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대보름 귀밝이술 한 잔에

korman 2017. 2. 12. 16:32




대보름 귀밝이술 한 잔에


아홉 가지 나물을 먹고 나무 아홉 짐을 해야 한다는 대보름. 귀밝이술은 대보름날 아침에 맑은 청주 한 잔 마시는 거라 했는데 자식들의 일정에 맞추다 보니 저녁에 소주로 대신하게 되었다. 손주녀석들에게 대보름의 풍습을 전해야 하겠기로 물론 부럼으로 껍질 있는 땅콩과 호두를 준비하였다. 오곡밥은 나부터 싫어하니 생략하고 아홉 가지 나물도 가짓수를 줄였다. 대신 한 잔만 마신다는 귀밝이술은 한 잔이 한 병 되고 한 병이 두병 되고... 줄어든 나물 가짓수만큼 병수가 늘었다.


부럼을 사면서 잠시 망설였다. 이 걸 사가도 그저 재미로 하나나 둘은 까먹을지 몰라도 대부분이 남겨질 테고 내가 이걸 즐기는 것도 아닌데 꼭 사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시장엔 투명비닐봉지에 조금씩 넣어 하나씩 집어가기 쉽게 만들어 놓았다. 땅콩 한 봉지에 2,000원. 그걸 집어 들다 옆을 보니 같은 양에 4,000원이라 적힌 것이 보였다. "국산". 이 두 글자가 값을 두 배로 만들었다. 2,000원짜리 봉지에는 원산지가 없었다. 땅콩의 생긴 모양이 똑같으니 그게 국산인지 어찌 알까 생각하다 그냥 2천원 봉투를 집어 들었다. 땅콩그릇아래에 호두 봉투가 놓였다. 한 예닐곱 알 들었을까? 3,000원. 원산지는 없었다. 물론 수입산일테지 생각하며 땅콩만 사려니 좀 허전하여 그것도 한 봉지 집어 들었다. 차례상에도 온통 수입산이 놓이는데 하물며 부럼이야. 지구촌이라 하지 않는가. 이것도 국제화시대를 살아가는 한 방법 아니겠나?


비닐봉지는 열어보지도 않고 놔뒀다가 저녁상 차리기 전에 아이들에게 건넸다. 그런데 봉지를 열던 큰손주녀석이 하는 말, "할아버지 이거 호두 아닌가봐요". "왜?" 하면서 열려진 봉투 속을 보다 모두 큰 웃음을 지었다. 호두는 둥글다는 모두의 통념을 깬 모양이 그 봉투에 있었다. 삼각형모양. 어느 나라에서 수입된 것인지 그것은 뾰족하진 않아도 원뿔에 가까운 둥근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 하나 깨서 먹어보니 분명 호두는 맞는데 늘 등근모양만 대해 왔던 터라 그 삼각형 모양엔 얼른 적응이 되질 않았다. 작년에도 분명 수입산 호두를 샀었지만 그 모양은 우리의 그것과 같았는데 원산지가 다변화되니 호두의 모양새도 다변화되는 모양이었다. 그저 재미로 몇 개 깠을 뿐, 예상대로 봉투에는 사온 그대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모두 남겨져 있었다. 남은 나물과 볶은 고추장까지 좋다고 가져가는 자식들에게 이것도 가져가라 하고 봉지를 건네자 모두 손사래를 치며 나가버렸다.


남편들에게서 자동차키를 받아드는 며느리와 딸의 운전이 걱정되어 조심해 가라는 말로 배웅을 하고 하늘을 올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중천에는 그야말로 휘엉청 둥근달이 떴고 그 달빛으로 하여 하늘은 차라리 검은색으로 보였다. 문득 어렸을 때 보름을 지낸 생각이 슬라이드처럼 스쳐갔다. 연싸움을 하겠다고 연줄에 유리가루를 묻히던 일, 쥐불놀이 하겠다고 깡통 옆에 구멍 뚫던 일 등등. 깡통에 불 넣어 돌리다 불똥이 나일론 옷에 튀어 구멍이 나는 바람에 나일론 옷 하나가 귀하던 시절 어른들에게 무척 꾸지람을 들었었는데 도시의 내 손주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제는 시골에서 조차 산불의 위험 때문에 쥐불놀이 같은 것은 못하게 하고 있다하니 지금의 아이들은 내 나이쯤 되어 대보름에 무엇을 추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에 빠져든 아이들을 휘한 디지털 연날리기나 디지털 쥐불놀이는 없는지 모르겠다.


보름달 옆으로 별이 스쳐 지나갔다. 도시의 별은 늘 움직인다. 현란한 지상의 불빛 때문에 가장 밝은 금성조차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도시의 밤하늘이라는데 내가 사는 데서는 늘 하늘 높이 움직이는 별이 보인다.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불빛이다. 문득 보름달빛속을 지나가는 비행기는 실내조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바라보는 보름달에는 또 어떤 감흥이 있을까 궁급하기도 하다.


2017년 2월 11일 대보름날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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