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신라의 종

경주박물관 소장 봉덕사 성덕대왕 신종 (국보 제29호) (에밀레종)

korman 2006. 9. 22. 18:00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③ 성덕대왕신종

 

세속의 번뇌망상 잊게 해주는 천상의 소리

 

우리나라 범종 중 가장 긴 여운

사람이 듣기 가장 편한 주파수

예로부터 에밀레종 별칭 ‘유명’

성덕대왕 왕생극락 ‘염원’ 담아

지금도 타종 가능한 신라 범종

8세기 통일신라 불교 조각 반영

◀ ①통일신라 불교 조각의 진수를 간직한 성덕대왕 신종. 
    국보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의 범종은 그 소리가 웅장하면서 긴 여운을 특징으로 한다. 마치 맥박이 뛰는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러한 범종의 긴 공명을 우리는 맥놀이 현상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성덕대왕 신종은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긴 여운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맑고 웅장한 소리를 지니고 있어 누구라도 이 종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세속의 번뇌와 망상을 잊게 해 주는 오묘한 천상의 소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성덕대왕 신종이 지니는 공명대가 사람이 듣기 가장 편한 주파수에서 소리를 내기 때문이라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처럼 소리와 형태의 아름다움에서 단연 우리나라 종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국보 29호 성덕대왕 신종은 꽤 오랫동안이나 그 어엿한 본명을 나두고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이 종에는 종의 몸체에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원래는 경주 봉덕사란 절에 걸려 있던 종임을 알 수 있다. 상원사 종보다 약 반세기 뒤인 771년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큰 크기인 동시에 현재까지 유일하게 손상 없이 그 형태를 유지해 온 아직까지 타종이 가능한 신라 종이기도 하다. 

원래의 종이 있던 봉덕사는 폐사되어 그 위치가 분명치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경주 북천(北川) 남쪽의 남천리에 있던 성덕왕의 원찰(願刹)이었다. 성덕왕이 증조부인 무열왕(武烈王)을 위해 창건하려다 아들인 효성왕(孝成王)에 의해 738년에 완공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景德王)이 이 절에 달고자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지나도록 이루지 못하고 결국 혜공왕대(慧恭王代)인 대력(大曆) 6년(771) 12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되어 성덕대왕의 신성스러운 종(聖德大王 神鍾)으로 이름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걸려있던 봉덕사종은 절이 폐사된 이후 여러 번에 걸쳐 그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권 2에는 북천이 범람하여 절이 없어졌으므로 조선 세조 5년(1460)에 영묘사(靈廟寺)로 종을 옮겨 달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후 중종 원년(1506)에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이던 예춘년(芮椿年)이 경주 읍성의 남문 밖 봉황대(鳳凰臺)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겨 달아 군인을 징발할 때나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慶州古蹟保存會)가 경주 부윤의 동헌(東軒)을 수리하면서 동부동 옛 박물관 자리에 진열관을 열게 되었고 이때 첫 사업으로 봉황대 아래에 있었던 성덕대왕 신종도 옮겨 가게 되었다. <고적도보해설집(古蹟圖報解說集)>에는 이 때를 1916년이라 하였으나 국립박물관의 유물대장에 의하면 1915년으로 되어 있으므로 1915년 8월에 동부동 옛 박물관으로 옮겨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오랜 기간 구 박물관에 걸려 있다가 1975년 5월27일에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 ②성덕대왕신종 용뉴.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              을 붙이고 있는 모습이다.

 

신종의 세부 형태를 살펴보면 몸체의 상부 용 뉴(龍)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있으며 목 뒤로는 굵은 음통(音 筒)이 부착되어 있는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 적인 모습을 따르고 있다. 앞, 뒤의 발을 서로 반대로 뻗어 힘차게 천판을 딛고 있는 용의 얼 굴은 앞 입술이 앞으로 들려 있으며 부릅뜬 눈과 날카로운 이빨, 정교한 비늘까지 세세히 묘사되어 역동감이 넘친다.

 

머리 위로는 상원사종에서 볼 수 있는 두 개의 뿔이 솟아있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이 부분은 남아있지 않다. 용의 목 뒤에 붙은 굵은 음통에는 대나무처럼 중간에 띠를 둘러 4단의 마디로 나누었는데, 각 단에는 연판 중앙에 있는 꽃문양을 중심으로 위, 아래로 붙은 앙복련의 연판을 동일하게 부조하였다. 그리고 음통의 하단과 용뉴의 양 다리 주위에는 음통의 연판과 동일한 형식의 연꽃 문양을 둥글게 돌아가며 장식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처럼 잘 보이지 않는 종의 천판 부분에까지 섬세하게 문양을 새기고 있는 것은 이 종이 세부까지 얼마나 세심한 정성을 기울여 제작하였는가를 짐작케 한다.

 

천판의 용뉴 주위를 둥글게 돌아가며 주물의 접합선을 볼 수 있으며 여러 군데에 쇳물을 주입하였던 주입구의 흔적도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종의 몸체 중앙부를 돌아가며 희미하게 주물선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성덕대왕 신종이 용뉴 부분의 천판까지를 한틀, 그리고 워낙 종이 크다보니 하나의 틀로 몸체 전체를 제작하기 어려워 몸체를 반으로 나누어 접합한 뒤 주물을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흔적이 남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범종은 중국 종이나 일본 종과 달리 섬세한 용뉴 조각과 문양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사형주물법이 아니 밀랍주조법을 사용하였다. 당시에 성덕대왕 신종과 같은 거대한 종을 만들면서 동원된 밀납의 양은 엄청났을 것이어서 이 종이 당시로서도 국가적인 사업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적 작품이란 것을 잘 말해준다.

 

종의 몸체 상대(上帶)에는 아래 단에만 연주문이 장식되었고 대 안으로 넓은 잎의 모란당초문을 매우 유려하게 부조하였다. 상대에 붙은 연곽대(蓮廓帶)에도 역시 동일한 모란당초문을 새겼다.

