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신라의 종

선림원 종 (선림원지 파종)

korman 2012. 12. 19. 18:16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⑥ 선림원지 ‘정원20년명 종’

발견 3년만에 녹아버린 비운의 통일신라 종

1948년 설악산서 발견

국군이 월정사 소각시 소실

상원사 동종과 정반대 운명

종신 안쪽 양각 명문 ‘독특’

9세기 귀중한 금석문 자료

1948년에 발견된 선림원지 정원(貞元) 20년(年) 범종. 정원 20년은 804년이다. 총고 122㎝, 종신고 96㎝, 구경 68㎝이다.

일본에 남아있는 운쥬지(雲樹寺) 종이 거의 8세기 후 반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면 9세기의 첫머리를 장식하 는 통일신라 범종이 바로 804년에 만들어진 선림원 지(禪林院址) 종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범종은 1948년 강원도 양양군 (襄陽郡) 서면(西面) 미천리(米川里) 소재의 선림원지 에서 발견된 이후 불과 3년만에 한국전쟁으로 인해 소실되고 만 비운의 종이다.

 

더 명확히 말하자면 이 종을 발견한 장소가 설악산의 폐사지였기 때문에 종의 안전한 보호를 위하여 오대 산의 대찰 월정사 종각에 이 종을 보관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6.25가 발발하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이 퇴각하던 1951년 1.4 후퇴 무렵(1월 3일, 또는 4일 전후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월정사에서도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월정사가 북한군의 은신처가 되는 것을 막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절을 불태웠고 이 때 선림원지 종도 불에 녹아버리고 말았다.

전쟁의 폭격도 아닌 국군에 의해 자행된 이러한 만행은 두고두고 문화재 파손의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다. 상원사 역시 그 당시 같이 방화될 운명이었으나 목숨을 걸고 이를 막은 한암선사의 살신성인이 있었기에 상원사 국보 종은 온전히 살아남게 된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이다.

 

선림원지 종이 발견될 당시의 전언에 따르면 종은 지하 60㎝ 정도의 깊이에 옆으로 뉘인 채 있었는데, 그 주위에는 목탄을 넣어 매납(묻어서 보관)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때인지 몰라도 이 종을 보호하고자 인위적으로 묻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종의 원래 총고는 122㎝, 구경은 68㎝로서 통일신라 종 가운데는 크지 않은 중형에 속하는 편이다.

 

현재는 그 잔편들만 국립춘천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되어 있으며 이 잔편과 원 도면을 참조하여 국립춘천박물관에 복원 전시되었다. 특히 이 범종은 다른 종과 달리 범종의 종신 안쪽에 양각의 명문을 새겨 넣었음이 독특하다. 상원사 종은 종의 천판(天板)에 음각시켰고 성덕대왕 신종은 종신 몸체 가장 중심에 1000여자의 명문을 양각으로 새겼다. 그에 반하여 선림원지 종만이 외부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곳에 명문을 새긴 것은 번잡한 명문이 오히려 범종의 미감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감안한 의도적인 배려로 보인다. 앞으로 우리도 현대의 범종을 제작하는데 있어 꼭 참고 할 부분이다.

기록된 명문은 ‘貞元卄年甲申三月卄三日當寺鍾成內之, 古尸山郡仁近大紫草里 施賜乎(?)古鍾, 金二百八十廷뎠寺古鍾金二百卄廷此以, 木爲內十方旦越勸爲成內在之, 願旨是者法界有情皆佛道中到內去誓內, 時寺聞賜主信寅(?)夫人君, 上坐 令妙寺 日照和上, 時司 元恩師, 鍾成在佰士 當寺 覺智士, 上和上 順應和上, 良惠師, 平法師, 善覺師, 如住(?)師, 牛誓師, 宜司 쟉覺師, 節唯乃 同說師’ 이다.

