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고려의 종

북한 개성 연복사 종

korman 2007. 3. 26. 21:35

[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29> 연복사종

 

우리나라와 원나라 양식 혼합·절충된 작품

 

이번 호에 소개할 연복사종은 엄격한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나라 종은 아니다. 그러나 고려 후기 1346년 당시 연복사종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제작 배경이나, 이 종이 만들어진 이후 한국 범종에 새로운 양식이 유입됨으로써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원나라 장인이 만든 종으로 음통이 사라진 쌍용의 용뉴 종 끝 나팔꽃 모양 곡선 특이 전란으로 고려 장인사회 단절  기술적 역량 퇴보 잘 보여줘.

◀ 중국 원나라 장인의 손을 빌어 만든 북한 국보유적 124호

    연복사종은 고려 1346년에 높이 3.2m크기로 조성됐다.

 

원나라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고려 후기에는 금강산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불교미술품이 제작됐다. 원나라의 순제(順帝)와 기황후(奇皇后)가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를 중창하고 무진등(無盡燈)을 발원한 내용이 대표적이다. 또 금강산을 배경으로 고려 태조(太祖)가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을 친견한 장면을 그린 노영(魯英)의 담무갈·지장보살 현신도(1307년)를 비롯하여 금강산에서 출토된 두 구의 금동보살좌상, 이성계(李成桂) 발원 사리기 등과 같이 라마 양식을 따른 불교미술품이 금강산 일대에서 제작됐다. 이는 원(元)과 고려 왕실이 금강산을 신성시 한 불교적 배경과 연관할 수 있겠다.

 

연복사종 또한 이런 맥락에서 조성됐다. 연복사종은 강공금강(姜公金剛)과 신후예(辛候裔)라는 두 사람의 중국 장인이 주조했다. 이 종은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건너온 중국 장인이 금강산에서 종을 만들고 돌아가는 길에 고려 충목왕(忠穆王)과 공주의 발원으로 연복사(演福寺)의 옛 종을 다시 만든 것임을 기록된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지정정해 령자정원사 강공금강, 봉천자지명, 내주대종, 각이현지우점지상(하략) (至正丁亥 令資正院使 姜公金剛, 奉天子之命, 來鑄大鍾, 閣而懸之于岾之上(下略)’, (이곡, ‘동유기’ <동문선>권71기). 이후 조선시대의 기록인 <속동문선(續東文選)> 권21 ‘유송도록(遊松鄕錄)’에도 ‘연복사에는 추려(追)가 심히 고아하고 종면에 이곡(李穀)이 기(記)를 새긴 종이 있다’고 하여 연복사에 오랜 기간 이 종이 그대로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57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강세황(姜世晃)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의 ‘개성남문루도(開城南門樓圖)’에는 이 종이 연복사가 아닌 개성 남문 위에 걸려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이 그림이 그려졌던 18세기 중엽에는 이미 연복사가 폐사된 듯 종이 개성 남문루로 옮겨졌으며 그 시기는 채수(蔡壽)가 ‘유송도록’을 기술했던 16세기 초 이후부터 18세기 중엽 사이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 연복사종이 걸린 황해북도 개성시 남문루.

 

현재도 이 연복사종은 그때 이후 그대로 북한 개성의 남문루(南門樓) 위에 걸려 있다. 그 형상을 살펴보면 높이가 3.2m에 직경이 2.03m에 이르는 대종으로서 정상부에는 한국 종의 단룡과 달리 음통이 사라진 쌍용의 용뉴로 구성되었고 종신 어깨 부분에는 범자문이 장식된 방형 연판을 유려하게 둘렀다. 종신의 중간에는 여러 줄로 융기된 횡대(橫帶)를 둘러 상·하 부분으로 구분하였는데, 이 상·하면에는 각각 결박형의 방형 구획을 만들어 상부의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삼존불(三尊佛)로 구성된 비로자나불, 석가불, 아미타불, 약사불을 사방불 형식으로 시문하였다.

 

또한 이 사방불 사이의 구획마다 위패(位牌) 모양의 원패(願牌)를 장식하여 그 안에는 각각 ‘불일증휘(佛日增輝)’, ‘황제만세(皇帝萬歲)’, ‘법륜상전(法輪常轉)’, ‘국왕천추(國王千秋)’의 명문을 새겨 넣었다. 이 원패에는 세 마리의 용을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연복사종의 주조 기술이 당시로서도 매우 뛰어났음을 잘 보여준다.