 

한편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우리(蓮)는 상원사종(725)과 같은 돌출된 일반적인 통일신라 종과 달리 연밥(蓮顆)이 장식된 둥근 자방(子房) 밖으로 이중으로 된 8잎의 연판이 새겨진 납작한 연꽃 모습으로만 표현된 점이 독특하다. 대부분의 신라 종이 돌출된 모습의 연뢰를 지닌 점과 달리 이러한 납작한 모습으로 장식된 종은 이후 8세기 후반의 일본 운주우지(雲樹寺) 종이나 일본 죠구진자(尙宮神社) 소장 연지사(蓮池寺) 종(833)에도 계승을 이루며 나타난다. 성덕대왕 신종은 이 뿐만 아니라 주악천인상과 종구(鐘口)의 모습 등이 다른 종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즉 종신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병향로(柄香爐)를 받쳐 든 모습의 공양상이 앞, 뒷면에 조각되어 있는 점이다.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성덕대왕의 왕생극락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비천상 대신 공양자상을 새겼다고 볼 수 있다.

 

◀③성덕대왕신종 음통. 

 

공양자상은 연꽃으로 된 방석 위에 두 무릎을 꿇은(座) 자세로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두 손으로 가슴 앞에서 향로의 손잡이를 받쳐 든 모습이다. 머리카락(寶髮)은 위로 묶은 듯 하 며 벗은 상체의 겨드랑이 사이로 천의가 휘감 겨져 있고 배 앞으로 군의(裙衣)의 매듭이 보 인다. 연화좌의 방석 아래로 이어진 모란당초 문은 공양자상의 하단과 후면을 감싸며 구름무늬처럼 흩날리며 장식되었고 머리 위로는 여러 단의 천의 자락과 두 줄의 영락이 비스듬히 솟구쳐 하늘로 뻗어 있다. 공양자상이 들고 있는 향로는 받침 부분을 연판으로 만들고 잘록한 기둥 옆으로는 긴 손잡이가 뻗어있으며 이 기둥 위로 활짝 핀 연꽃 모습의 몸체로 구성된 모습이다.

 

최근 마모된 공양자상과 병향로의 모습을 복원해 본 결과 비슷한 시기의 중국 석굴이나 일본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향로와 향합(香盒)을 양손에 각각 나누어 들고 있다는 점이 새롭게 확인되어 근래 제작된 신라대종에 그대로 재현하기도 하였다. 성덕대왕 신종의 공양자상은 비록 얼굴 모습이 많이 마모되어 세부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세련된 자세와 유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천의, 모란당초문의 표현은 통일신라 8세기 전성기 불교 조각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우리나라 범종 부조상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꼽힌다.

 

[불교신문3276호/2016년2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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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과 
    종각.

 

지옥서 고통받는 중생 제도하겠다는 자   비심 상징
 신라 사회의 정치와 사회 
 교리 아는 중요한 금석문
 어린아이 인신공양 설화
 종교폄훼 의도 가진 낭설

 

성덕대왕신종의 공양자상은 그 배치에    있어서도 독특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종신의 앞, 뒷면에 새겨진 양각 명문을   중심으로 그 좌우로 2구씩 마치 명문을   향해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으로 4구의 공양자상을 배치하고 있는 점도 이 종의 중심이 다른 종과 달리 기록된 명문임을 시사해 준다. 아울러 종구 부분을 8번의 유연한 굴곡(八稜形)을 이루도록 변화를 준 점도 다른 종에서 볼 수 없는 양식적 특징이다. 

이에 따라 그 위에 장식되는 하대 부분도 8릉의 굴곡을 이루게 되고 굴곡을 이루는 골마다 마치 당좌의 모습과 같은 원형의 연화문을 8곳에 새겼으며 그 사이를 유려한 모습의 굴곡진 연화 당초문으로 연결시켜 한층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당좌는 그 주위를 원형 테두리 없이 8엽으로 구성된 보상화문으로 장식   하였는데, 타종으로 인해 문양이 많이 마모되었다. 

 

◀ ②성덕대왕신종 명문과 공양좌상 배치.

 

종신 앞, 뒷면의 가장 중심 공간에 배치된 양각의 명문   은 앞과 뒤의 내용을 구분하여 ‘서(序)’와 ‘명(銘)’을 배   치하였는데 1000여자에 이르는 장문으로 당시 신라 사   회의 정치 상황. 불교 교리 및 사회 제반 사항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기도 하다. 

서문의 내용은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단락은 신종을 높이 달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였다는 내용으로서 종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불교의 내용을 들어 역설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원음(圓音)이란 바로 부처의 설법을 원음(圓音), 일음(一音), 다음(多音) 등으로 구별해서 보는 것이다. 이 가운데 <화엄경>이나 <법화경>에서는 일승(一乘)을 설하실 때의 설법음을 바로 원음(圓音)이라 한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이 내용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회통(會通)하는 부처의 설법을 신종의 소리를 통해 깨닫게 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점에서 자못 의미 깊다. 

둘째 단락은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고 그러한 공덕을 종에 담아서 그 공덕을 영원히 기릴 뿐만 아니라, 종소리와 더불어 나라가 평안하고 민중들이 복락을 누리기를 바라는 발원을 담았다. 

셋째 단락은 그러한 국가적인 큰 주조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성덕왕 아들인 경덕왕의 효성과 덕을 찬양한 부분이다. 넷째 단락은 결국 종의 주조를 다 마치지 못하고 경덕왕이 돌아가자 그 아들인 혜공왕이 이 사업을 이어서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혜공왕의 효성과 덕망의 소치라고 찬양한 부분이다. 

다섯째 단락은 종이 완성되자 이에 대한 감격과 신비로움, 그리고 종을 치는 목적과 의미를 서술하여 ‘모양을 보는 자는 모두 신기하다 칭찬하고 소리를 듣는 이는 복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 마지막 단락이야말로 극락세계는 물론이고 지옥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신종을 치고자 한 가장 궁극적인 조성 목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대쪽의 명은 서문의 내용을 근간으로 하여 4자구(四字句)로 시적(詩的)인 맛을 살려 찬양과 발원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당시에 이 글을 지은 사람은 한림랑(翰林朗) 급찬이었던 김필오(金弼奧)이며 종 제작에 참여한 많은 인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인 대나마(大奈麻) 박종익(朴從鎰)과 차박사(次博士) 박빈나, 박한미, 박부악(朴賓奈, 朴韓味, 朴負岳) 등이다. 여기에 기록된 고위 관직의 인물들은 당시에 이 종이 국가적인 대역사로 이루어진 점을 잘 말해준다. 여기에 당시로서도 엄청난 양에 해당되는 구리 12만근이 소요된 점을 밝히고 있는데, 실제 달아본 종의 무게만도 18.9톤에 달했다. 