 

첫 행은 ‘정원이십년(貞元卄年) 통일신라 애장왕(哀莊王) 5년인 804년 갑신년 3월20일에 당사(當寺)에서 완성한 종’이란 내용이다. 당사는 바로 이 종이 발견된 곳인 선림원지이지만 홍각선사(弘覺禪師) 비문에 보이는 ‘선사가 60세(873년)에 다시 설악산(雪山)의 억성사(億聖寺)에 주석(主席)했다’는 내용을 통해 억성사가 바로 선림원(禪林院)이라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다음 행의 ‘인근대말(仁近大)’의 인근과 ‘자초리(紫草里)’는 인명이며 ‘시사호(施賜乎(?))’는 시주(施主)하다는 뜻으로 풀이되어 ‘대마말의 직분을 가진 인근과 자초리가 고종(古鍾) 이백팔십정(二百八十廷)을 시주하였다’는 내용이다.

 

복원된 선림원지 종.

다음 줄은 ‘시방의 단월(旦越, 시주자)이 노력하고 성취하여 법계의 불도에 도달하기를 서원(誓願)한 때’로 해석된다. 다음 행의 ‘사문사주신인부인군(寺聞賜主信寅夫人君)’은 ‘절에서 듣고 하사(下賜)한 분은 신인부인(信寅夫人)이다’라는 의미이고 그 다음부터 마지막의 인명들은 주로 종 제작과 관련된 인명들을 나열하였다. 첫줄의 ‘상좌 영묘사 일조화상(上坐 令妙寺 日照和上)’과 ‘시사(時司) 원은사(元恩師)’는 주종에 관련된 감독들이며 ‘종성재백사(鍾成在佰士)’는 성덕대왕 신종에 기록된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 차박사(次博士)’와 마찬가지로 종 주조에 관계된 기술자로 보인다. 다음 행의 ‘상화상 순응화상(上和上 順應和上)’은 해인사(海印寺) 개창(開倉)과 관련되어 잘 알려진 인물이다. ‘절유내(節唯乃)’의 절은 이두로서 ‘그 때’라는 의미로서 유내는 상원사종에도 보이는 ‘유나(維那)’와 같은 표현으로서 여기에 기록된 스님들 역시 주종 감독자(鑄鐘 監督者)로 추측된다.

 

이 종의 실물은 파손이 심하여 세부를 볼 수 없지만 남아있는 사진과 실측 도면을 통해 대체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우선 이 범종은 8세기 통일신라 종에 비해 그 크기가 현격히 줄어들면서 종신의 외형이 세장하게 보이는 것이 9세기에 들어온 새로운 변화라 할 수 있다.

 

역동감 없이 어딘지 느슨해진 용뉴는 목이 가늘며 뒤에 붙은 음통은 3단으로 구분되어 연판문을 장식하였고 불룩이 솟아오른 천판에는 아무런 문양이 시문되지 않았다. 상대에는 당좌를 반으로 자른 것 같은 반원형 원권문(圓圈文)을 하단에 붙여 반복 배치하고 그 외구와 여백 면에는 당초문을 촘촘히 시문하였다.

 

국군이 퇴각하면서 월정사를 불태울 때 함께 소실된 선림원지 종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故 황수영 박사.

하대에는 불좌상(佛坐像)을 연이어 배치한 구조로서 상원사종, 일본의 운쥬지종(雲樹寺鐘)과 같은 8세기 종의 문양을 따르고 있지만 약간의 도식화가 엿보이기 시작하였다. 연곽에는 상대의 문양과 동일한 반원권의 연화 보상화문이 장식되었고 연곽 안에 장식된 9개씩의 연뢰(蓮잎)는 그다지 높게 돌출되지 않았다. 앞 시기의 통일신라 범종에 비해 종신의 하대에서 훨씬 위로 올라온 곳에 2개의 당좌가 배치되었다. 당좌는 원권(圓圈)을 3구로 나누어 가장 안쪽 내구에는 작은 자방 주위를 8엽의 중엽 연판문으로 둘렀으며 중구는 보상화문으로 장식하였다.

 

다시 이 바깥을 복잡하게 굴곡진 당초문으로 외구를 장식한 뒤 전체를 연주문대로 두른 모습이다. 이러한 당좌 문양은 상원사종보다는 힘이 빠진 듯 조금 느슨하게 보이지만 장식적인 화려함이 강조되었다. 당좌와 당좌 사이의 종신 앞, 뒷면에는 당좌와 거의 같은 높이로 연곽 바로 아래 배치된 2구 1조의 주악상이 부조되었다. 몸 뒤로 피어오른 구름 위에 놓인 연화좌에 앉아 횡적과 요고를 연주하는 모습으로 상원사종, 운수사종에 보이는 정면관의 무릎을 꿇은 궤좌형(뱌座形) 주악상에서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로 변화되었다.