 

또한 하부의 방형 구획에는 앞서 동문선에 기록된 ‘연복사신주종명(演福寺新鑄鐘銘)’이 빽빽이 양각되었는데,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동문선에 수록된 내용 외에도 문장 뒷부분에 몇 줄의 글이 더 있으며 시주자 명단, 그리고 첫줄의 ‘지정육년(至正六年)…’ 앞에 ‘대원(大元)’이라는 명문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동문선의 편찬자가 이 종명을 싣는 과정에서 일부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시킨 것으로 보이며 첫 머리의 대원의 문구는 의도적으로 제외시켰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종신의 중단에 있는 횡대 바로 아래, 위로는 각각 범자(梵字)와 팔리어를 가득히 새겨 놓았다. 그 아래로는 파도문과 동물문이 장식된 하대를 만들었으나 종구(鐘口)에서 훨씬 상부로 치우쳐 있으며 하대 아래로 팔궤(八卦)가 배치된 점도 주목된다.

 

뿐만 아니라 종구 쪽으로는 문양이 없이 폭이 넓은 하대를 두었고 그 끝부분도 마치 나팔꽃 모양으로 팔릉형(八稜形)으로 굴곡지게 처리하여 우리나라 전통의 범종양식과 판이하게 다른 중국종의 형태와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외형적인 모습은 연복사종이 당시 중국 원대의 종 양식을 적용한 것으로서 이는 두 사람의 중국 장인에 의해 총괄적인 제작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종신에 새겨진 양각명(銘)

 

그러나 연복사 종에 보이는 몇 가지 독특한 요소와 특히 이 종 제작과 관련된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본다면 이 종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파악된다. 우선 이 기록에서는 “그때 산 근방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다투어 이 공사(鑄鐘)에 달려와 생활을 유지하였다(時旁山諸郡飢, 其民爭趨工得食生活)”고 하여 당시 종을 주조할 때에는 많은 수의 일반 백성이 노역에 참여한 사실도 알 수 있다. 또한 인천시립박물관에 소장된 대덕2년명(大德二年銘, 1298)종과 같은 원대의 종이 대부분 철종(鐵鐘)이면서 방형 구획이 아닌 결박형의 가사문대(袈裟帶文)를 둔 점이나 종구가 나팔형으로 크게 벌어져 보다 굴곡진 팔릉으로 구성된 것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물론 연복사종이 이보다 약 반세기 뒤에 제작된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 재질이 철제가 아닌 청동이며, 위패형 명문구와 사방불(四方佛)이 시문된 점, 그리고 종구가 아직까지 크게 벌어지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아직까지 우리나라 종의 양식이 일부 잔존한 것으로 짐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나라 종과 원대 종 양식이 혼합, 절충을 이룬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연복사종과 같은 대종을 새로 만들고자 하였으나 이를 만들 기술자를 구하지 못해 결국 중국 장인의 솜씨를 빌어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기록은 오랜 기간의 전란 이후 극도로 황폐해질 수밖에 없었던 고려 장인사회의 단절이나 기술적 역량의 퇴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장인 사회의 침체를 볼 수 있는 단편적인 기록이 있어 주목되는데, 원나라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공인(工人)을 보내주길 요청하나 그에 대한 거절의 답변을 담은 ‘송철리타관인서(送撤里打官人書)’라는 이규보(李奎報)의 서간(書簡이 그것이다.

 

이 내용 중에는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공인(工人)들이 적어 모자라고 기근과 질병으로 많이 죽었으며 또 귀국(貴國)의 빈번한 침략으로 해를 당하여 그로 인해 흩어져 버리거나 농민이 되는 등 전업(專業)을 한 자가 많은 고로 부득이 보낼 수 없다”(<동국이상국집> 권28, 서(書)·장(狀)·표(表), ‘송철리타관인서’ 및 동문선, 권61 서)고 하여 당시에 우리나라의 장인이 전란으로 인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쌍용의 용뉴.

