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늦가을엔
며칠 전 내가 사는 도시를 비롯하여 곳곳에 첫눈이 내렸다고 한다. 물론 산간지방에야 당연히 내렸겠지만 난 아직 눈 내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내리긴 내렸는데 땅으로 내린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눈 깜빡할 정도의 시간에 뭔가 희끗한 가루가 눈에 뜨이지도 않을 정도로 하늘로 오르다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눈이 내리긴 내린 것이니 이 도시에도 이제 겨울이 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 주 초반에는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다. 아직 가을의 끝자락이겠거니 하고 있는데 그 비가 내리면 가로수 가지들도 남은 이파리들을 모두 털어낼 것 같다.
늦가을에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비에 젖은 무거운 몸 바람에 날아가지도 못하여 사람들의 발끝에 채이고 자동차 타이어에 뭉개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무엇이 가장 많이 생각날까 궁금해진다. 어떤 이는 그리운 사람이 있다고 할 테고 어떤 이는 기름 냄새 솔솔 풍기는 전에 막걸리잔이 그립다고도 할 테고 어떤 이는 갑자기 달콤한 초콜릿이 먹고 싶다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또 나처럼 커피 추출기에 평소보다는 더 많은 양의 원두커피를 넣는다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1년 365일 늘 큰 머그잔의 아메리카노를 즐기기는 하지만 항상 느껴지는 게 늦가을이면 내 커피의 농도가 평소보다 진해진다는 것이다. 아마도 비오는 늦가을에 진한 커피가 생각나는 것은 분위기 있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커피 잔을 들고 창문에 기대어 비오는 거리를 지나는 행인을 내려다 보다 우산위에 떨어진 젖은 낙엽 한 장이 우수를 부르기 때문이라고 건방을 떨어도 늦가을의 사람들은 이해해 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늦가을에 비가 내리면 한 겨울의 냉한 날씨보다 더 한기를 느낄 때가 있다. 아마도 젖은 한기에 우중충한 분위기가 더해져 쓸쓸한 기분마저 들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사실 그런 날씨에는 커피보다는 계란 노른자가 딱 떨어진 진하고 뜨거운 쌍화차 한 잔이 제일 잘 어울린다고 할 수도 있겠다. 지금의 분위기로 보면 별로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다방이라는 곳에서 한복 입은 마담이 손님 옆에 앉아 쌍화차 잔을 휘휘 저어주는 모습을 기억하는 세대는 어디까지일까? 40대 중반까지는 대상에 들어갈까 짐작해본다. 요새도 가끔 이면도로의 건물에 다방이라는 간판이 붙은 곳을 발견하기는 하지만 들어가 보지 않아 그런 마담과 그런 쌍화탕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커피를 즐겨 마시는 나도 쌀쌀한 날에 마시던 그 쌍화탕은 요새도 가끔 생각난다. 그런 때는 약국에서 사온 병에 든 ‘생강쌍화탕’을 전자레인지로 데우곤 한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 동안 방안에 군고구마 냄새가 퍼지고 있다. 집사람이 프라이팬을 이용하여 고구마를 굽고 있어 나는 냄새다. 해가 기울고 밖이 좀 을씨년스러운 모습에 이 고구마 냄새가 무척 정겹게 다가온다. 요새는 겨울이 되어도 수레에서 구워지는 군고구마를 보기 어렵다. 고구마 가격이 비싸 아이들의 겨울 군것질로는 잘 팔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기사를 작년에 본 듯하다.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저학년시절 추운 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는 늘 고구마를 화롯불에 묻어 놓으셨다가 주곤 하시었다. 내가 이제 그 당시 할머니 나이쯤 되었다. 집사람이 손주들 온다고 하면 가끔 이렇게 군고구마를 만들어 주곤 한다. 내 할머니의 화로를 가스불과 프라이팬이 대신하고는 있지만 손주들을 위하여 군고구마를 만들고 있는 집사람의 모습이 내 할머니를 닮았다. 하는 말까지 닮았다. “뜨거우니 후후 불면서 천천히 먹어라. 입천장 데인다.”
아직 낙엽위에 서리가 내린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 서리는 해가 뜨면 곧 살아지니 웬만큼 서둘지 않으면 보기 힘들지만 아무튼 비오는 늦가을에 진해지는 커피에 앞서 내가 진한 아메리카노 커피 맛이 제일 좋다고 강조하는 시기는 낙엽위에 서리가 내린 이른 아침이다. 군고구마를 먹으며 커피를 내렸다. 할머니 생각이 들어가서 그런지 군고구마에 섞여진 커피 맛이 서리 내린 아침의 맛과 같았다. 지금 내린 커피는 아라비카가 아니라 로부스타종이다. 내가 아라비카종보다 로부스타를 더 좋아하지는 않지만 가끔 로부스타를 좀 진하게 하면 군고구마를 태운 구수한 맛이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군고구마에 로부스타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물론 개인의 취향에 따라 커피에 대한 느낌이 다르니 군고구마 먹을 때 추천할 생각은 없다.
생각해보니 비오는 늦가을에 진한 커피가 생각나는 것처럼 이야기는 하였으되 실은 은연중에 커피보다는 쌍화차, 또 그 보다는 군고구마와 할머니가 그리웠는지도 모르겠다.
2021년 11월 28일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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