 

여기에 구름 위에 별도로 추가된 연화좌의 표현도 새로운 요소라 할 수 있다. 머리 뒤로 굴곡을 이루며 부드럽게 흩날리는 천의 자락도 훨씬 간략화 되었으나 고부조 된 주악상의 얼굴과 신체의 모델링은 아직까지 생동감을 잃지 않았다.

이 종은 통일신라 804년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당시의 관직명과 이두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인 동시에 비록 완형은 아니지만 통일신라 9세기 초의 편년자료로서 중요하다. 여기에 원래 종의 용뉴에 달았던 당시의 철제 고리가 함께 발견되어 남아있는 점에서 그 가치를 더해준다.

 

▶여음(餘音)

1948년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우연히 그 모습을 드러낸 선림원지 종은 해방 이후 최고의 발견이라고까지 여겨졌지만 불과 3년만에 그 원형을 잃고 말았다. 차라리 이때 발견되지 않고 후대에 세상에 출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선림원지 종이 지녔던 위풍당당한 모습은 사진으로 밖에 확인할 길이 없지만 국립춘천박물관의 한켠에 불에 타 갈라진 모습으로 전시되어 있다. 한번 파손된 문화재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는 생생한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주듯이!

 

[불교신문3289호/2017년4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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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복지재단(대표이사 효암대정사)이 대전시로부터 수탁운영하는 용문종합사회복지관이 지난 20일 홍선기 대전시장, 가기산 서구청장등 내외인사 3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개관식을 갖고 운영

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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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19 현재)

 

  보도자료
2012년 9월 27 일 00시배포   2012년 9월 27일 00 시부터 배포
총 3 쪽, 첨부 : 사진 5장   담당부서 : 학예연구실 전시담당 : 이 용 현
☎ 033-260-1537, FAX 033)260-1530
홍보담당: 최 병 덕 033)260-1521,fax 260-1529 이메일: ns1255@korea.kr
 
이두가 씌여진 국보급 통일신라 범종

‘선림원종’코너 보완, 신설

□ 국립춘천박물관(관장 최선주)은 2012년 10월 1일(월)부터 상설 제2전시실에서 ‘선림원종’ 코너를 선보인다. 선림원종은 통일신라시대의 범종梵鐘으로, 미술사, 금속공학, 국어학, 서예학, 보존과학 등 여러 방면에서 주목하는 국보급 통일신라의 범종인데, 이를 종합적으로 전시 소개한다.

 

□ 기존에는 복원된 종과 비천상이 있는 부분만 전시되어 왔지만, 새롭게 명문부분은 물론, 기존에 공개된 적이 없는 종을 거는 고리인 현가懸枷쇠, 종의 파편 5점을 함께 최초 공개한다. 아울러, 파손되기 이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유리건판사진도 공개할 예정이다. 전시보완을 위해 특별 제작한 탁본 사진도 참고자료로서 함께 선보인다.

 

□ 범종이란 절에서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시각을 알리는 데 쓰이는 종을 일컫는데, 단순한 청동제품을 넘어 음향효과를 내기 위해 구리와 주석을 적절한 비율로 섞고 이상적인 비례와 안정감 있는 구조를 위한 고도의 제작기술이 필요한 과학과 예술의 집대성품이었다.

국내에 남아 있는 명문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범종은 국립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804년), 오대산 상원사의 상원사종(725년)과 함께 선림원종 뿐인데, 선림원종은 이두로 쓰여 있어, 고대 우리말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此以本爲(차이본위: 이것으로 근본을 삼아)”와 같이 우리말 어순으로 한자를 표기하기도 하고, “成內在之(성내재지: 이룬 것이다)”와 같이 복합적인 종결어미가 보이는 귀중한 자료다. 또 두 글자의 관등 나말乃末이나 관직 박사伯士를 한 글자로 쓰는 독특한 서체가 보인다.