 

한편 이 종에 얽힌 에밀레종의 설화는 종을 만들 때    시주를 모으는 일반적인 모연(募緣) 설화와 달리 인신   공양(人身供養)의 내용인 점에 주목된다. 어린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함으로써 종소리가 어미를 부르는 것    같다는 다소 애절하기까지 한 설화의 내면에는 성덕대   왕 신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와 어   려움이 따랐는가를 은유적으로 대변해 준다. 

 그러나 실제로 범종을 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 지   옥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까지 제도하는 자비심의 상   징이라는 점에서 범종을 완성하고자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공양하였다는 내용 자체가 조성 목적에 전혀 맞지 않아 더욱 의구심이 든다. 더욱이 성덕대왕 신종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상원사종과 유사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었으며 미량의 납과 아연, 그리고 아주 극소수의 황, 철, 니켈 등이 함유되어 있었지만. 

결국 세간에 떠도는 바와 같은 인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인체의 성분이 70%이상 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조 당시에 사람을 공양하여 쇳물에 넣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종이 깨져 완성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도 에밀레종의 유아희생 설화는 전혀 근거가 없는 전설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전설이 언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도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 범종의 최대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그것이 비록 전설이나 설화이던 간에 어디에서라도 남아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한다. 아마도 조선 후기쯤 유림의 세력이 드높았던 경주 지역에서 불교의 인신공양을 범종에 결부시켜 종교적 폄훼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론해 본다.

분명한 것은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이 종의 이름을 명문 첫머리에 두어 일반적인 종과 달리 그야말로 가장 신성스런 종이란 점을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록된 명문에서 보이듯 일승의 원만한 소리인 부처의 말씀과 같은 종소리를 들음으로써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범종의 참 뜻을 성덕대왕 신종은 가장 잘 말해주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어엿한 본명 대신 전혀 근거도 없고 왜곡된 별칭인 에밀레종으로 부르는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 범종은 비록 혜공왕대인 771년에 완성되었지만 통일신라 불교미술에서 최고의 황금기를 구현하였던 8세기 경덕왕대(景德王代, 742 ˜765)에 제작되기 시작한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들었던 당대 최고의 과학, 건축, 조각술이 주조기술과 합쳐져 총체적인 완성을 이루게 된 것이 바로 성덕대왕 신종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1975년 인왕동 박물관으로 종을 옮겨 달 때 옛 철고리 를 다시 바꿔 달려고 당시 가장 유명한 포항제철에 의 뢰해 고리를 특별히 주문 제작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종을 직접 달기 전 실험을 해본 결과 고리의 직경이 중 량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원래의 고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는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높은 수준의 금 속 주조 기술을 지니고 있었는지 여실히 증명해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높이 3.66m, 구경이 2.27m에 이르는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큰 크기이면서 신비한 소리와 아름다운 형태를 함께 간직한 성덕대왕 신종은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품이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종임에 분명하다.

 

여음(餘音)

 

성덕대왕 신종은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근거도 없는 제야의 종이란 명목으로 반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타종되었다. 함께 치기 시작한 보신각종은 결국 균열이 생겨 새로운 복제 종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성덕대왕 신종 역시 제아무리 통일신라의 완벽한 주조기술로 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 수명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타종을 중단한 것인데, 아직도 성덕대왕 신종의 타종을 주장하는 의견이 많다. 다행히 2016년 11월 경주시에서 성덕대왕 신종을 완벽히 재현한 신라 대종을 주조하여 타종하기 시작하였다. 천만 다행한 일로서 이 종을 주조한 성종사 및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불교신문3280호/2017년3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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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소장 봉덕사 성덕대왕 신종 (국보 제29호)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

 

• 코드: cp0501b00601 

• 명칭 : 성덕대왕신종 

• 지정 : 국보 제29호 

• 조성연대 : 통일신라 혜공왕 7년(771) 

• 제원 : 전체높이 378㎝, 종신 292.5㎝, 입지름 224㎝, 두께 7.4~21.4㎝, 무게 18900kg 

• 소재지 : 국립경주박물관 

• 관리자 : 국립경주박물관 

 

• 설명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한국종의 상징이라고도 할만한 종이다. 재질은 청동이며 주종장은 박종일, 박빈나, 박한미, 박부악이다.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 실측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종 몸체의 명문에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라고 종명을 밝혔으며 이 종이 완성되었을 때 그 모양이 마치 산과 같이 우뚝하고 소리가 용의 울음과 같으며 메아리가 하늘과 땅 끝까지 이르렀고 소리를 듣는 이가 복을 받았다 한다. 명문에 의하면 태평성대를 누렸던 성덕대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경덕왕(景德王)이 구리 12만근을 희사하여 종을 만들 준비를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그 아들인 혜공왕(惠恭王)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완성하였으니 이 해가 771년이다. 

 

이 종은 처음에 왕가의 원찰인 봉덕사(奉德寺)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종을 만들 때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떠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봉덕사가 폐사된 뒤 영묘사(靈廟寺)로 옮겼다가 다시 봉황대(鳳凰臺) 옆에 종각(鍾閣)을 지어 보존하고 있었다. 1915년 종각과 함께 동부동(東部洞) 구박물관(舊博物館)으로 옮겼으며, 박물관이 이곳으로 신축 이전하게 되어 1975년 5월 26일에 이 종각으로 옮겨 달았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서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한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상대와 하대는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상대 밑으로는 네 곳에 연꽃봉오리 모양으로 9개의 연뢰를 사각형의 연곽(蓮廓)이 둘러싸고 있다. 연곽 아래로 구름을 타고 연화좌(蓮華座)에 앉아 향로를 받든 공양천인상(供養天人像)이 천의(天衣)자락을 휘날리고 있는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두 개의 당좌(撞座)가 연꽃 모양으로 새겨져 있으며, 2중의 보상화무늬로 구성하였다. 몸체의 좌우에는 종에 대한 내력을 적은 양주(陽鑄)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종은 이러한 일반적인 신라종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몇 가지 이색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종 입구를 직선으로 처리하지 않고 중국 종처럼 팔릉형(八稜形)으로 처리하였으며 연꽃봉오리는 돌출되지 않은 평좌이다. 상대에는 연꽃잎 장식이 있는데 이는 고려 전기 범종에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신라종 중에서는 이 종에서만 보이는 특징이다. 또한 방사상의 연꽃잎장식의 음통좌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일본 조구진자(常宮神社) 소장 연지사(蓮池寺) 종 외 고려종에 극히 소수의 예만 있는 희귀한 것이다. 특히 몸체에 있는 아름다운 비천상은 다른 종의 예와 같은 주악비천상이 아닌 공양비천상이다. 비천상은 연화좌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보상화를 구름과 같이 피어오르게 하고, 천상에서 옷자락과 영락을 휘날리며 두 손에 향로를 받쳐 들고 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산과 같이 크고 우람하며 조화와 균형이 알맞고 종소리 또한 맑고 거룩하여 그 긴 여운은 은은하게 영원으로 이어지며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는 성보문화재이다. 