 

이를 반영하듯 이 시기에 명문이 있거나 양식적으로 뛰어난 금속공예품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 여기에 원대의 침입과 복속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문화 전반에 걸친 외부적인 자극과 그 수용을 통해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 초기의 종은 중국 종 양식을 반영한 새로운 요소가 크게 유행을 하게 된다. 즉 음통이 없어지고 한 마리의 용뉴는 쌍룡으로 바뀐다. 입상화문대는 소멸되며 연곽은 점차 상대에서 떨어져 보다 밑으로 내려오며 당좌가 아예 없어진다. 또한 종신의 중단쯤에는 중국 종에서 볼 수 있는 횡대(橫帶)와 유사한 두, 세 줄의 융기선 장식이 첨가되며 하대가 종구에서 위쪽으로 올라가 배치되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1392년에 제작된 남한산성의 장흥사종(長興寺鐘, 139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미약하나마 고려시대의 전통형 범종을 계승한 작품도 간간이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도 계승을 이룬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 전기에 왕실 발원 범종이 주로 중국종 계열을 따른 작품이라면 사찰의 범종은 이러한 전통 범종을 고수함으로써 조선시대 범종은 시대별, 제작자별로 다양한 형태와 양상을 지니며 꾸준히 제작된다.

 

[불교신문3385호/2018년4월18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65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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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8일 현재 관련사이트 http://north.nricp.go.kr/nrth/kor/cul/cul_view.jsp

 

지정번호 :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36호

소재지 : 개성시 북안동 남대문 누각

시대 : 고려시대

종류/분류 : 종

전체 높이 324cm, 종의 입지름 188cm, 두께 23cm, 무게 약 14t

 

북한의 보물급 제30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36호로 변경되었다. 1346년(고려 충목왕 2) 원나라 종장(鐘匠)이 만들어 연복사에 걸었던 범종으로, 1563년(조선 명종 18)에 연복사의 화재 때문에 개성 남대문루에 옮겨 걸었다. 종의 크기는 종입 지름 1.9m, 높이 3.12m, 두께 0.23m, 무게는 약 14톤이며, 동합금으로 만들었다.

국립 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보다 약간 작은 거종(巨鐘)이다. 중국 종에서 보이는 것처럼 종신 중앙에 여러 줄의 선이 있어서 상부와 하부가 나뉜다. 종걸이는 용 두 마리로 되어 있으며, 음통(音筒)이 없다. 종신에는 팔괘(八卦)가 새겨져 있으며, 사방으로 삼존불(三尊佛)이 양각되어 있다. 상단부에 종유(鐘乳)는 없고, 상대(上帶)에는 범자(梵字)가 새겨졌으며, 하대(下帶)에는 물결무늬 속에 물고기와 용이 새겨져 있다. 종신의 하반부에는 네 곳에 직사각형의 구간이 새겨져 있고 종입 부분은 8잎의 꽃잎처럼 곡선을 이루었다.

이 종에는 이곡(李穀)이 찬(撰)하고 성사달(成士達)이 글씨를 쓴 긴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는 1346년 원나라 순종(順宗)의 명을 받아 자정원사(資正院使) 강금강(姜金剛)과 좌장고부사(左藏庫副使) 신예(辛裔)가 금강산 장안사에 와서 범종을 만들고 돌아가는 길에 고려 충목왕과 덕녕공주의 요청에 의하여 주조하게 된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새벽 4시와 밤10시 성문을 열고닫을 때 종을 쳐서 알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매우 맑아 100여 리까지 퍼졌다고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연복사종 [演福寺鐘] (두산백과, 두산백과)

2014년 1월 18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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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췌 2009년 8월 27일 현재

 

