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금석문 이해하기 - 아름다운 고려종의 모습과 명문

korman 2018. 3. 19. 14:42

금석문 이해하기 - 아름다운 고려종의 모습과 명문

 

 

[그림 1] 부안 내소사종 (1222년)

 
범종(梵鐘)이란 절에서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또는 의식을 행하고자 할 때 쓰이는 종을 말한다. 길게 울려 퍼지는 범종의 장엄하고도 청명한 소리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주며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참회토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나아가 이 범종의 소리를 들으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는 중생(衆生)들까지 다시 극락으로 구제받을 수 있다는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어 절에서는 일찍부터 가장 중요하게 사용된 불교의식법구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삼국시대의 불교 전래 이후부터 사용되었다고 생각되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통일신라 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종뿐이다. 
우리나라의 범종은 그 외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울림소리가 웅장하여 동양권의 종 가운데서 가장 으뜸으로 꼽힌다. 
 

그 바깥 모양은 마치 항아리를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이 위가 좁고 배 부분이 불룩하다가 다시 아래쪽인 종구(鐘口) 부분으로 가면서 점차 오므라든 모습이다. 종의 꼭대기 부분에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리고 입을 벌려 마치 종을 물어올리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을 용뉴(龍 )라 부르며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의 역할을 한 것이다. 용뉴의 목 뒷부분에는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볼 수 있는 대롱형태의 기다란 관이 부착되어 있는데, 이것을 용통(甬筒), 또는 음통(音筒), 음관(音管)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용통은 그 속이 비어 있고 많은 수의 범종이 이 음통 아래쪽에 작은 구멍을 내어 종의 몸체 안쪽으로 뚫리도록 한 점으로 미루어 종을 쳤을 때 울림소리에 어떠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음향조절장치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음통 가운데 일부는 그 안이 막혀있거나 종소리에 큰 관계가 없는 작은 소종에까지 부착된 점으로 미루어 나중에는 용뉴와 함께 그 의미만이 강조되는 장식물로 변화되었음도 알 수 있다.

 

 
종의 몸체 윗부분과 종구 쪽의 아래 부분에는 같은 크기의 문양띠를 만들었다. 이것을 각각 상대(上帶)와 하대(下帶)라 부르며 이곳에는 당초문, 보상화문, 연화문 등의 식물문양을 장식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간혹 비천이나 번개무늬 같은 문양을 장식하기도 한다. 또한 상대 바로 아래 붙어 네 방향으로는 사다리꼴의 연곽대(蓮廓帶)를 만들어 이 연곽 안으로 3×3열로 배열된 9개씩의 돌기 장식이 도합 36개가 배치되었다. 이 장식은 중국종이나 일본종과 달리 연꽃이 피어나기 직전의 봉오리 형태로 묘사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종을 치는 자리로서 별도로 마련된 원형의 당좌(撞座)가 종의 앞, 뒤면 두 곳에 돌출 장식되어 있다. 이 부분의 위치는 몸체의 약 1/4 정도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종의 외형상 가장 불룩하게 솟아오른 자리에 마련하였다. 이 당좌와 당좌 사이의 빈 공간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이나 비천상을 조각하는 것도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 2] 건통7년명종
 
 
이상과 같은 내용은 특히 통일신라의 범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설명한 것으로서 우리나라의 범종은 이러한 통일신라 범종 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각 시대마다 조금씩 변화를 이루게 된다.
 

 

 
한국 범종의 기본 형식인 통일신라의 범종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시대의 범종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새로운 고려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그 형태와 의장면에서 다양하게 변모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우선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불교가 국가의 보호 아래 크게 융성을 이루게 됨에 따라 사찰의 창건이나 중창과 같은 불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모든 불교공예품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의 범종의 제작이 크게 늘어남을 볼 수 있다.
 

[그림 2] 일본 승천사 소장 종(1065년)
 
한국 범종의 기본 형식인 통일신라의 범종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시대의 범종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새로운 고려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그 형태와 의장면에서 다양하게 변모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우선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불교가 국가의 보호 아래 크게 융성을 이루게 됨에 따라 사찰의 창건이나 중창과 같은 불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모든 불교공예품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의 범종의 제작이 크게 늘어남을 볼 수 있다.

종의 몸체는 그 외형이 직선화되거나 아래 부분인 종구(鐘口) 쪽으로 가면서 점차 밖으로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며 천판의 외연인 상대 위로 입상화문대(立狀花文帶)라는 돌출 장식이 새로이 첨가되기 시작한다. 이 입상화문대는 처음에 낮게 흔적만 보이다가 13세기 초 이후에 와서 점차 연화문이나 여의두문(如意頭文)을 장식한 꽃잎 형태로 돌출되어 상대와는 별도의 완전한 독립문양대로 자리 잡게 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입상화문대는 고려 범종의 제작시기를 구분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양식적 특징이 되고 있다.

용뉴는 통일신라 종에 비해 목이 가늘면서도 길어지고 점차 S자형의 굴곡을 이루면서 매우 복잡하게 표현된다. 특히 용의 머리가 종의 천판에서 떨어져 앞을 바라보게 되는데 이에 따라 용의 입안에 표현되던 여의주가 발 위나 음통 위에 장식되기도 하는 등 상당히 장식화되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려 종에서부터 옆의 목 뒤에는 마치 불꽃이나 뿔과 같은 기다란 장식이 첨가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음통에 얕게 부조로 표현되거나 간략히 장식되던 것이 점차 음통과는 별도로 기다랗게 돌출되어 화려하게 표현되는 경향을 띠운다.