 

<자료참조 : 국립경주박물관, 문화재청, 직지성보박물관>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원 2017년 12월 5일 현재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7&cp_code=cp0501&index_id=cp05010019&content_id=cp050100190001&search_left_menu=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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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4일 발췌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국보 29호, 에밀레종)

종 목 국보  제29호
명 칭 성덕대왕신종 (聖德大王神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정(등록)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국립경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국립경주박물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75m, 입지름 2.27m, 두께 11∼25㎝이며, 무게는 1997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정밀측정한 결과 18.9톤으로 확인되었다.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종을 만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뒤를 이어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여 성덕대왕신종이라고 불렀다. 이 종은 처음에 봉덕사에 달았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하며, 아기를 시주하여 넣었다는 전설로 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따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종의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동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머리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종 몸체에는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그 안에 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종의 어깨 밑으로는 4곳에 연꽃 모양으로 돌출된 9개의 유두를 사각형의 유곽이 둘러싸고 있다. 유곽 아래로 2쌍의 비천상이 있고, 그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연꽃 모양으로 마련되어 있으며, 몸체 2곳에는 종에 대한 내력이 새겨져 있다. 특히 종 입구 부분이 마름모의 모서리처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있다.

통일신라 예술이 각 분야에 걸쳐 전성기를 이룰 때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문양과 조각수법은 시대를 대표할 만하다. 또한, 몸통에 남아있는 1,000여자의 명문은 문장뿐 아니라 새긴 수법도 뛰어나, 1천 3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상되지 않고 전해오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사이트 2014년 2월 14일 현재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1,00290000,37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1,002900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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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25일 발췌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한국미술전집 / 동화출판공사 / 1974.
설명

▶통일신라시대. 높이 3.33m, 입지름 2.27m, 國寶 29. 國立慶州博物館藏

이 종은 한국 최대의 종이며 다른 불교국가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현존한 가장 아름다운 巨鐘이다. 한국종의 형식을 갖추었고 형태 무늬 등이 完美하고 新羅盛時의 미술문화의 발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肩帶. 乳廓. 口緣帶등에 있는 寶相花무늬의 조각은 섬세하고 우아하며 鐘身에는 시원스럽게 공간을 남기고 그곳에 寶相花로 표시한 撞座와 마주 대하고 있는 飛天像이 각각 대칭하는 위치에 조각되어 조화된 공간미를 잘 살리고 있다. 위에는 놀라운 솜씨로 표현한 용뉴가 있고 옆에는 한국종에서만 볼 수 있는 音筒이 붙어 있는데 그 표면에도 섬세한 조각이 있다.

鐘口는 八稜形을 이루었고 口緣帶의 모양도 이에 따라 전체가 八稜形을 이루었으며, 稜마다 큼직한 연꽃이 있어 평범하기 쉬운 下端部에 변화를 주고 있다. 형태나 무늬뿐 아니라 주조기술 또한 놀라운 바 있다. 이 鐘에는 鐘身에 1千字가 넘는 長文의 鐘銘이 陽鑄되었고 이에 의하여 이 종이 신라 경덕왕이 父王 성덕왕을 위하여 銅 12萬斤을 들여 鑄成하려 하였으나 완성을 못 보고 돌아감에 다음 혜공왕이 父王의 뜻을 이어 同王 7년(771)에 완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만한 大鐘이 천수백년동안 한 점의 흠이 없이 지금에 전해진 것은 매우 희한한 일이며 지금도 우렁찬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출처 : http://www.sejon.or.kr/main/main_art.htm 2006년 10월 25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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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13일 발췌


2006년 9월 22일 발췌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통일신라

금속/동합금제銅合金,

국립경주박물관

 

  높이 333cm, 입지름 227cm, 두께 2.4cm의 신라시대 종으로 종의 꼭대기에   는 우리나라 종만이 갖고 있는 용의 형태로 된 고리 인 용뉴龍紐와 음통音筒   이 있다. 몸에는 윗 띠에 보상당초무늬를 새긴 후 그 사이에 8개의 큼직한   연꽃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둘렀다. 그 아래로 연꽃으로 장식된 4개의 유   곽乳廓·무릎을 꿇은채 날아 내려오는 4개의 공양천인상供養天人像·2개의   연꽃 모양의 당좌撞座·보상당초무늬와 연꽃으로 이루어진 아래띠가 양각되   어 있다.     이 종은 에밀레종 또는 봉덕사종奉德寺鍾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신라 제   35대 왕인 경덕왕이 돌아가신 아버지 성덕대왕을 위하여 구리 12만근을 들   여 만들다가 실패하여 그 아들인 혜공왕 7년(771년)에 와서 완성된 것이라   전해진다. 이 종은 무게가 18.9톤이나 되는데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규모의   종을 주조하기가 어려워 당시의 수준 높은 주조기술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우아한 형태와 화려한 양식,아름답고 여운이 긴 소리를 가지고 있어 우리나   라의 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의 하나로 손꼽힌다.  

출처 : www.misoola.com

 

 

2006년 9월 22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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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덕사(奉德寺)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1-1,3-2)


소재지(所在地) :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국립경주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연 대(年 代) : 771年 (혜공왕(惠恭王) 7年), 대력(大曆)6年
지정번호(指定番號) : 국보(國寶) 第 29號
크 기 : 높이 330cm 구경 227cm


국내(國內)에 유존(遺存)한 최대(最大)의 거종(巨鍾)으로서 제작년대(制作年代)와 각부(各部) 양식(樣式)이 풍요하고 화려한 범종(梵鍾)의 하나이다.


종신(鍾身) 상하(上下)에는 견대(肩帶)와 상대(上帶)를 돌렸고, 그 속의 주문양대(主紋樣帶)는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을 조식(彫飾)하였다. 특히 하대(下帶)에 속하는 구연대(口緣帶)는종구(鍾口)가 팔릉형(八稜形)을 이룬 특수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 다른 신라(新羅) 범종(梵鍾)과는 다른 점이며, 오직 유일(唯一)한 예(例)이다. 이와같은 팔릉형(八稜形)의 릉(稜)마다 당좌(撞座)와 유사한 연화(蓮華)를 배치하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특징(特徵)이다.


