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눈오는 날의 애착

korman 2017. 1. 21. 21:37




눈오는 날의 애착


눈이 내린다. 동요에서처럼 함박눈이 펄펄 내리고 있다. 건물 옥상들에는 엊그제 밤에 내린 눈의 잔설이 남아 있는데 그 위에 내려앉고 있다. 늦은 오전에 조금씩 송이송이 날리기 시작하더니 점심시간을 넘긴 오후시간 지금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은 짙은 안개에 싸인 듯 눈에 묻혀가고 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부침개에 막걸리 생각이 나지만 이처럼 함박눈에 하얀색으로 변해가는 창밖 세상을 보면 한 잔 커피 생각이 난다. 비가 오는 날에는 조금은 무겁게 느껴지는 저음의 첼로음악이 듣고 싶지만 눈이 오는 날에는 건반이 강하게 두드려지지 않은 조용한 피아노곡을 듣고 싶다. 비오는 날에는 술친구가 먼저 생각나지만 눈이 오는 날에는 할머니께서 구워주시던 화롯불의 고구마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커피잔을 들고 눈 내리는 창밖을 보다 문득 내가 소유한 물건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과 애착이 느껴지는 것들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비록 오래된 것이 아니더라도, 애착이 가는 물건들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골동품을 수집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집안에서 대물림되는 물건이 있지 않은 한 오래된 것이라고 내놓을 만한 물건이 없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새것에 더 애착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으니 아끼는 것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도 몹시 애착 가는 물건이 몇 개 있다. 버린 물건 중에서도 LP판엔 늘 미련이 있지만 눈앞에 없으니 잊어야 하겠고, 얼굴만 돌리면 늘 보이는 곳에 조금은 투박한 가죽 허리띠가 있다. 내 허리 굵기의 변천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 벨트는 내가 청바지 같은 것을 입기 시작한 고등학교 1학년 때 형님이 가죽장갑과 함께 선물로 주신 것이다. 물론 가죽장갑도 아직 간직하도 있다. 그리고 50년, 벨트에는 버클 고리 구멍이 5개가 있는데 몇 년에 한 번씩 동그란 버클 자국을 내면서 앞으로 나가더니 지금은 맨 앞 첫 번째 구멍에 고리를 끼워야 한다. 아끼는 것이니 지금도 가끔 사용하지만 요새 것들 보다 훨씬 무거운 버클이 달려있어 옷걸이에 걸어두는 때가 많다. 물론 가죽장갑도 가끔 껴보기는 하지만 추운 날이라도 서랍에 넣어두는 때가 많다. 가죽이 아니라도 요새 값싸게 살 수 있는 장갑이 더 가볍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가 있다. 대학 1학년, 내가 등산을 하기 시작할 때 작은누나가 손으로 짜준 베레모가 있다. 그 하늘색 베레모엔 내 등산의 역사가 고스라니 담겨있다.


수집하는 종을 넣어 놓은 장식장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종들이 출장 중에 혹은 여행을 다니면서 나 자신이 마련한 것들이지만 몇몇은 친구나 자식들이 해외에 다녀오면서 선물로 가져다 준 것들도 있다. 종을 모으기 시작한 때가 1990년도쯤 되니 오래 되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그 중에 선물 받은 두 개는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감정을 받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나는 내가 종을 모으기 시작할 때 뉴질랜드에 사는 친구가 동네 개러지세일에서 어떤 할머니로부터 샀다고 가져다 준 코끼리 손잡이가 달린 종이다. 종의 추가 제 것이 아닌 게 아쉽기는 하지만 당시 80세를 넘긴 할머니가 파셨다고 하는데 언뜻 보아도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출장 중에 만났던 미국 노인 한 분이 LA에서 다시 만나자 반갑다며 인도종 하나를 선물로 주었는데 인도 골동품 가게에서 샀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 두 개는 언제 적 종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가까이 살기는 하지만 눈이 많이 쌓이고 있어 찻길이 힘들 것 같아 점심을 같이한 아들내외와 할머니곁에 더 있겠다는 손주녀석들을 등 떠밀어 보내는데 올해 학교에 들어가는 큰손녀가 눈 오면 자기는 작년에 할머니가 구워주신 고구마와 따뜻한 모과차가 제일 생각난다고 하였다. 요즈음은 시장에 고구마가 널렸고 화롯불이 아니라 전용냄비에다 고구마 넣고 가스불에 얹으면 군고구마가 탄생하는 세월이니 고구마 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녀석도 나처럼 눈 오는 날에는 할머니의 군고구마가 어른이 되어서도 지금처럼 기억의 맨 앞줄에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요녀석들이 지금 내 생활의 비타민이 되어주고 있으니 벨트나 장갑을 아끼는 마음은 요녀석들 뒤로 미루어야 하겠다.


동쪽하늘에 구름이 걷히며 눈발이 줄어들고 있다. 이미 많이 내렸지만 벌써 그치나 하는 서운함이 있다. 이 마음도 눈에 대한 애착에서 오는 건지 이 나이에도 그런 생각이 든다.


2017년 1월 21일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