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단일민족국가의 필리핀계 국회의원

korman 2012. 4. 18. 18:16

 

 

단일민족국가의 필리핀계 국회의원

 

 

 

2년 전쯤 여름의 지하철이었을까. 멋쟁이 노인들이 여름에 잘 쓰시는 하얀 중절모에 시원한 삼베옷을 차려입으시고 지팡이에 의지할 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 지팡이까지 갖추신 노인 한 분이 내 옆자리에 앉으시더니 말을 걸어오셨다. 일반적으로 노인들이 말을 걸어올 때면 어디까지 가느냐로 시작하여 당신 자식들 이야기 및 주변 이야기를 주로 하시는 편인데 그 날 그 멋쟁이 노인은 처음부터 말을 걸러오는 주제가 달랐다. 어디서 강연을 듣고 오시던 길이었는지 아니면 책을 읽다가 오셨는지 노인의 주제는, 그냥 노인의 일방적인 연설이었지만, 우리나라와 단일민족 및 백의민족에 대한 자긍심에 관한 것이었다. 여러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내게는 대꾸할 틈도 주지 않던 노인께서 결론에 도달하였는지 우리와 같은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세상에 없음을 강조하시더니 느닷없이 어찌 생각 하냐고 물으셨다. 갑작스런 물음에 좀 당황이 되었지만 난 그저 우리나라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할 때 우리가 정말로 순수하게 단일민족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그 노인은 지팡이를 들어 나를 칠 것 같은 기세로 화를 내셨다. 난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 내가 내릴 정거장이 아닌데도 차가 정차하자 얼른 자리를 떴다.

 

요새 신문과 방송에 연일 오르내리는 기사가 있다.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한 필리핀계 한국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필리핀 국적으로 한국에 시집을 왔으나 이제는 우리 국적을 취득하여 대한민국 국민이 된지 15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에게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참정권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국회의원이 된 이후로 인터넷 상에 온갖 악의적인 헛소문과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난무하고 심지어는 나꼼수의 그분께서 하셨다는 욕설보다도 더한 욕설들이 SNS를 통하여 퍼져나가고 있어 그녀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그녀가 필리핀계가 아니고 만일 선진국 백인계였다 해도 이런 상황이 일어나고 있을까. 지금 우리나라 관광공사 사장은 귀화한 백인계 남성이다. 그러나 그가 사장으로 임명될 때 지금과 같은 현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럼 그녀가 지금 국회의원이 된 당이 아니라 그 반대당에서 되었다면 어땠을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냥 우리가 단일민족이기 때문에?

 

최근 어느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들은 모두 경쟁자에 비하여 좋은 점수를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시청자 투표에서 밀려 다음 라운드로 올라가지 못한 흑인혼혈인이 있었다. 내가 듣기로도 그녀의 노래 실력은 경쟁자 보다 좋은 것 같았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다. 심사가 끝난 후 심사위원 중 한사람이 풍토를 개탄한다는 말을 남겼다. 캐나다에서 왔다는 백인 혼혈 남성은 일지감치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 팬이 많아 지금 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다음 라운드에 오르지 못한 그녀 또한 앞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릴까? 이런 풍토가 계속된다면 그녀의 노래 실력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선다. 혼혈아에 대하여 지금보다 더 차별이 심하였던 시절 인순이라는 흑인 혼혈인이 가수로 데뷔하였을 때도 이런 현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때는 인터넷이나 SNS이라는 매체가 없어서 그랬을까?

 

우리나라에 외국인들이 많듯이 우리나라 사람들도 세계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그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까지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자세한 내막을 접하지 못하니 그 사회에서 그들도 우리나라에서 필리핀계 국회의원 당선자가 당하는 아픔을 겪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다민족 국가들의 국민들이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국가의 국민에게 우리처럼 야유와 질시와 욕설을 보낸다면 그 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그러하듯 필리핀에서는 자국 출신이 한국의 국회의원이 된데 대하여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그 한사람의 활약으로 우리나라와 필리핀은 더욱 가까워 질 수 있고 필리핀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위도 한층 좋아 지리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 사람이 부도덕하거나 범죄와 연루되어 부정적인 이미지를 남기는 일은 늘 일어나고 있다. 이런 문제는 몇 년 전 또는 며칠 전 미국 교포들이 저지른 총기 난사사건, 미국, 캐나다 및 호주 등지에서의 성매매사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도 남의 나라에서 많은 부정적 이미지를 남긴 사례는 얼마든지 있으며 또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 안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지르는 부정적 행동은 더할 나위 없이 많이 벌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가 없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에 우리가 우리나라사람 모두에게 부정적이지 않듯이 토막살인을 저지른 조선족이 있다하여 국내에 거주하는 조선족 모두에게 혹은 외국계 모두에게 부정적이어서는 안 되며 그녀도 우리 국민이거늘 필리핀계라 하여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농촌에는 대부분의 며느리들이 동남아에서 온 사람들이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외국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도 같은 민족이 우리나라를 형성하고 있다는 개념을 버려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계 사람들이 100만이 넘는다고 한다. 진정으로 우리가 세계화가 되기 위해서는 이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데 공감을 하고 일부 국민들이기는 하지만 얼굴이 안 보인다고 해서 인터넷이나 SNS에 근거 없이 아니면 말고 식으로 하는 무책임한 마녀사냥놀이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일부가 다수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나라의 이미지를 추락시킬 수 있음을 인지하여야 한다. 문득 며칠 전 인터넷 라인을 점검하던 서비스맨의 의미 있는 말이 떠오른다.

 

"SNS 좋죠. 그런데 좋은 것을 만들면 좋은데 먼저 쓰이는 것이 아니라 나쁜데 먼저 쓰인다는데 문제가 있죠."

 

 

2012년 4월 열 여드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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