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설 속풀이

korman 2017. 1. 30. 16:00




설 속풀이


땅거미가 드리워진 시각, 거리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불빛이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평소 같으면 거리를 비추는 각종 빛으로 어두움의 그림자가 얼른 살아지겠지만 그러나 오늘저녁의 어두움은 내일 새벽 여명이 올 때 까지 그리 살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 고향을 찾아 남쪽으로 간 차들이 많아 차량 불빛도 줄었거니와 설 연휴에 가게 간판의 불을 아주 꺼버린 업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가로등은 여전하건만 움직임 없이 평소보다 짙어지는 어두움에 거리가 낯설어지는 느낌이다.


어제 각자 흩어져 갈 곳을 찾았던 아이들이 오늘 점심에 모두 모였다. 큰댁에 모여 차례를 지내고 차례음식을 들며 오전시간을 같이 한 아들내외와 손주들은 점심 후 외갓집으로 보내고 시댁에서 차례를 모셔야 할 딸네는 그곳이 우선이니 그곳 차례를 모셔야 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리고 오늘도 휴일이니 오늘은 내 집으로 점심에 모두 모였다. 오늘이 법정공휴일이면서 일요일이 겹치니 내일도 법에서 정한 대체휴일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공무원과 은행원에게는 보장이 되건만 법으로 정했다 해서 아직 일반 회사에까지 강제할 수 없으니 사위는 출근을 해야 한다고 하여 편한 저녁보다는 점심에 모이게 된 것이다. 셋이 앉아 낮 소주 여러 병을 비우는 동안 저녁으로 기우는 시각에도 진눈깨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이 아비와 한낮 거나하게 걸친 낭군들을 대신하여 며느리와 딸이 스페어 운전기사 노릇을 해야 하니 젖은 길 얼기 전에 모두 돌려보냈다. 물론 남은 건 포장하여 차에 실어주는 서비스까지 베풀며.


어제와 오늘 모두 기름진 음식이었으니 한 잔 걸쳤어도 느끼한 속은 꺼지지 않는다. 오후 시간 바닥에 앉아 술잔을 기울여 더부룩한 속에 각종 전의 기름 냄새까지 배어 있으니 아이들을 보내 놓고 일어서나 앉으나 걸으나 서나 편하지가 않다. 이럴 때 내가 속을 달래기 위하여 취하는 것은 우선 냉커피를 한 잔 마시고 다음 끼니를 굶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다음끼니에도 속이 말끔히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산책으로 배를 좀 꺼트리며 술을 깨고 한숨 자고나면 개운해 지기도 하지만 가끔은 후유증이 한나절을 넘어 다음날로 이어질 때도 있다. 이럴 때 많은 사람들이 찜질방이나 사우나를 찾는다. 땀을 내고 바람 쏘이면 개운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찜통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 그리하지 못한다. 안경을 벗는다고 더듬는 건 아니지만 불편하니 쓰고 들어가야 하는데 수증기가 안경을 가려 오히려 더듬게 되고 열기가 안경알의 코팅을 벗겨 못쓰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 찜통을 피하는 편이다. 그래서 숙취의 후유증이 생기면 내 나름대로의 후유증 퇴치방법이 필요하다.


찬 탄산음료나 냉커피가 흐트러진 체세포를 불러 모으는데 얼마만큼의 효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잠깐 기분전환은 되는듯하다. 그렇다고 그게 기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니 찜통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은 해장국을 찾는다. 내가 즐기는 것은 주로 북어나 선지해장국이지만 기름진 음식을 곁들인 날에는 콩나물북어해장국이 제격이다. 좀 깔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집에서 만들기도 간단하다. 그러나 난 내 나름대로의 좀 더 간편한 해장국 레시피를 갖고 있다. 마누라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속이 확 풀리는 레시피, 라면 수프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맵다는 것과 얼큰하다는 것을 얼마나 구별할 수 있을까? 요새는 하도 매운 것을 즐기니 라면도 무지하게 매운 것이 많지만 그러나 해장국으로 적당한 것은 많이 매운 것 보다는 얼큰한 것을 골라야 한다. 그 조리는 매우 간단하고 원시적이다.


우선 라면 설명서에 쓰인 대로 물을 붓고 끓인다. 라면에서 수프만 꺼내 끓는 물에 넣는다. 양파는 수프를 달게 하기 때문에 넣지 않고 파만 조금 썰어 넣는다. 그리고 계란 한 알을 깨 넣고 휘휘 젖는다. 다음은 후후 불면서 입천장 데지 않게 요령껏 마시면 된다. 매운 것은 속을 쓰리게 하지만 얼큰한 것은 속을 데우고 땀이 나게 한다. 그러면 뭉쳤던 속이 풀린다. 수프에 뭘 넣고 싶지 않으면 계란을 빼도 좋고 더 좀 뭘 가미하고 싶어지면 김칫국물을 함께 끓이면 좋다. 수프는 고기수프보다는 해물수프가 더 좋다. 내 개인적인 방법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맘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난 그게 좋다. 그럼 수프가 빠진 라면은 어다다 쓰냐고? 각종 채소와 냉동 소세지와 깡통햄을 넣고 부대찌개를 끓이고 라면사리로 쓰면 된다. 그리고 그걸 안주삼아 다시 한잔.


그러는 동안에 또 내세상은 돌고 돈다.


2017년 1월 29일

하늘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