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국 의 금 속 공 예
▲ 일본 도쿄박물관 소장 명창7년명 범종 (동종)
이 호 관(국립전주박물관장)
梵鐘 (발췌)
불교의식에서 사용되는 불구류중 종교적 분위기를 높이기 위해 소리 내는 일체의 용구를 梵音具라 한다. 범음구에 속하는 범종은 청정한 불사나 범찰에서 사용하는 종을 말한다.
범종은 洪鐘, 浦牢, 鯨鐘, 華鯨, 巨鯨, 釣鐘, 撞鐘 등 여러가지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 크기에 따라서 半鐘, 晩鐘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대부분 통칭하여 범종이라고 부르며 특별히 유형별로 구분하지는 않는다.
범종은 중국의 은.주 때 고대 동기중 용종이라는 악기에서 모방되었다고 하는 설의 범종이 유행하였었다. 한국 범종의 기원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일반적인 통설로 된 것은 두개의 설이 있는 바, 그중 일설은 중국의 은대 이후 예기 중의 악기의 일종인 古銅器의 鎛.鐘.鉦을 鐘을 모방하여 오늘날의 범종의 조형이 비롯되었고 하는 설이며, 또 다른 일설의 주장은 고대 중국의 鐘이나 鐸을 혼합한 형식에서 발전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근간에는 인도에서부터 불교와 더불어 들어 왔다는 설과 자체에서 발생.발전되었다고 하는 설 등이 있으나, 이와 같은 설은 신빙성이 희박하여 문제되지 않는다고 본다.
특히 위의 두가지 설이 가장 유력시 되는 학설인 바, 이 두가지 설중 공통되는 점은 모두가 고대동기의 악기 종류의 일종인 종이라는 것에서 부터 발전하여 되었다는 점이며, 이것에서 지적하는 악기종류의 종이란 것이 甬鐘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甬鐘은 주시대에 제작되어 성행되었던 것이 주말 전국시대 이후부터 다른 예기와 더불어 그 자취를 감춘 하나의 악기의 일종인 것이다. 이와같은 용종을 모방하여 현재의 한국 종의 형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이런 용종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8세기 경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한국종의 각 부분에서 특색과 양식을 가장 많이 구비하고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하여 그리고 용종의 ‘용’부분이 한국종의 龍鈕 부분에 해당되며, 용종의 ‘幹’부분인 獸頭文이 발달하여 龍頭로 변화하였고, 鐘身에 해당되는 鈕部에 36개의 突起를 나타낸 ‘枚’가 한국종의 乳頭로 표현되고, 용종의 ‘隧’에 해당되는 곳이 한국종의 撞座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는 주장이 첫째 주장설의 대략인 것이다.
이상에서 본바에 의하여 여러가지 점을 감안하여 볼때, 용종의 여러가지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 한국범종이며, 또한 중국종이나 일본의 和鐘에 비하여 가장 고대의 양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특수한 양식과 구조를 구비한 것이 한국범종의 본연의 형태라고 본다.
한국의 범종 중에서 대표가 되고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은 開元十三年銘(A.D 725, 신라성덕왕 24년) 상원사 범종을 비롯하여 大曆六年銘(A.D 771, 惠恭王 7년) 성덕대왕신종인 봉덕사종을 신라시대 범종으로 들 수 있다.
특히 상원사범종의 형태는 한국종의 기본형태로서 삼고 있으며, 이에 따라 각부분을 살펴보면 종의 전형태가 砲彈의 頭部를 잘라버린 것과 같이 전체적으로 위로 좁아지는 원추형이며, 또한 한국가정에서 사용하는 오지대형甕 (김치독)을 엎어 놓은 것 같은 형태이다.
종신의 하부 약3분의 2쯤 되는 것이 가장 넓고, 그 밑은 약간 축소되어 매우 안정된 감을 주는 외형을 갖고 있다.
종신의 상부에는 상대 즉 肩帶가 있고, 하단에는 하대 즉 口緣帶라 불리우는 문양대가 周廻되어 있다.
상대에 붙어서 방형의 문양대인 乳廓이 4개소에 등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각 유곽속에는 9개의 乳頭가 정연하게 3열로 종횡으로 갖추어 배치되어 있고, 하부에는 하대 즉 구연대를 갖추고 있고 상하대의 주문양은 半圓圈의 문양을 주된 문양대로 하고 있다.
鐘腹에는 天衣를 날리며 주악하고 승천하는 飛天像을 대좌하여 대칭적으로 배치하고, 비천상과 交互로 蓮瓣文과 당초문 및 寶相花文등을 혼용하여 양각으로 부조가 심하게 나타낸 撞座 2좌를 대칭으로 배치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특색이다.
특히 鐘頂인 天板에는 전형적인 신라시대 성행하였던 연판으로 견대와 접하는 계선상에 周廻彫飾하고 있다. 또한 천판 중앙에는 2肢로 땅을 딛고 머리를 숙여 지면을 물어 뜯듯 종을 한 입에 물어 들어 올리듯 한 힘찬 龍形鈕를 만들어서 구부러진 龍體로 종전체를 매어달도록 고리를 하였고, 그리고 이 용형체에 부착시켜 외부를 화려한 당초와 보상화문 또는 연판으로 조식한 甬筒이 종신과 맞뚫리게 한 것은 종신체에서 발하는 음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으로 주장도 하고 있으나, 이는 정확한 판정이 아니라고 보며, 필자의 생각으로는 신라인들이 무의미하게 행한 장식적인 수법이 아니라 반드시 범종음과 유관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수법을 사용한 것이라 보며, 또한 근자에는 서울대 공대 강영하교수의 한국종연구총서에서 실험결과 종음과 유관함을 밝힌 바도 있다.
