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한글날에

korman 2006. 10. 8. 14:58

 

몇해전 우리나라의 전직 대통령 한분이 현직에 계실 때 말레이시아를 공식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이분이 방명록에 서명을 하는데 아주 멋진 솜씨로 “大韓民國 大統領 金 아무개”라고 휘둘러 쓰시는 것을 보고 잠시 흥분하였던 기억이 있다. 방명록에 이렇게 한자로 서명하는 모습은 각국 기자들에 의하여 많은 나라에 소개 되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대통령인고로 그냥 한글로 “대한민국 대통령 김아무개” 라고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국제적인 전시회에 참여하면 각 나라를 여행하는 것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다. 어찌 보면 여행이란 한정적인 시간과 경비 때문에 여행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 이외에는 전 세계 5대양 6대주를 골고루 여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전시회에 참여하는 것은 전 세계 사람들을 골고루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하거니와 모르고 있던 나라들을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나는 다행이도 직업상 국제적 전시회, 그것도 자연과 역사와 교육과 문화가 곁들여진 전시회에 여러 번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많은 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 한국이라는 나라는 올림픽 이전만 하여도 일반적인 보통 외국사람들에게는 별로 알려진 나라는 아니었다. 그러나 올림픽과 월드컵이라는 국제적 이벤트를 개최하면서, 또 최근에는 IT 강국으로 급부상하면서 국제사회에 많이 알려지긴 하였지만 아직도 남북한을 구분하고 지리적 위치 등을 알고 있는 보통 사람들은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는 물론 여행하는 도시의 일반 시민들도 있었지만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았고 그들은 일반인들 보다는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속한 많은 도시들과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내가 그들로부터 한국에 관하여 받은 질문 가운데 가장 많았던 것은  불행이도 한국에 한국말이 있으며 한국 글자가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한국에 관하여 제법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도 이런 질문을 해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 한국에서는 중국말이나 한자 또는 일본말이나 일본 글자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서두에서 이야기한 전직 대통령을 보고 잠시 흥분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럴 때면 나는 항상 그들의 명함 뒤에 한글로 그들의 이름을 적어주곤 하였다.


더 불행한 것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우리 스스로 없애버리는 사실이다. 이제는 동네 구멍가계도 “연다”, “개점한다”는 말은 살아지고 노인네들도 “오픈”한다고 쓴다. “개업예정”이나 “개봉박두”로 씌어져야 하는 곳에는 “Coming Soon"이라고 하고 ”창업 000년“ 이라고 쓸 자리에는 ”Since 000"라고 쓴다. 철자법 까지 틀려가며 굳이 영어로 표기하는 곳도 많이 있다. 방송이나 신문에서는 한수 더 뜬다  “지방방송”이라고 잘 쓰다가 어느날 “로컬방송”이라 쓰고 “잘먹고 잘살기”하면 될 것을 “노블리제 노블리쥬”라 쓰고는 유식한 사람들끼리 노블리제가 맞네 노블리쥬가 맞네하고 서로 다투고 있다. 운동 경기에서 “응원단”이라고 잘 써 왔는데 어느 날 부터 “서포터스”라는 말을 쓰고 있고 “추가시간”이란 말을 잘 쓰던 사람이 지금은 “인저리타임”이라고 한다. “로드맵”이니 “태스크포스”니 하는 말들은 예전에는 모두 우리말로 표기되던 말들이고 또 표기될 수 있는 말들이다. “유행”이나 “추세”라는 말은 안 쓰고 이제는 “트렌드”라고 한다.


일전에 부산에서 “어머니 폴리스”, “스쿨 폴리스”라는 단체가 생겼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아끼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런데도 “어머니 경찰대”, 학교 순찰대“등으로 표현하면 될 것을 학교단체에서 굳이 폴리스라 표기하는 것은 또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말에는 외래어라는 것이 있다. 외국말을 우리말로 고칠 수 없을 때 외국어 표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말과 같이 혼용하여 우리말화 된 단어들이다. 그렇다 해서 우리말로 고칠 수 있는 외국어를 마구잡이로 우리말과 혼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각 민족의 고유의 말과 글을 동시에 소유한 민족은 5개 민족인가 6개 민족인가 되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 한국어와 한글

* 중국어와 한자

* 인도의 범어 (산스크리트어)

* 아랍어와 아랍문자

*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자

* ?


유럽에도 수없는 언어들이 존재한다. 미국이나 남미에도 각기 다른 언어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이 쓰는 문자는 모두 그리스 문자를 변형시킨 글자이다. 아시아에도 많은 언어가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나라들이 고유의 문자가 없어 영어 알파벳이나 한자를 빌어다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프리카에서는 아예 남의나라 말과 글을 그대로 사용하는 국가가 많다. 


이런데도 우리는 어떠한가? 고유의 말과 문자를 동시에 소유한 몇 안 되는 민족이면서도 시대가 변화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말과 글을 지금 우리 스스로 버리고 있다. 인도에서 최 상류층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영어만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우리도 그 뒤를 따르려는 것은 아닌지.


근자에 와서 회사명을 서양식으로 바꾸고 무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서양이름을 갖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상대국들과 격의 없이 좀 더 친밀하기 위한 수단이기에 이를 탓 할일은 못되지만  “할아버지”라는 발음이 되지 않아 “하찌”라고 하는 두살박이 아이에게 할아버지 “씨유레이러”라고 하라고 강요하는 조카를 보면서 이 한글날 문득 두서에 소개한 그 전직 대통령을 생각한다. 그 장면을 뉴스에서 본 다른나라 사람들은 한국에서는 중국말과 중국글자를 나라의 국어와 문자로 사용한다고 알았을 것이다.


비록 우리나라 말의 70%가 한자어로 구성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외국어를 남발 하여도 되는 것인지 한글날을 맞아 생각해 본다.  


그런 질문을 받기 시작한 이래로 난 명함에 한자를 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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