견대(肩帶) 밑으로는 7개처(個處)에 연주문(連珠紋) 속에 견대(肩帶)에서와 같은 보상당초문양(寶相唐草紋樣)으로 조식(彫飾)된 유곽(乳廓)을 돌리고, 그 내부에 양각(陽刻) 연화좌(蓮華座)가 표현 장식된 9유(乳)가 들어있다.


종신(鍾身)의 유곽(乳廓) 밑으로 비천상(飛天像) 2구(軀)를 상대적(相對的)으로 배치하고 있고, 그 사이에 교호(交互)로 팔판(八瓣)의 연화당좌 2個를 배치 하고 있다. 특히 상원사(上院寺) 범종(梵鍾)의 경우에는 명문(銘文)이 종정부(鍾頂部)에 명기(銘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종신(鍾身)에 명문(銘文)이 양각(陽刻)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전체적(全體的)인 종(鍾)의 수법(手法)은 동양(東洋) 어느 국가(國家)에서도 그 유례(類例)를찾아보기 힘든 거종(巨鍾)인 동시에 상원사(上院寺) 범종(梵鍾)과 더불어 최대(最大)의 조각(彫刻) 양식(樣式)을 구비한 범종(梵鍾)이다.


종신(鍾身)에 2구(軀)식 상대(相對)한 비천상(飛天像)은 연화좌(蓮華座) 위에 무릎을 세우고공양(供養)하는 공양상(供養像)으로서 비천(飛天) 주위에는 보상화(寶相華)를 구름같이 피어오르게 하였고, 천상(天上)으로 천의(天衣) 영락(瓔珞) 등이 휘날리고 있는 것은 다른 신라(新羅)범종(梵鍾)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하고 훌륭한 비천상(飛天像)으로서 한국(韓國) 비천상(飛天像)의 예중(例中)에서 대표(代表)가 되는 조각(彫刻) 수법(手法)이다.


종신(鍾身)에 명기(銘記)된 장문(長文)의 양각(陽刻) 명문(銘文)에 의하면 경덕왕(景德王)을 위하여 동(銅) 12만근(萬斤)을 들여 대종(大鍾)을 주성(鑄成)하려 하였으나 완성(完成)을 보지 못하고 돌아감에 다음 혜공왕(惠恭王)이 부왕(父王)의 뜻을 받아 동왕(同王) 7년(年)(771) 대력(大曆) 6年에 완성(完成)을 본 것이다. 이때 당시는 불교(佛敎)의 융성과 신라(新羅) 예술(藝術)의 극성기로서 이와같은 우수하고 걸작의 작품이 국가적(國家的) 사업(事業)으로 제작될만 한 시대적(時代的) 배경(背景)을 갖고 있었다.

한문장 스캔


성덕대왕신종의 명(국역)

조선대부겸 태자조의랑 한림장 김필오는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지음.

대개 지극한 도는 형상의 밖을 포함해 있으면서도 아무리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 없고, 큰 소리는 천지 사이를 진동하나 아무리 들어도 그 메아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빙자하여 삼진의 깊은 뜻을 보고 신종을 매어 달아서 일승의 둥근 소리(불타의 진리를 전하는 말씀)을 깨치는 것이다. 대개 그 종이란 불토에 상고해 보면 그 징험은 궤빈에 있고 제향에 찾아보면 고연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비어도 잘 울어서 메아리는 쉬지 않고 다시 굴리기어려워 그 체를 더욱 잡지 못한다. 그러므로 왕은 큰 공을 그 위에 새기고 중생들이 괴로움을 떠나는 것도 그 가운데 있다.

생각하면 성덕대왕은 그 덕이 산하와 함께 높고 그 이름은 해와 달과 같아서 높이 달였다. 충량한 신하를 써서 속인들을 어루만지게 하고, 예악을 높이어 풍월을 보았다. 들에서는 농사에 힘쓰고 시장에서는 잡된 물건이 없었다. 그 시기가 금옥을 꺼려하고 세상이 문재를 숭상하였다. 뜻밖에 아들이 돌아가서 늙은이는 조심하여 40여 년 동안을 나라 정치에 힘써서한 번도 전쟁으로써 백성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방이 이웃나라요 만리안의 사람들이 손으로 돌아와서 오직 그 가르침을 흠앙할 뿐 아직 한 번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중국의 연나라와 진나라의 사람을 쓰고 제나라와 진나라가 번갈아 패왕이 되었으니 어찌 수레바퀴와 굴레를 나란히 하여 말하겠는가. 그러다 쌍수에서 돌아가심을 헤아리기 어렵고 오랜 세월의 밤은 길기 쉬워서 임금의 수레를 편안히 한지도 벌써 34년이다. 지난번에 효도스런 아들 경덕대왕이 세상에 있을 때 큰 업을 이어받아 온갖 정치를 감찰하였다. 일찍이 자친이 돌아가셔서 세월을 따라 그리움을 일으키고, 또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대궐에 나아갈 때마다 슬픔이 더하여 조상을 생각하는 정이 더욱 슬프고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구리쇠 12만근을 내어 1장종 하나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뜻만 세우고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지금 우리 성군은 그 행실이 조종에 맞고 지극한 이치에 뜻은 부합하여 특별히 천고에 상서롭고 덕은 보통 때에 뛰어나 여섯 거리에서는 용의 구름으로써 가만히 옥계에 뿌리고 구천(하늘)에 천둥을 치고 대궐에 메아리 울린다. 초목의 숲은 바깥 경계에 무성하고 흐리지 않은 빛깔은 서울에 번쩍이니 이것은 곧 탄생한 날의 알림이요. 정치에 나아갈 때에 응한 것
이다.

생각하면 태후는 은혜가 땅처럼 평평하여 어진 가르침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마음은 하늘 거울과 같아서 부자의 효성을 장려한다. 이로서 아침에는 원구의 어짊을 알겠고 저녁에는 충심의 도움을 알겠다. 가리지 않는 말이 없으매 무슨 행의 허물이 있으리오. 이에 유언을 남기어 드디어 숙원을 이루었다. 나는 그 유사를 시켜 일을 분변하고 공장을 시켜 그리고 하니 그 해는 해년이요 달은 대력이었다. 이때에 해와 달이 더욱 빛나고 음과 양은 기운을 고르니 바람은 화하고 하늘은 고요하였다.