한편, 종을 거는 버팀인 현가쇠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이 선림원종 뿐이어서, 귀중한 국보급 범종이라고 할 수 있다.

 

□ 1948년 양양 선림원지에서 한 벌목공에 의해 발견된 선림원종은 인근 오대산 월정사에 옮겨 보관되었다. 그러나 6.25전쟁(한국전쟁) 때 절이 불타면서 종 역시 파손되었다. 이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옮겨 보관하게 되다가, 10년 전 국립춘천박물관 개관 때부터 국립춘천박물관에 이관되었다. 선림원은 양양에 설치된 승려의 수련원 겸 사찰로 추정된다. 이두로 씌여진 명문에는 이 종이 804년에 충북 옥천 지방호족의 재정 지원을 바탕으로, 당시 왕도인 경주 소재 영묘사의 큰 스님을 모시고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전국적인 규모로 이 범종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선림원종
 ▲ 현가쇠

 

▲ 선림원종 명문
▲ 선림원터

 

      

▲ 명문 탁본

 

 

출처 및 원본 : 국립 춘천박물관 사이트

http://chuncheon.museum.go.kr/_prog/gboard/board.php?code=kr_notice&GotoPage=1&code_group=&skey=d_subject&sval=종&tmpl=&linkid=040101&no=11510&parentno=11510&mode=list&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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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628 현재)

 

 

 

 성종사 복원

 

문화재명 : 선림원종 (복원)높이        : 122cm시대         : 통일신라

 

선림원지에서 발견되어 월정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6.25 전쟁 때 파괴되었으나, 다행히 그 잔편이 수습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종 내부에 이두로 된 명문이 있어 제작환경을 알 수 있으며, 발견 당시에 철제 항아리가 발견되어 명동(鳴洞 : 종 아래에 구덩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세 번째 오래된 종으로 크지는 않으나 신라종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세부수법이 실상사 파종과 비슷하다.   상대와 유곽대는 연화문과 보상당초문의 반원권 문양이고, 하대에는 연화좌에 두광과 신광으로 결가부좌한 19구의 불좌상과 그 양옆으로 비천상이 하강하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유곽 사이에는 휘날리는 구름 위에서 피리와 요고를 연주하는 두 구의 비천상과 당좌를 교대로 배치하였다.  잔편과 자료를 조사 분석하여 1997년 '성종사(聖鐘社)'에서 복원하였다.

 

출처 : 문화상품.com http://culturekr.com/jong/image/j1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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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5일 발췌 2014년 3월 2일 수정

 

 

 

 

 

貞元 20年 甲申(804), 청동, 전체높이 92.0cm, 주종장 각지, 국립춘천박물관
1948년 설악산에서 목탄에 싸인 채 발굴되어 오대산 월정사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불타고 현재와 같은 파편만 수습되었다. 불에 녹아 세부 문양이 분명하지는 않으나 복스러운 얼굴의 비천상과 연곽의 반원권 무늬 등이 통일신라 종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구름 위의 연화좌 위에 편히 앉은 비천상은 오른쪽은 북을 치고, 왼쪽은 피리를 불고 있는데 적당하게 살이 오른 통통한 몸매이다. 비천의 얼굴 표정은 평온하면서도 엄숙하며 몸동작은 고요하면서도 기품있다. 하대 무늬들은 매우 얕아서 은은한 느낌을 주는데 팔과 다리가 매우 늘씬한 보살들이 연화좌 위에 앉아서 두광과 신광을 갖춘 채 여러 가지 수인을 지으며 배치되어 있다. 이 보살의 좌우로는 합장을 한 채 하늘에서 빠르게 내려오는 비천상을 배치하였는데 이들 주위에 흐르는 구름무늬와 천의의 동세가 매우 커서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2007년 3월 25일 현재http://www.jikjimuseum.org/Gallery_200407/product/UnifiedSilla/03.asp2014년 3월 2일 현재==================================================================================

선림원지출토신라범종 [ 禪林院址出土新羅梵鐘 ]

 

 

 

 ▲ 선림원지출토종 복원품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xorud1350/462  2015년 5월 8일 현재

 

 

 

선림원지 출토 신라범종 탁본

 

