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달력 뒷장에 대한 미련
새해 들어서 떼어놓은 작년 달력들을 오늘 재활용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새 달력에도 현 12월이 한 장 더 붙어있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 경우 12월 하순이 되면 헌 달력은 거두고 새것을 건다. 나도 그리 하였으니 헌것을 거둔지 한 20여일 지났다. 오늘 1월의 상순이 다 가고 있는 늦은 시점에 헌 것을 버린 이유는 12월에는 해도 바뀌지 않았는데 어찌 그 해의 달력을 버릴까 하는 생각이었고 해가 바뀌고 난 후에는 늘 어릴 때 생각이 나서 얼른 버리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헌 달력을 늦게 버리는 내 모양새는 매해 반복되고 있다. 걷어서 바로 버리면 될 것을 그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요새는 12달 달력이라도 달마다의 낱장이 스프링 식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 1년이 다 지나도 12달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아직 그런 것이 가끔 보이기는 하지만 예전 달력들은 거의가 철판을 압축하여 12달을 물렸으므로 달이 지나면 한 장씩 뜯어내야 했었다. 지금은 열두 달 달력도 귀한 몸이 되었지만 매일 한 장씩 뜯어내는 일력은 안 만드는 모양이다. 일력을 언제 보았는지 기억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12달 달력도 그랬지만 특히 지나간 일력은 매일 귀한 몸이 되곤 하였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겠지만 비어있는 종이를 보면 참 반가웠다. 그 시절, 물론 앞뒤가 다 인쇄된 6장짜리 달력도 있었지만, 하얀 뒷면이 그대로 비어있는 뜯어낸 달력은 소용이 많았다. 한글 연습장도 되고 낙서장은 물론 그림 연습하는 스케치북도 되었다. 그리고 최후로는 당시 최고의 인기 놀이였던 딱지로 변하였다. 그리고 매일 낱장을 뜯어내는 일력은 붓글씨 쓰는 종이처럼 부드러웠으므로 가게에서는 포장지로 쓰이고 또 다른 아침의 중요한 용도로도 쓰였다.
뜯어낸 달력 뒷장을 아꼈던 것은 내가 내 아이들을 키울 때도 계속되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아이들의 할머니가 손주들과 놀면서 내미는 달력 뒷장은 색연필을 가지고 이리저리 그림을 그린다고 그어대던 아이들의 훌륭한 놀이터였다. 이런 추억 때문에 지금도 새해의 달력을 걸어놓고도 한동안 헌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내 손주들이 아주 어렸을 때는 나도 그 달력 뒷장을 내밀었었다. 그러나 모든 학용품이 풍성한 요즈음이라 좀 자라더니 어린이집이나 TV에서 보고 배운 대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스케치북을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공책을 찾았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니니, 아니 학교를 다닌다 하더라도, 그 나이에 집에서는 달력 뒷장이 더 자유로울 수도 있을 텐데 벌써 격식이 아이들을 지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요즈음은 방마다 달력을 거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저 눈에 잘 뜨이는 곳에 하나쯤 있을까? 그리고 탁상달력 하나? 그러니 버릴 달력도 별로 없고 달력 뒷장도 많이 생기지 않는다. 오늘 내가 버린 달력은 보통 달력 사이즈 하나 그리고 그 반만한 것 하나였다. 탁상 달력은 버리지 않았다. 탁상 달력을 세워 놓는 종이스탠드는 딱딱하고 두꺼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집안 어딘가에 받침이 필요할 때 오려서 쓰면 좋고 달력 종이는 질이 좀 좋고 사이즈가 작아서, 사내 녀석이라 지금 한창 딱지에 재미 들려 종이만 보이면 접어달라고 조르는 외손자에게 딱지 접어주기에 좋은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 딱지를 따는 편이었는지 잃는 편이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지금 당구를 치나 고스톱을 치나 내주머니 손 들어가는 비율이 높으니 딱지라고 별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나저나 이 녀석 할아비에게 딱지치기 하자고 조르면 추운데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방안에서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아랫집에서 소음 일으킨다고 올라올까 적정이 된다. 외손자는 설 때 온다고 하니 탁상 달력 뜯어서 딱지나 접어놓아야겠다. 그러나 딱지접이가 가물가물하니 또 인터넷의 도움이 필요한 딱한 처지가 되었다.
투명 비닐에 담겨있는 달력의 뒷면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2017년 1월 8일
하늘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