신기(종)가 이에 되니 그 모양은 산처럼 우뚝 서고 그 소리는 용이 읊조리는 것 같아서 위로는 유정천(하늘의 제일 높은 곳) 꼭대기에 사무치고, 밑으로는 밑이 없는 범위에 통하니 보는 사람은 기특하다 일컫고 듣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원컨대 이 묘한 인으로써 높은 영을 받들어 도와 보문(널리 들음)과 맑은 메아리를 듣고 무설(말함이 없음)의 법의 자리에 올라서(해․달․별)의 훌륭한 마음에 맞고 일승의 참경지 에 노인다.

심지어 옥의 꽃받침의 떨기와 금가지가 같이 무성하여 나라의 업이 천리산처럼 더욱 번창하고 유정과 무식의 슬기의 바다에서 물결을 같이하여 모두 티끌세상에서 나오고 다함께 깨달음의 길에 오르소서.

신(필오)은 옹졸하고 재주가 없지만 감히 왕명을 받드오니 반초의 붓을 빌리고 육좌의 말을 따라서 그 원하는 뜻을 진술하여 이 종의 명을 쓴다. 한림서생 대나마 김부환 씀.

그 가사에 이르기를 하늘은 온갖 형상을 나타내었고 땅은 방위를 열었도다. 산천은 벌려 섰고 구획은 갈라졌다. 동해의 위는 신선들이 사는 곳이다. 땅은 도원에 있고 경계는 부상에 대었다. 여기 우리 나라가 있어 모두 한 고을이 되었다. 근본이 거룩한 덕이요, 대마다 더욱 새롭고 오묘한 맑은 교화에 멀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 모두 왔도다. 그 은혜 멀리 입히매 물건마다 고루 적시었다. 성하여라 일천 앞이여 모두 일륜에 편안하였다.

근심 구름이 갑자기 닥치어 슬기와 해와 봄이 없었다. 공손스런 효자 아들이 그 업을 받아 정치할 때에 옛 그대로 나라를 다스리니 그 꿈엔들 어찌 어긋나리. 날마다 아버지 교훈을 생각하고 언제나 어머니 빛을 사모한다. 여기에 다시 복을 닦으니 종 만들기를 기원하였다. 거룩하여라 우리 어머니여 그 느낀 덕이 가볍지 않았다.

보배로운 상서는 자주 나오고 신령스런 부적은 늘 생겼다. 임금이 어질매 하늘이 도와 나라는 평안하고 때는 태평하였다. 날로 부모의 엄한 교훈을 생각하며 마음을 따라 원을 이루었다. 이에 유언을 남기니 여기 이 종을 만드는 일이다. 사람과 신이 힘을 다하여 보배로운 종이 형상을 나타내니 악마와 귀신을 다 항복받고 고기와 용을 구원하였다. 해뜨는 골짜기에 명을 떨치고 북쪽 봉우리에 맑은 소리 울렸다. 보고 듣는 이가 모두 믿어하니 꽃다운 인연이요 진실한 종자였다. 뚜렷이 빈 신령스런 몸이여 비로소 성인의 발자취를 나타냈다. 이 커다란 복을 언제나 더욱 소중히 하라.

 
출처 : 1996년 12월 국립문화재연구소 간 "한국의 범종" 2015년 9월 20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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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레종의 비밀
 
봉덕사의 종이라고도 불리는 에밀레종은 신라가 망한 다음 천덕꾸러기가 됐다.
길가에 방치되었다가 20세기 초가 돼서야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는다.
국내 범종들 가운데 소리가 으뜸이다.

다른 종들과는 달리 아주 멋진 용머리 모양 장식이 갖춰져 있고 운치 있는 소리의 비밀은 바로 그 용두에 있다. 몸체로 퍼지는 소리 진동이 일단 용두에 모였다 아래로 퍼진다. 그런데 정말 종 속에 아이를 넣어 주조했을까?
종신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경건한 자세로 천년의 신비를 풀어내는 순간이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스님 한 분이 나타났다.
“아밀리가 에밀레야.”
단 한마디 소리를 들려주고는 어디론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아밀리는 극락세계를 가리키는 고대 산스크리트어다.
… 아밀리… 애밀리… 에밀레.
다시 스님을 불렀다.
“난 에밀레종을 수호하는 석천이라는 승려입니다.”
“종을 만들 때 정말 아이를 집어넣었나요?”
스님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뭔가 꺼내 보여준다. 그것은 작은 종이 조각이었다. 잘 펴보니 거기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아미리국위천(阿彌利國爲天:아미리는 하늘이다).’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벌써 20여년 동안 공을 들였으나 번번이 종이 깨지고 제소리를 내지 못했다. 물론 만드는 기술이 모자란 탓도 있었으나 그보다 하늘의 도움이 모자랐던 것이다. 종을 만드는 사람들은 사람의 힘만 가지고는 도저히 훌륭한 종을 만들 수 없음을 깨닫고 생명을 집어넣는 희생주술을 치르기로 하였다. 갓난아이를 수소문하여 종에 넣기로 했다.
그러나 봉덕사는 성덕대왕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었다. 경건하게 울릴 종을 만드는 데 인간의 생명을 희생해야 한다는 근본적 모순을 극복할 만한 명분이 따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전통 고유신앙과 살생하면 안 된다는 불교신앙이 서로 대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동안 그 문제로 시끄러웠다.
“불살생의 법도를 깰 수는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넣었다고 거짓 소문을 냈습니다. 그리고 종의 이름을 아미리종이라고 불렀지요. 사후에 극락세계로 가게 해주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아이가 희생된 것으로 믿었고 아미리종을 에밀레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엄마를 원망하는 아이가 우는 소리처럼 에밀레, 에밀레 하는 여운이 들립니다.”
예상한 그대로 최근의 성분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에밀레종에는 인체의 성분이 들어 있지 않은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김세환 대영계연구소장

[관련자료]