[간략정보]
  • 한자
  • 분야
  • 유형
  • 시대
  • 성격
  • 제작시기/일시
  • 크기(높이, 길이, 두께, 너비)
  • 소장처
  • 집필자

정의]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선림원지(禪林院址)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범종.
[내용]
804년(애장왕 5)에 제작되었다. 1948년에 출토되어 1949년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이관, 보존되어 오던 중 6·25전란으로 월정사가 소실될 때 함께 파손되어 그 일부만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던 중 2002년도에 국립춘천박물관이 개관하자 다시 강원 지역으로 돌아왔고, 현재는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다.
* 2015년 5월 8일 현재 중앙박물관, 춘천박물관, e뮤지엄 등 해당 사이트에서 검색되지 않고 있음.
이 종은 총고(總高) 122㎝, 종신고(鐘身高) 96㎝, 구경(口經) 68㎝ 크기의 중종(中鐘)으로 출토 당시 철제현색(鐵製懸索)이 그대로 붙어 있었으며, 종신의 내부에 이두(吏讀)로 된 명문(銘文)이 있어서 주종(鑄鐘) 연대는 물론 승려·시주자 등 주성(鑄成) 관계 인물들을 알려 주고 있는 매우 귀중한 종이다.
또한 이 종은 국내에 남아 있는 범종 중 상원사종(上院寺鐘, 725)·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771)에 이어 세 번째로 오래된 종으로, 이들 2구의 종처럼 웅장한 편은 아니나, 종의 형식은 전형적인 신라종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세부의 표현 수법은 실상사파종(實相寺破鐘)과 매우 비슷하다.
균형감과 장식수법이 돋보이는 이 선림원지종은 전체적으로는 세장한 편이며, 음통(音筒)을 휘감은 단룡(單龍)의 종뉴(鐘鈕) 아래에 다소 볼록한 듯한 정부(頂部)의 종신(鐘身)이 연결된 형태로, 그 종신형은 견부(肩部)에서 벌어지며 내려오던 선이 종복(鐘腹)에 이르러서는 구연부(口緣部)를 향해 약간 오므라드는 듯한 선형(線形)을 그리고 있다. 음통은 3단구조인데, 표면에는 연판문(蓮瓣文)으로 섬세하게 조식(彫飾)되었다.
종신의 구조는 윗부분에 이중원권문(二重圓圈文)의 상대에 반원권문 연화보상화(蓮花寶相花)의 4유곽(乳廓)이 붙어 있으며, 그 아래 종복 부분에는 2체의 쌍주악 비천상(飛天像)과 2개의 이중원권연화문(二重圓圈蓮花文) 장식의 당좌(撞座)가 교대로 배치되었고, 아랫부분에는 19구의 불좌상(佛坐像)이 조각된 하대가 있는 구조이다.
비천상은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자락을 흩날리며 연화좌(蓮花座)에 앉아 횡적(橫笛)과 요고(腰鼓 : 장구)를 연주하는 모습인데, 구름과 천의자락·자세 등에서 아직은 생동감이 엿보이며, 특히 피리를 부는 비천상은 실상사종의 비천상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대체로 이 종은 안정감과 균형감이 있으며, 세부 문양도 고부조(高浮彫)의 돋을새김으로 섬세함과 장식성이 농후한 편이다. 이 종은 현재 비록 부분만 남아 있지만, 음통과 종신형·상하대·4유곽 및 비천상을 갖추고 있어서 상원사종·성덕대왕신종과 함께 그 뒤의 한국종(韓國鐘)의 규범을 이룬다는 점에서 공예사상 의의가 있으며, 주악비천상과 하대의 불좌상은 9세기 초의 불교조각양식을 살펴보는 데에 기준이 될 수 있다. 특히 이두명문은 인명·관직·지명 등을 알려 주고 있으므로 신라금석문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 「정원(貞元)20년재명신라범종」(이홍직, 『조선학보』 7, 1955)
  • 「정원(貞元)20년명동종분석」(황수영, 『고고미술』 32, 1963)
  • 「신라범종의 각부(各部) 문양소고」(이호관, 『문화재』 10, 1976)

출처 : 네이버를 통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2015년 5월 8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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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禪林院) 범종(梵鍾)(2-2,3-3)


