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내 세상의 문패

korman 2018. 9. 18. 16:50




내 세상의 문패


추석이 다음 주로 다가왔다. 이번 금요일 오후부터는 고향 가시는 분들의 이동이 시작되겠지만 연휴가 꽤 길어 오가는 길이 예전처럼 막히지는 않을 듯싶다. 긴 연휴가 반가운 분들이 대다수겠지만 그 대다수의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희생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연휴 생각하지 않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애쓰는 분들의 노력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그만큼 처우되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일찍 천안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다. 그 곳에는 내 할머니도 계시고 작은 어머니·아버지도 계신다. 불행이도 북에 계시는 할아버지는 모시지 못하였다. 집안의 풍습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집은 원래 추석 당일 차례를 지내고 그 차례음식을 가지고 산소에 인사드리고 식구들이 다 같이 식사를 하였었다. 그런데 그게 오가는 길이 막힌다는 이유로 혹은 각자의 시간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집뿐만 아니라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석 당일이 아닌 더 이른 날 산소를 찾는, 일종의 시대 발전적 풍경이 생겼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추석 당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형제들이 날짜를 약속하고 모두들 한 날 한 시에 산소에서 모여 성묘하고 점심도 같이 먹고 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어려워졌다. 나이 많으신 내 윗분들은 무릎이 온전치 못하여 산소까지 기동이 힘든 분도 있고 자식들이 차로 모셔야 하는데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날짜를 일치시키기도 어렵고 식구가 늘어 차량이 더 필요한 경우도 있으므로 이제는 형제들이 각자 형편 닿는 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로 다니고 있다. 내 경우 손주들이 어렸을 때는 좀 불편하지만 차 한 대로 같이 데려갔지만 이제는 아이들이 크니 정원초과도 할 수 없고 뒷좌석 안전띠 매는법이 강화되어 한 대로는 안 되고 주말에 같이 가려면 한 대의 차량이 더 필요하여 손주들이 학교에 간 사이 평일에 큰아들내외와 집사람만 같이 다녀왔다.


산소에 갈 때마다 난 늘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들의 땅을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한다. 어머니를 모실 때는 산의 한쪽만이 묘원으로 조성 되었었는데 그 몇 년 후 아버지를 모셔다 어머니와 합장을 할 때는 이미 그 주위 산 전체가 모두 묘원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몇 년 후 할머니를 같은 묘원으로 이장을 할 때는 이산 저산이 온통 묘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과 할머니는 같은 묘원이라 하여도 산 하나가 떨어져 있다. 올해도 산소에 앉아 바라본 건너편 산이 이미 한쪽은 모두 묘원으로 조성되고 있었다. 나무는 베어지고 석축이 쌓여졌으며 나무가 있던 자리는 모두 봉분으로 바뀌었다.


내 형님은 산소에 가면 비어있는 할머니의 옆자리를 탐내 하시더니 언제 그곳에 드실지도 모르는데 결국 그 자리를 당신 것으로 만들었다. 작은 형은 비어있는 큰형님 옆자리가 탐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곳의 소유주가 되진 못하였다. 역술가라는 직업을 가진 많은 분들이 일이 잘 안 되어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조상을 모신자리가 불편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과연 그럴까? 난 늘 내 자식들에게 “살아서나 죽어서나 자기가 있는 자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자식을 못되게 하는 부모는 없다”와 “자기가 잘못되는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지 조상 탓은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형님들이 원하는 곳 한 뼘에도 미련을 두지 않는다.


이미 나는 오래전에 큰아이에게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이야기 해 두었다. “화장 후 일반 흙단지에 담아 나무 밑에 묻어라‘ 하였다. 사실 내가 제일 가고 싶은 곳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 산등성이의 하얀 등대아래에 있는 소나무 밑이다. 그곳은 서해의 최북단과 남녘의 바다를 시원하게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법이 허락지 않으니 적법한 곳을 택하되 나무를 현란하게 하지 말라고도 하였다. 그저 내가 써 주는 문패글 한 줄 걸어달라고만 하였다. 마누라는 화장을 안 좋아하더니 거기까지는 양보하였으나 나무밑에 가는 건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죽은 다음 내 몸뚱이가 어디로 가든 내가 알 리 없을 텐데 그 망설임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내 나무에 걸릴 문패에 이리 써라 일렀다.


“부모님 덕분에 세상에 나왔다

자식 덕에 문패 하나 걸고 가니

이 아니 행복이냐!“


2018년 9월 18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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