에밀레종의 신비
경주에 오는 사람은 거의 모두 경주박물관에 들른다. 박물관에 들른 사람은 또한 거의 모두 정문과 마주하고 있는 에밀레종을 둘러보고 간다. 그들이 저 종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동을 갖고 돌아갈 것인가? 어린애를 희생해서 만들었다는 잔인한 전설을 기억했을 것이고, 비천상의 아름다운 돋을새김, 화려하기 그지없는 보상당초무늬에 눈길이 닿았다면 그래도 안정된 정서를 가진 관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위대하다는 존대의 감정을 갖고 갔을 것인가?
아닐 것이다. 과학문명과 온갖 기술이 발달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에밀레종을 만드는 정도의 기술에 놀랄 리 만무하다. 1,200년 전에 제법 큰 종을 만든 것이 대견하다는 정도의 가벼운 칭찬 정도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단연코 말하건대 에밀레종은 인간이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유물이 아니다. 에밀레종 이전에도 없었고 에밀레종 이후에도 없는, 오직 에밀레종 하나가 있을 따름이다.
20세기 복제품의 실패
1986년에 우리는 두 차례에 걸쳐 에밀레종 복제품을 만들었다. 그 하나는 아메리카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는 선물로 제작되어 '우정의 종'이라는 이름이 붙은 종으로 지금 로스앤젤레스,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어느 공원 언덕에 설치되어 있다. 1987년 내가 미국에 10개월간 있었을 때 나는 이 공원에 올라가 에밀레종 복제품을 몰래 쳐보았다. 그것은 종소리가 아니라 깡통 두드리는 소리였다. 형태도 흉내만 냈지 장중하고 유려한 기품을 갖춘 것이 아니었다. 또 하나는 서울 보신각이 이제 수명을 다하여 더 이상 타종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이것을 국립중앙박물관 후원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새 종을 만들면서 에밀레종을 복제하였다. 그러나 문양구성을 현대에 맞춘다고 바꾼 것이 촌스러운 것은 그렇다 치고 우선 종소리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해마다 12월 31일 자정이 되면 제야의 종이 울린다. 보신각종도 울리고 에밀레종도 울린다. 텔레비전은 이것을 생중계하는데 항시 보신각종-정확히는 에밀레종 복제품-을 먼저 보여주고 다음에 뒤이어 에밀레종의 타종을 중계한다. 아무리 음치이고 아무리 소리에 둔한 사람이라도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단박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가짜는 재겨운 쇳소리를 내면서 터지는 소리가 나오고, 진짜는 명문(銘文)에 씌어 있는대로 '장중한 원음(圓音)'을 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과학기술로 따진다면 몇천만 곱 발달한 우리 시대에 왜 1,200년 전 종소리를 따라잡지 못했을까? 그것은 단 한가지 이유, 즉 제작하는 정신자세 내지 정신이 이 시대에는 에밀레 종소리를 도저히 흉내낼 수도 없게된 점에 있는 것이다.
종소리는 부처님 목소리
20세기 복제품은 겉껍질만 흉내내기에 급급했지 정작 중요한 사항, '종은 종소리가 좋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거의 무감각 내지 무신경했던 것이다. 에밀레종을 만들던 사람들이 훌륭한 종소리를 내기 위하여 얼마나 고심하였는가는 에밀레종 몸체에 새겨져 있는 1,000여 자의 명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나니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하며, 진리의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메아리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 그런고로 부처님께서는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하여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神鐘)을 달아 진리의 둥근소리(圓音)를 듣게 하셨다. 무릇 종소리란... 그 메아리가 끊이지 않으니 장중해서 옮기기 힘들며,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
종소리는 곧 진리의 원음이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글로 옮겨 적으면 불경이 되고,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으로 옮겨 놓으면 불상이 되고, 부처님의 목소리를 옮겨 놓은 것이 종소리였던 것이다. 시대정신이 퇴락하면 다시는 그 정신이 되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인간사의 법칙 같은 것이다.