원소재지(原所在地) : 강원도(江原道) 평창군(平昌郡) 진부면(珍富面) 동산리(東山里)
소재지(所在地) : 서울특별시(特別市) 국립중앙박물관(國立中央博物館)
연대(年代) : 804年(애장왕(哀莊王) 5年, 정원(貞元) 20年)
지정번호(指定番號) :
크 기 : 높이 122cm 구경(口徑) 68cm


이 범종(梵鍾)은 1948년 강원도(江原道) 명주군(溟州郡) 신서면(新西面) 미천리(米川里) 소재(所在) 선림원사지(禪林院寺址)에서 출토(出土)되어 1949年 11月 월정사(月精寺)로 이관 보존(移管保存)되어 오다가, 1950年) 6月 25日 한국전쟁(韓國戰爭)으로 인해 월정사(月精寺)가 소실(燒失)될 때 파손(破損)되어 일부 잔편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保管)되어 오고 있다. 고(故) 이홍직선생(李弘稙先生)의 보고서(報告書)3) 내용(內容)과 필자(筆者)가 조사(調査)한 내용(內容)의 탁본(拓本), 그리고 염영하선생(廉永夏先生)의 복원도(復元圖)4) 에 따라 살펴보면 상원사종(上院寺鍾)이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과 유사한 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웅건(雄建)한 맛은 없다.


또한 각부(各部)의 양식(樣式)도 신라종(新羅鍾) 특유(特有)의 양식(樣式)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 형태(形態)나 조각수법(彫刻手法) 등이 뚜렷하게 우수하지 못하면서 그 나름대로 신라종(新羅鍾)의 양식(樣式)을 갖추고 있는 범종(梵鍾)으로서, 견대(肩帶)는 상원사종(上院寺鍾)과 같이 반원권(半圓圈) 문양(紋樣)을 12個 연속적으로 배치(配置)하고 있고 그 원권(圓卷) 중앙(中央)에 연화문(蓮華紋)을, 그 외부(外部)에는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으로 조식(彫飾)되어 있다.


하대(下帶)에 속하는 구연대(口緣帶)에는 연화대좌상(蓮華臺座上)에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갖추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불상(佛像) 19체(體)를 나타내는 조식법(彫飾法)으로 하대(下帶)의 주문양대(主紋樣帶)로 하여 견대(肩帶)와는 상이(相異)한 문양대(紋樣帶)로 한 것 이 또한 특색(特色)이다. 유곽대(乳廓帶)의 문양(紋樣)도 견대(肩帶)의 문양(紋樣)과 동일(同一)하게 처리(處理)하였으며, 팔판(八瓣)의 연화문(蓮華紋) 당좌(撞座)를 2개소(個所)에 배치(配置)하였다. 비천상(飛天像)은 당좌(撞座)와 교호(交互)로 종신(鍾身)에 나타내고 있고, 비천(飛天)의 형태(形態)도 비운상(飛雲上)에 연화좌(蓮華座)를 갖추고 그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횡적(橫笛)을 불고 있고, 다른 비천(飛天)은 요고(腰鼓)를 두드리는 상(像)으로 나타내고 위로는 천의(天衣)가 바람에 휘날리는 형식(形式)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견대(肩帶)와 유곽(乳廓)․하대(下帶)․비천(飛天) 등이 상원사종(上院寺鍾) 보다도 퇴화(退化)된 수법(手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주목(注目)된다. 이것은 이미 명문(銘文)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그 시대(時代)가 상원사종(上院寺鍾)보다 79년(年)이나 뒤떨어지는 작품(作品)으로 인해서 오는 수법(手法)이 아닌가 생각된다. 명문(銘文)의 정원이십년갑신삼월이 십삼일(貞元卄年甲申三月卄三日)은 당(唐) 덕종(德宗)의 연호(年號)로 이십년갑신(卄年甲申)은 804년(年)인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5年에 해당되며, 명문(銘文) 중(中)에는 이두(吏讀)․인명(人名)․관직(官職)․지명(地名) 등의 기록(記錄)이 보이고 있어 말기(末期)의 귀중
(貴重)한 자료(資料)가 된다.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1996년 간 한국의 범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