 至正 6年(1346), 청동, 전체높이 324.0cm, 종높이 240.3cm, 입지름 188.0cm, 주종장 원나라 장인, 개성 남대문
3미터가 넘는 높이의 매우 큰 종으로 현재 개성 남대문에 걸려있다. 종의 아랫배 부분에 양각으로 주조된 명문에 따르면 1346년에 원나라 대장이 고려왕의 요청에 따라 만든 것으로, 한국의 전통 종 양식과는 구성요소가 다른 중국식 종이다. 종은 음통이 없고 용뉴가 쌍룡이며 상하대 문양대와 연곽 및 당좌가 없다. 굵은 선으로 종의 상·중·하를 구분하는 중국식에 따라 여러겹의 굵은 선으로 몸체 중앙을 가로질러 상하단을 구분한 후 각 단을 다시 4개씩 세로로 구분하였다. 이렇게 하여 상단에 있는 4개의 네모난 구획 안에는 각각 삼존불상을 배치하였고 각 구획 사이의 공간에는 원패를 하나씩 배치하였다. 하단에는 명문이 있으며 하단 아랫부분의 띠에는 물결무늬를 새기고 그 아래에는 팔괘를 하나씩 돌아가며 새겼다. 종 입구를 수평으로 처리하는 한국종과 달리 이 종은 아랫단을 물결 모양으로 처리하였다. 상단에 있는 삼존불은 모두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구름과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데 중앙의 본존과 연꽃을 손에 든 좌우의 협시불로 구성되어 있다. 본존은 매우 엄격하고 권위적이며 두터운 통견을 걸치고 있는데 정수리에서 뻗어나가는 빛이 사방으로 흘러가고 있어 한층 위엄을 더하고 있다. 이와 함께 4개의 원패에는 각각 '佛日增輝', '皇帝萬歲', '法輪常轉', '國王千秋'라고 발원문을 새겨, 황제와 국왕의 장수와 부처님의 법이 영원히 사방으로 전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원패에는 세 마리의 용무늬를 투각 장식하여 매우 화려하면서도 격식을 갖추고 있는데 세부의 조각이 생동감있고 섬세하다. 고려 후기에 연복사 종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다른 종은 현재 찾아볼 수 없으나, 조선 전기 종 중에서 천흥사 종, 구보신각 종, 낙산사 종, 봉선사 종 등이 한·중 혼합식으로 제작된 예로 남아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가면 중국종의 영향으로 종의 구성요소들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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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발췌 2008년 11월 22일 현재 

북한 문화재 개성 연복사 종

 

경기도 개성시 북안동 남대문루에 있는 고려시대의 범종. 크기는 높이 3.24m, 지름 1.88m, 두께 23㎝.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0호. 1346년(충목왕 2)에 주조하여 연복사에 달았던 것으로서 평양종, 강원도 평창의 상원사동종(국보 제36호), 경주의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 천안의 성거산천흥사동종(국보 제280호)과 함께 우리 나라 5대명종의 하나이다.

연복사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 있던 절 가운데서도 이름난 큰절로서, 옛날에는 개성 남대문 문루 위에서 서남쪽으로 연복사 경내에 서 있는 5층탑이 바라보였다고 한다. 이 연복사가 1563년(명종 18)에 화재로 타 없어지자 종을 남대문으로 옮겼으며, 그 뒤 1900년대 초까지 개성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기 위하여 울렸다.

연복사 종은 고려에서 주성하였으나 공장(工匠)은 원나라사람으로 고려종과는 형식이 다르다. 동합금으로 주조한 종의 무게는 약 14t에 달한다.

종구(鐘口)는 8통(八筒)의 파상으로 둘레에는 파상문이 있으며 그 사이에 8괘(八卦)를 주출하여 진귀한 의장을 보이고 있다. 종을 주조하게 된 인연은 원(元) 지정(至正) 6년(1346) 봄 강금강(姜金剛)과 신예(辛裔)의 정부양사(正副兩使)가 명을 받들어 금폐(金幣)로써 종을 금강산에서 주성하였다.

명문은 당대의 명신 이곡(李穀)이 지었으며, 성사달(成師達)이 썼다. 글씨는 자경 2㎝ 정도의 해서이다. 명문 말미의 병술(丙戌)이라는 간지는 고려 충목왕 2년(1346)으로 종의 주조연대를 밝혀주고 있다.

연복사종은 형태가 우아하고 조각들이 섬세할 뿐 아니라 소리 또한 아름답고 맑아 그 여운이 100리 밖까지 퍼졌다고 하며, 종의 명문은 고려시대 금석문 자료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朝鮮古蹟圖譜 7
≪참고문헌≫ 朝鮮金石總覽 上
≪참고문헌≫ 松都의 古蹟(高裕燮, 悅話堂, 1977)

출처 : 엠파스 박과사전 2008년 11월 22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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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36호
소재지 : 개성시 북안동 남대문 누각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전체 높이 324cm, 종의 입지름 188cm, 두께 23cm, 무게 약 14t
종류 :
 
북한의 보물급 제30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36호로 변경되었다. 1346년(고려 충목왕 2) 원나라 종장()이 만들어 연복사에 걸었던 범종으로, 1563년(조선 명종 18)에 연복사의 화재 때문에 개성 남대문루에 옮겨 걸었다. 종의 크기는 종입 지름 1.9m, 높이 3.12m, 두께 0.23m, 무게는 약 14톤이며, 동합금으로 만들었다.