우리시대는 자동차나 컴퓨터는 만들어도 에밀레종을 복제해낼 능력은 완전히 상실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게 되었다. 왜 1,200년을 두고 변함없이 울려왔던 에밀레종소리가 그치게 되었는가? 에밀레종에는 지금도 아무 이상이 없다. 금이 가거나 깨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 문화재 관리자들의 생각이겠지만, 불국사에 계신 월산스님의 말을 빌리면 "종은 쳐야 녹슬지 않는 법이다. 만물이 자기 기능을 잃으면 생명이 끊어지듯이." 게다가 지금은 종 앞에 달려 있는 나무봉마저 거두어버렸으니 에밀레종은 그야말로 박물관 유물로 된 셈이다. 프랑스 평론가 말을 빌려 "명작들의 공동묘지"에 안치된 것이다.
에밀레종 옮길 때의 이야기
경주 법원 뒤쪽에 있는 구경주박물관에 있던 에밀레종을, 1975년 이른 봄부터 6월까지 새로 지은 현재의 박물관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때의 숨은 얘기는 소불선생(당시 경주박물관장 정양모씨)이 "이제야 털어놓는 에밀레종 옮길 때의 이야기"(한국인 1985년 11월호)에 그 일부를 써놓은 바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당시 경주박물관장을 지내고 있던 소불선생은 이 위대한 종을 무사히 옮겨 거는 일, 거기에 걸맞은 예우를 하는 일로 무척 고심했다고 한다. 다시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이 신종에 어떤 손상이 간다는 것은 영원한 죄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에밀레종을 새 박물관으로 옮기는 일은 대한통운이 맡았다. 에밀레종은 높이가 3.7m, 무게가 22톤이다. 이것을 운반하기 위해 포장을 하니 높이가 5m, 무게가 30톤이 되었다. 이것을 트레일러에 올려놓으니 또 6m가 넘게 되고 트레일러 무게와 합치면 50톤이 넘게 되었다.
28톤 강괴를 빌려주시오
소불선생은 이렇게 에밀레종을 신관 새 종각에 옮겨다 놓았지만 이제는 이것을 안전하게 거는 일이 태산 같은 걱정이었다. 종각이 부실공사가 아닐까 걱정도 되고 공사자들이 신식기술을 너무 과신하거나 옛 유물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을까 걱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종고리가 휘어 부러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소불선생은 고심 끝에 포항제철에 강괴 28톤을 빌려 시험적으로 달아보고자 공문으로 요청했다. 그것은 만용에 가까운 것이었다. 포철은 강괴를 외부로 내준 일도 없고, 강괴를 운반하는 비용만도 상당한 액수였다. 그러나 소불선생은 그저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 다시는 못 만드는 문화유산이라는 말로만 몇날 며칠을 설득하였다. 한국사회에서 안될 일도 되게 하는 길은 실무자를 잘 알면 되는 것인데, 일이 되려고 했는지 포철의 한 실무간부가 소불선생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리하여 천신만고 끝에 포철은 강괴 28톤을 빌려주고 대한통운에서는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중기계장 이용일씨, 작업반장 김창배씨 등 여러분이 작업비도 받지 않고 거기에 옮겨 걸어 주었다.
소불선생은 에밀레종 무게보다 6톤의 여분으로 28톤을 빌려오는데 성공했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22톤의 하중을 견디는지 시험하려면 44톤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바람에 움직이기 때문에 정지된 물체보다 두 배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불선생은 아침 저녁으로 강괴를 흔들어보았다. 시공자 공영토건 공사장은 6톤을 더 얹었다고 불평하면서 이 시험 자체를 불쾌해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소불선생은 아랑곳없이 틈만 나면 종을 치듯 흔들어보았다.
이레째 되던 날 아침, 경비원이 소불선생을 찾아 뛰어왔다. 종고리가 휘어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열흘이 되니 곧 떨어질 것 같아 강괴를 내려놓았다. 소불선생은 휘어지고 벌어져 추한 모습이 된 종고리를 떼어들고는 부르르 떨었다고 한다. 소불선생은 그것을 상자에 담아 고속버스에 싣고 서울로 올라와 국립중앙박물관장실에 풀어놓고는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어이없는 일로 지체높은 분들이 모였다. 문화재관리국장, 공영토건 사장, 원자력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이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를 조직하여 실수없이 하기로 했다.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는 원자력연구소의 김유선박사, 금속실장 황창규선생 등 과학자와 소불선생 등 박물관 관계자로 구성되었다. 종고리위원회는 먼저 일그러진 고리를 인천에 있는 한국기계공업회사에 가서 시험해보니 연구관 하는 말이 "이 쇠는 똥쇠(똥철)입니다."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종고리만이 아니었다. 종을 걸 쇠막대기도 22톤 하중을 잘 지탱해야 한다. 황실장은 이 쇠막
기는 특수한 강철을 사용하여, 황실장이 지정하는 실력있는 공장에서, 황실장의 지시에 따라 최소한 직경 15cm가 되는 철봉을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휘지도 구부러지지도 않는 것을 만들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큰 문제가 생겼다. 에밀레종 머리에 쇠막대를 끼우는 부분은 용틀임을 하는 형상으로 그 용허리에 가로지르게 되어 있는데 이 구멍은 지름이 9cm도 안되는 것이었다. 최상의 질로 15cm 밖에 안된다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황실장은 고민 끝에 지금의 과학기술로는 오직 한 방법, 와이어(철사)로 계속 말면 걸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허나 그래서야 종을 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황실장은 "관장님, 그전에 매단 쇠막대기 있습니까?"하고 물어왔다. 소불선생이 창고에서 그것을 꺼내 보여주었더니 황실장은 득의만면하여 " 이것이라면 안전합니다"라는 것이었다. 현대공학의 기술로는 15cm 쇠막대기 이하로는 안되지만 이것은 된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옛날 쇠막대기는-그것을 신라시대에 만들었는지 조선시대에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여러 금속을 합금해서 넓고 기다란 판을 만들어 두드리면서(鍛造) 말아서 만들었으니 와이어가 분산된 힘을 결합하듯 만든 형태라는 것이다. 강하면 부러지기 쉽고 연하면 휘기 쉬운데 이렇게 만들면 강하면서 부드러워 휘지도 부러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종고리위원회는 에밀레종 종고리에 끼울 쇠막대기를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공학박사들이 말하는 신비한 얘기들
그러고 보면 20세기에 에밀레종 복제가 불가능한 것은 정성의 부족뿐만이 아니라 기술부족이라는 측면도 있는 것이다. 컴퓨터를 만들고 자동차를 만드는 기술은 발달했지만 청동주물 솜씨는 그 옛날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쩌면 경험과 필요에 의한 기술의 축적과 과학적 사고란 발전이 아니라 변화일 따름인지도 모른다.
에밀레종 몸체에는 종고리인 용머리의 방향과 같은 축으로 둥그런 연꽃무늬 당좌(撞座)가 양쪽에 새겨져 있다. 종을 칠 때는 반드시 여기를 쳐야 제 소리가 난다. 조금만 어그러지거나 비껴가도 안된다. 종 몸체에 새겨져 있는 모든 문양, 비천상, 명문의 서(序)와 사(詞), 어깨에 새긴 종젖꼭지(鍾乳), 입부분의 보상당초문 등이 이 두 당좌를 축으로 하여 좌우대칭을 취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1963년 2월, 원자력연구소 고종건, 함인영 두 박사팀이 삼국시대 불상과 범종을 특수촬영(감마선 투과촬영)하여 과학적으로 규명한 것이 '미술자료' 제8호, 9호에 실려 있는데 이 두 박사는 당시 어떻게 그렇게 얇은 주물이 가능했고, 깨끗한 용접이 가능했고, 주물에 기포(氣泡)가 없었는지 불가사의하다는 것이었다. 에밀레종에도 물론 기포가 없다.
남천우 박사의 '유물의 재발견'이라는 명저에는 우리나라 범종을 과학적으로 규명한 장문의 논문이 실려 있는데, 그의 견해에 의하면 에밀레종은 납형법(蠟型法)으로 제작되었다. 중국종, 일본종이 만형법(挽型法) 또는 회전형법으로 제작된 것과는 큰 차이이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조선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기법의 차이에서부터 유래한다.
이 기법의 차이는 곧 형태와 소리 모두에서 큰 차이를 보여준다. 납형법이 아니고서는 종 몸체에 그와 같은 아름다운 문양을 새기는 것이 불가능하고, 납형법이 아니고서는 긴 여운을 내지 못한다. 일본의 범종학자인 쓰보이 료헤이(坪井良平)에 의하면 몇 해 전 일본 NHK에서 세계의 종소리를 특집으로 꾸민 적이 있는데 에밀레종이 단연 으뜸이었다는 것이다. 장중하고 맑은 소리 뿐만 아니라 긴 여운을 갖는 것은 에밀레종 뿐이라고 한다.
남천우 박사가 주장한 바, 에밀레종이 납형법으로 제작되려면 22톤의 쇳물, 감량 20-30%을 계산하면 약 25~30톤의 쇳물을 끓여 동시에 부어야 한다. 명문에 12만 근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당시 225g을 한 근으로 계산해보면 약 27톤이 되니 맞는 얘기가 된다.
출처 : 無名老人 
(wcs3355) 2008년 1월 30일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