 

 
또한 종의 몸체에는 고려 초기까지 몸을 옆으로 뉘인 채 나르는 듯한 비행 비천상(飛行飛天像)을 부조하지만 점차 연화좌 위에 앉은 불상이나 보살상(佛, 菩薩像)을 장식하거나 삼존상(三尊像)을 천개(天蓋)와 함께 표현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상대와 하대에도 당초문이나 보상화문 외에 국화문과 번개무늬〔雷文〕와 같은 기하학적 문양 등의 다양한 문양이 장식된다. 당좌는 본래의 종을 치는 자리로서의 고유한 기능보다 장식적인 의미가 강조되어 그 수가 4개로 늘어나거나 종의 크기에 비해 매우 작게 표현되는 것은 고려적인 새로운 변화이다.
 

 

 
고려 후기 종의 경우 연곽을 원형으로 처리한다든가 종신에 공작명왕상(孔雀明王像), 신장입상 등을 장식하기도 하며 안동(安東) 신세동(新世洞)에서 출토된 범종 의 경우처럼 당좌와 연곽의 표현이 생락되고 영락(瓔珞)만을 종신 전체에 장식한 독특한 예도 확인된다. 1222년에 만들어진 오어사종(吾魚寺鐘)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범자문은 계미명종(癸未銘鐘),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무술명종(戊戌銘鐘)과 같은 고려 후기 종을 지나 조선시대 범종으로까지 계승을 이루게 된다. 특히 13세기에 들어와 높이 40cm 내외의 작은 종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데, 이러한 종은 건물 내부에 걸려 소규모의 용도로 사용되거나 개인들의 기원의 용도로 활용된 것이라고 추정된다.
 

 

 
한편 13세기 전반 이후에는 명문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연호를 사용하는 데 있어 혼란을 가져온 듯 기년명(紀年銘) 대신 간지(干支)만을 새긴 예가 많아지게 된다. 그와 더불어 이 시기 이후부터 역량 있는 범종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결국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몽고와의 전란에 따른 정치?사회적 혼란과 연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14세기에 들어와 중국 장인의 힘을 빌어 제작하게 된 개성(開城)의 연복사종(演福寺鐘 : 1346년)을 통해 새로운 중국 종 양식이 우리나라에 유입됨으로서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 초기의 종은 통일신라 이래로 꾸준히 계승되었던 전통형(傳統形)보다는 중국 종의 양식이 반영되는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고려시대 종은 그 양은 전대에 비해 크게 늘어났으나 전반적으로 통일신라 종에 비해 주조기술이 거칠어지고 문양이 도식화(圖式化)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결국 대량생산에 따른 기술적 역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데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다.
 
 
각 시기별로 대표적인 고려 범종의 명문을 분석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명문의 첫머리에는 대체로 종의 제작시기를 연호와 날짜로 구분하여 월일까지 기록한다. 그 다음은 종이 사용되거나 만들어진 시납 사원명과 중량, 그리고 이 종 제작에 참여한 당시의 주지스님이나 동량승, 또한 별도의 시납자가 있을 경우 이를 자세히 기록한다. 
아울러 간혹 불교적 발원문과 함께 국가의 안녕과 평안, 왕실의 발원을 기원하거나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발원문이 첨가되기도 하여 당시의 혼란했던 시대적 상황이나 불교사적인 변화 등을 잘 반영해 준다. 그리고 범종의 말미에는 제작자로서 장인을 밝힌 예가 많아 고려 주금장 사회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림 2] 승천사종의 명문
 

 

 
일본 승천사(承天寺) 소장 계지사종(戒持寺鐘) 

維淸寧十一年乙三月日
                  巳
戒持寺金鍾鑄成入
重百五十斤 棟梁
寺主大師智觀
大匠 金水
副大匠保(?)只 未亭 

‘청녕 11년(1065)인 을사 삼월일에 계지사의 금종을 백오십근의 중량을 들여 완성하다. 당시의 동량인 절의 주인은 대사 지관이며 제작자는 대장 김수, 부대장 보지와 미정이다.’

포항 오어사(吾魚寺) 소장 종(鐘)

桐華寺都藍(監)重大師淳誠興同寺
重大師睛蓮道人僧英□與同發
誠願共□私貯兼集聚錫鑄成
金鍾壹口三百斤懸掛干吾魚
寺以此片善普願法界生亡共
增菩提者貞?四年丙子五月十九日
大匠 順光 造

‘동화사의 도감 중대사 순성과 같은 절 중대사 청련도인, 스님 영□ 이 함께 발원하여 대중들과 사저를 모아 주성한 금종 한 구로서 삼백근의 중량을 들여 오어사에 걸어 두어 작은 공덕과 법계의 생망이 함께 보리지원하기를 두루 기원한다. 정우 4년 병자년(1216) 5월 19일에 대장 순광이 만들다.’

 

 

 
※주제어
범종(梵鐘), 불교의식법구, 용뉴(龍 ), 용통(甬筒), 음통(音筒), 음관(音管), 당초문, 보상화문, 연화문, 연곽대(蓮廓帶), 당좌(撞座), 주악상, 비천상, 통일신라 범종 형태, 고려시대 범종, 입상화문대(立狀花文帶), 여의두문(如意頭文), 비행 비천상(飛行飛天像), 불상이나 보살상(佛, 菩薩像), 삼존상(三尊像), 국화문, 번개무늬〔雷文〕, 공작명왕상(孔雀明王像), 신장입상, 안동(安東) 신세동(新世洞) 출토 범종, 오어사종(吾魚寺鐘), 계미명종(癸未銘鐘),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무술명종(戊戌銘鐘), 조선시대 범종, 개성(開城) 연복사종(演福寺鐘 : 1346년), 일본 승천사(承天寺) 소장 계지사종(戒持寺鐘) 

 

출처 : 한국금석문종합정보시스템 2018년 3월 19일 현재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3&Num=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