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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책과 이면지와 연습장

korman 2021. 5. 16. 14:04

공책과 이면지와 연습장

 

코로나 때문에 지난 1년간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손녀들이 학년이 바뀌니 전 학년에서 사용하던 공책을 바꿔야 한다고 다 쓰지도 않은, 사실 학교에도 안 갔으니 공책 쓸 일도 별로 없어 몇 장 끼적거리다 만 거였지만, 공책들을 모두 꺼내 쌓아 놓고는 필요한 만큼 새로 사들였다. 꺼내놓은 공책을 보며 “이것들은 이제 안 쓸거니?”하고 물었더니 학년이 바뀌었으니 새것을 써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할아버지가 가져다 메모지로 써도 되냐고 하였더니 그러라고 하였다. 집에 가져와 사용한 부분은 떼어내고 멀쩡한 부분은 모두 챙겨서 책꽂이 한 쪽 박스 속에 넣어 놓았다.

 

내 나이쯤 되는 분들이 국민(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학용품 업체에서 만든 공책이라는 게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 종이의 질이 낮았고 연필과 지우개도 그런 편이어서 글 쓰는 도중에 종이가 찢어질 때도 있었고 잘못 써서 지우려하면 더욱 그랬다. 모두가 경험한 일은 아니겠지만 내 경우는 그 당시 미군이 사용하고 버린, 한 쪽만 사용된 종이를 대할 기회가 있었다. 그 종이의 뒤편은 백지 상태였으므로 그것으로 공책을 만들어 쓰기도 하면서 그 종이의 질에 감탄을 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약 22년쯤 후 직장에서 286컴퓨터 도트프린터에 사용되던 그 종이를 다시 만나곤 초등학교의 추억에 젖기도 하였다. 그때서야 예전 주워 쓰던 그 종이가 컴퓨터프린트용지였다는 걸 처음 알았다.

 

종이가 귀하던 어릴 적 동네에서(당시에는 동네 마당에서 가끔 영화를 틀었다) 틀어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난한 작가가 겨울에 손이 시리어 손가락이 절반은 잘려나간 털실장갑을 끼고 이불로 등과 어깨를 덮고는 하얀 입김으로 손가락을 계속 불며 펜촉에 잉크를 찍어 원고지를 메우는 장면이 있었다. 참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작가는 원고지 처음 한 두 킨에 몇 자 끼적이다가는 다음 귀절이 생각 안 나는지 연신 원고지를 구겨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방바닥은 어느새 그렇게 구겨진 원고지로 가득 채워졌다. 난 그 장면을 보면서 어린마음에 공책도 잘 못 만드는 종이가 귀한 이때에 앞장을 버렸으면 뒷장에 쓰면 되지 뒷장이 멀쩡한 원고지를 아깝다 생각 안 하고 마구 버리다니 종이를 아낄 줄 모르는 가난한 사람이 어찌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였다.

 

TV에 비쳐지는 국회 본회당의 모습을 보면 의원 각자의 자리마다 컴퓨터모니터가 하나씩 놓여있다. 의원 모두에게 제공되는 공통된 자료만을 보기 위함은 아닐 테고 USB 같은 저장소에 담겨져 있는 각자의 자료도 열람할 수 있는 기능도 갖추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정감사 같은 것을 할 때 보면 모니터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많은 분들이 한 보따리씩 종이로 된 자료를 쌓아 놓고 있다. 그걸 모두 그 자리에서 들추어 보는지는 못할 텐데 왜 그렇게 높이 쌓아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비추어 지는 모습은 자료가 종이의 한 면에만 인쇄되어 있다는 것이다. 회기가 끝나면 민감한 사안이 있을 테니 이면지로도 사용되지 못하고 모두 폐기될 자료 같은데 아무리 물자가 풍부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개인저장장치를 사용하면 될 텐데 모니터를 옆에 끼고도 그렇게 종이서류뭉치를 쌓아놓고 있어야 하는지 그 종이자료를 프린트하는 분들의 시간과 노력 그리고 한 쪽만 사용되고 폐기될 종이가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할아비집에 와서 공부하던 녀석들이 영어 단어를 쓰고 수학식을 풀어볼 연습장을 찾았다. 그 날 자기들이 안 쓴다고 버린 공책을 할아비가 연습장으로 내어주자 겸연쩍게 웃으며 받아 들고는 공부하고 남은 연습장은 도로 가져가 집에서 사용하겠다고 하였다.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앞으로 많은 연습장이 필요할테니 사용하지 않은 공책이나 뒷면이 사용 가능한 프린트용지 등은 쉽게 버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자신들도 그런 게 필요하다고 느꼈으니 함부로 버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어려운 시절을 겪었음직한 나랏일 하시는 나이든 분들도 TV에 비쳐지는 모습에 아낄 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풍요로운 시대에 초등학교 손녀들이 종이까지 아끼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이 기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2021년 5월 16일

하늘빛

 

음악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FjHGZj2IjBk 링크
[Study Sleep Relax ?] Medi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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