국립 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보다 약간 작은 거종()이다. 중국 종에서 보이는 것처럼 종신 중앙에 여러 줄의 선이 있어서 상부와 하부가 나뉜다. 종걸이는 용 두 마리로 되어 있으며, 음통()이 없다. 종신에는 팔괘()가 새겨져 있으며, 사방으로 삼존불()이 양각되어 있다. 상단부에 종유()는 없고, 상대()에는 범자()가 새겨졌으며, 하대()에는 물결무늬 속에 물고기와 용이 새겨져 있다. 종신의 하반부에는 네 곳에 직사각형의 구간이 새겨져 있고 종입 부분은 8잎의 꽃잎처럼 곡선을 이루었다.

이 종에는 이곡()이 찬()하고 성사달()이 글씨를 쓴 긴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는 1346년 원나라 순종()의 명을 받아 자정원사(使) 강금강()과 좌장고부사(使) 신예()가 금강산 장안사에 와서 범종을 만들고 돌아가는 길에 고려 충목왕과 덕녕공주의 요청에 의하여 주조하게 된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새벽 4시와 밤10시 성문을 열고닫을 때 종을 쳐서 알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매우 맑아 100여 리까지 퍼졌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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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엔사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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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년
왼쪽)55.5×28.5cm
오른쪽)55.8×29.3cm

 

3미터가 넘는 높이의 매우 큰 종으로 현재 개성 남대문에 걸려있다. 종의 아랫배 부분에 양각으로 주조된 명문에 따르면 1346년에 원나라 대장이 고려왕의 요청에 따라 만든 것으로, 한국의 전통 종 양식과는 구성요소가 다른 중국식 종이다.
종은 음통이 없고 용뉴가 쌍룡이며 상하대 문양대와 연곽 및 당좌가 없다. 굵은 선으로 종의 상·중·하를 구분하는 중국식에 따라 여러겹의 굵은 선으로 몸체 중앙을 가로질러 상하단을 구분한 후 각 단을 다시 4개씩 세로로 구분하였다. 이렇게 하여 상단에 있는 4개의 네모난 구획 안에는 각각 삼존불상을 배치하였고 각 구획 사이의 공간에는 원패를 하나씩 배치하였다. 하단에는 명문이 있으며 하단 아랫부분의 띠에는 물결무늬를 새기고 그 아래에는 팔괘를 하나씩 돌아가며 새겼다. 종 입구를 수평으로 처리하는 한국종과 달리 이 종은 아랫단을 물결 모양으로 처리하였다.
상단에 있는 삼존불은 모두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구름과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데 중앙의 본존과 연꽃을 손에 든 좌우의 협시불로 구성되어 있다. 본존은 매우 엄격하고 권위적이며 두터운 통견을 걸치고 있는데 정수리에서 뻗어나가는 빛이 사방으로 흘러가고 있어 한층 위엄을 더하고 있다. 이와 함께 4개의 원패에는 각각 ?���佛日增輝?���,?���皇帝萬歲?���, ?���法輪常轉?���, ?���國王千秋?���라고 발원문을 새겨, 황제와 국왕의 장수와 부처님의 법이 영원히 사방으로 전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원패에는 세 마리의 용무늬를 투각 장식하여 매우 화려하면서도 격식을 갖추고 있는데 세부의 조각이 생동감있고 섬세하다.
고려 후기에 연복사 종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다른 종은 현재 찾아볼 수 없으나, 조선 전기 종 중에서 천흥사 종, 구보신각 종, 낙산사 종, 봉선사 종 등이 한·중 혼합식으로 제작된 예로 남아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가면 중국종의 영향으로 종의 구성요소들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출처 : 직지사 성보박물관

 

2008년 11월 22일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