 무색계의 4천을 합쳐 28천의 모든 대중에게 부처님 도량에 모이라는 뜻으로 아침에 28번을 치고, 모든 중생이극락정토에왕생하라고저녁에36번을친다한다.


불교에만 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유교에 편종編鐘이 있고, 기독교에도 교회종이 있다. 이 중에서도 음향으로나 조형으로나 불교의 범종이 가장 우수하다. 불교 범종가운데서도 우리나라 신라의 범종이, 신라 범종에서도 속칭‘에밀레종’이라이르는봉덕사종이최고이다. 그러니봉덕사종은세계에서최고의종이라할수있다.


기독교 교회종이나 유교의 편종은 높은 소리를 내니경쾌한 느낌을 주지만 범종은 낮은 소리를 내니 장중한 느낌을 준다. 다른 종은 여운이 없어 쾌활한 느낌을주지만 범종은 여운이 길게 남아 유현한 느낌을 준다.
봉덕사종은 범종 중에서 가장 장중하고 유현한 소리를낸다.

범종은여러가지조형적특색을가지고있다. 이중에서몇가지만들어보고싶다.


범종의가장윗부분은용뉴라한다. 용의모양을한고리라는 뜻으로 이 용뉴에 쇠줄 등을 연결하여 종을 매단다. 용뉴는 시대에 따라 한 마리 또는 두 마리의 용이 묵중한 범종을 물어 올리듯이 생동감 있게 표현된다. 그작은 몸으로 그 큰 범종을 감당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용뉴가지닌형용치못할어떤위력을느끼게된다.


용뉴의 바로 옆에는 음관이라는 소리 대롱이 있다. 마디가 뚜렷한 대나무를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형태이다.타종 후 모든 소리는 이 가느다란 음관을 통해 일사천리정진하고 이 음관을 통해 한 소리로 맑아져서 세상 밖구원의 길을 떠난다. 이 음관 대롱을 두고 해석이 구구하다. 어떤 이는《삼국유사》에 전하는 만파식적의 형상이라고한다.


만파식적! 적병을 물리치고 성난 파도를 잠재우며 가뭄에는 비를 내리게 하고 홍수에 비를 그치게 하여 세상을 평온하게 만드는 그 신비의 젓대 만파식적을 이 음관의형상으로본것은절로고개를끄덕이게한다.범종 가운데서도 고전적인 형태를 가장 잘 간직한 것은 상원사종이다. 이 범종은 단순한 불교의식구가 아니다. 종의 몸체 부분에 있는 장엄한 비천상이 보는 이로하여금 신비하고 황홀한 경지에 빠지게 만든다. 길고 긴천의를 나풀나풀 흩날리며, 꽃구름 위에 앉아 천상의 음악을 이제 막 연주하려는 비천상의 모습은 환희의 세계,바로 천상의 음악으로 중생의 사바세계를 화엄의 세상으로인도하는것이다.나는 상원사 범종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가는 길은참으로 험난했다. 그 해 찾아든 험악한 홍수로 뿌리째뽑혀진 장송들과 집채만한 바윗돌들이 서로 엉켜 있어온 계곡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디 하나 성한 곳없는 비포장도로를 엉금엉금 기어서야 겨우 말로만 듣던상원사종을볼수있었다.


불교음악을 전공하는 내가 상원사종의 비천상이 들고있는 악기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이 범종의 종신 중앙에 두 비천상이 천의를 흩날리며 하나는 공후를하나는 생황을 들고 연주하고 있다. 상원사종에는 종신에만 주악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 내부의 반원권에는 피리와 쟁을 연주중인 비천상이 있고 하대 반원권 내부에는 비파, 횡적, 요고, 피리 등을 주악하고 있다. 공후, 생황, 피리, 쟁, 비파, 횡적, 요고 등은 단순한 악기가아니고 고대 서역에서 쓰던 악기이다. 따라서 상원사종은 오케스트라처럼 모든 서천 서역 악기가 어우러진 주악비천상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극락정토를상징하는것이다.


그렇다. 오늘도 사찰의 범종은 장중하고 유현한 소리를 발한다. 범종은 예불의식 때에도 가장 늦게 울리며특히 지옥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그 유현한 소리는 아둔한 나로 하여금 극락정토의 법문을 조금이나마 엿들을수있게한다. 이얼마나환희스러운일인가!

 

원본 : 원간 해인 / 불교음악산책 - 이미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