이상에서 본 신라의 범종은 대별하여 2종류로 또 다시 구분되는 바 그 하나는 전통양식과 전형양식을 갖춘 상원사범종과 특수양식을 갖춘 성덕대왕신종을 들 수 있고, 주종을 이루는 것은 역시 상원사범종의 형식과 양식이 주류를 이룬다 하겠다. 상원사동종, 봉덕사종, 월정사종, 실상사파종 그리고 그 이외에 일본에 있는 신라종들인 바, 공통되는 것은 甬筒과 龍鈕를 갖추어 대칭적인 비천을 배치하고 奏樂공양상으로 되어 있으며 몸통은 1:1.5, 1:2의 비율에 국가적 범종으로서 화엄사상에 의한 天人像으로 종의 몸체에 비천상을 표시하고 있는 점이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송, 요, 금,원과의 관계가 깊음에 중국적인 기조가 고려문화의 각 분야에 반영되어 순수하고 기력이 넘치는 미술품은 나타내지 못하였다.
그 예로서 범종은 10C에서부터 11C말까지는 신라종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되며 이것을 고려의 전기종이라 한다면 12C에서부터 14C까지는 종신과 종구의 비례가 1:1의 비율을 갖춘 왜소하고 도식화된 범종으로 변하며 종신의 비천이 여래나 보살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때 이르러서 고려불교도 의식불교화 됨에 따라 각 사찰에 사물을 갖추는 형식으로 되어간다.
후기종의 대표는 부안 내소사 貞祐10年銘鐘을 들 수가 있다.
향로는 넓은 전을 갖추고 받침이 나팔형으로 된 향로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바, 대표적인 것으로는 표충사향로, 봉은사향로, 금산사향로, 건봉사향로 등을 들 수 있고 이들 향로의 표면에는 梵字, 蓮瓣文, 蟠龍文, 如意頭文등을 象嵌하여 장식하고 동체의 색깔은 烏銅法으로 되어 있다.
乾國梵鐘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장식법은 비천상과 보살상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고려왕조의 범종에서 보살상과 여래상으로 비천상 대신 변모되어 나타나는 양식은 극히 주목되는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은 불교적 사상과 교리구명에 있어서도 중요시 된다고 보며 신라 불교전래 이후 신라는 독창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서기 7세기경 부터는 자장, 圓測, 원효, 의상등의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정립하고 기반을 굳혔으며 교리의 종합과 정리를 기하여 단일화를 이르면서 호국불교와 왕실불교로서 역할을 다하여 신라사회의 정신계를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또한 의상대사에 의한 화엄종으로서의 대통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겠고, 이 결과 해동 화엄종의 비조가 되었고 왕조가 끝나는 그 시기까지 신라불교는 화엄종으로 기반을 굳혀왔다고 본다.
화엄종의 所依로한 종지는 화엄경으로서 화엄사상에는 지상설법과 천상설법의 두가지가 있는데 그 표현을 보면 석가가 탄생하자 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부르짖으며 座 立 動 步 走 飛 舞 歸의 起居動靜의 모습 위에 불법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어디까지나 전진적이고 이상적인 표현이라고 하는 바 불심표현의 기거동정에 있어 飛와 舞는 곧 천상의 설법을 뜻하는 것으로 천상의 표현은 곧 비천상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이 천인상의 표현방법이 신라미술품의 모든 분야에 비천상을 조식하는 하나의 동기라고 본다. 그러나 고려에 이르러서는 태조이래 불교정책은 고려불교로 하여금 사회의 밑바닥까 지 침윤케하고 왕조의 주류적 사상을 신라의 화엄종을 계승하다가 대각국사 의천때에 이르러 획기적인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면목을 일신하여 교파와 선파를 통합하여 천태종을 신창해 고려의 전불교계를 풍미케 된다. 천태종의 교의는 법화경으로서 그 표현은 가상상의 진실을 표현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어 자비의 인격화로 응화력 위에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법화경을 주경으로한 고려의 후기 불교는 점차 대중화되고 의식불교로 변모되며 밀교적 영향과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이로 인해, 밀교에서는 천인상과 고을 동일하게 보는 형상이 나타나 이 영향이 고려후기 법종에서 비천상 대신 來迎圖의 뜻으로 합장한 보살상이나 여래상으로 주식표현 하였다고 본다. 한편 재래의 薩滿的 神道의 행사와도 다분히 혼잡된 양상을 느끼게 하고 또 이런 영향이 불교자체에 승합되여졌다고 생각된다.
고려왕조의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건국한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배불숭유정책의 영향아래 불교의 공예미술은 더욱 퇴락되고 도식화되며 범종 자체의 주종에 있어서도 사대적인 영향아래 중국종의 양식에 크게 영향받게 되고 범종 자체의 형태로 형식되여지는 반면 고유한 전통수법은 소멸되여지는 가운데 불교적 영향과 살만적 신도의 행사등이 깊게 침윤케 되여 보다 타락되고 형식화된 장식방법으로 전락되고 전통적인 신라범종의 형태와 양식이 조선왕조 때 특히 1592년 이후에는 단절되고 만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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