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삼천포로 빠졌다
손에 익지도 않은 차를 연습도 하지 않고 운전하는 남편에게 연신 걱정스러운 눈치를 보이는 집사람을 옆자리에 태우고 집을 나선 게 아침 6시 반이었다. 경남 창원에서 토요일 오후에 딸아이를 결혼시키는 친구가 있어 핑계 김에 청명한 봄날 1박2일 남녘 부부여행이나 하자고 의견통일이 된 것이다. 하나님을 뵈러 가야 하기 때문에 자기부부는 못 간다는 친구가 카니발을 선뜻 내 주어 세부부가 동승하기로 하고 그 출발지가 우리집이 되어 내가 첫 번째로 운전대를 잡았다. 차안에 매달아놓은 그 친구의 십자가가 서툰 운전자도 보호하리라 생각하며 다른 친구들과 약속한 장소로 길을 잡았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라 하였던가. 그러나 지금의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선진국과 겨루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도로망과 대중교통수단으로 전국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있고 주요 도시들은 모두 일일 생활권으로 포함 된지 오래되었다. 또한 내비게이션이라는 그릇 속에서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 대는 여인네의 잔소리로 하여 그 거미줄 같은 길은 창원까지 외줄기가 되고 운전자를 자식같이 챙겨주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의 머리도 순간 외줄이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가 마산에 들러 그곳의 명물 아귀찜을 시식하고 창원에 도착하였을 때에도 2시 30분에 시작하는 결혼식을 보려면 한참을 기다려야했다. 애비의 손을 붙들고 식장으로 들어온 신부는 섭한 애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중 나온 신랑의 손을 반갑게 잡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들이 혼사를 치루면 “장가갔다”, “시집갔다” 라 하여 “갔다”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있던 집에서 다른 곳으로 갔다는 말이 되는데 가야할 사람들이 간 것이니 섭한 마음 없어지라고 그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가를 든 것은 다른 곳에 들어간 것이니 데릴사위일 테지만 며느리를 얻었다는 표현은 어디서 사람을 공짜로 얻어왔다는 표현 같아 삼가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신랑이 신부에게 직접 축가를 부른다 하여 아들 가진 우리 일행은 공동으로 노래방부터 알아봐야겠다는 농담을 하며 박수를 보냈다.
뒤에 남아있는 일이 있어 나머지 여정에 같이 못하겠다는 혼주친구 부부의 전송을 뒤로하고 향한 곳은 금산의 “보리암”. 저녁 무렵이었는데도 사람들과 차량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원래는 보광산이라 불리었던 높이 700m의 나지막한 이산의 이곳에서 이성계가 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개국하자 고마움의 표시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으라 하여 금산(錦山)으로 개명하였다는 박식한 친구의 설명을 들으며 암자 바로아래 매표소 입구 주차장으로 올랐다.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내려올 때 보니 산을 깎아 만든 길이라 경사가 보통이 아니었다. 내리막 브레이크 문제를 일으키는 차량들을 위하여 곳곳에 설치한 모래로 만든 안전시설이 보였다.
그냥 보통의 암자와 다를 바 없는 이곳의 유명세는 암자에서 바라본 시원하고도 오밀조밀한 한려수도의 경관 때문인가 생각 즈음에 지옥중생의 번뇌를 날려 보낸다는 범종소리가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타종에 나선 여승인 듯 한 작은 스님은 33번의 저녁 타종 횟수를 기억하기 위하여 한번 타종할 때 마다 옆의 주판알을 하나씩 밀고 계셨다. 유리창 앞에는 교회이름 붙이고 차 안에 십자가 흔들면서 암자에 오른 우리 일행의 번뇌도 스님의 종소리에 씻기기 바라며 보리암에는 보리가 없다는 썰렁한 농담을 하여본다.
봄날 남녘의 긴 해가 고맙다고 느끼면서 다시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에 의지하여 우리는 삼천포로 빠졌다. 이제 바다와 소주에 취할 시간이 가까워 오기 때문이다. 노랗게 일어나는 그러나 아직은 못다 핀 유채꽃 사이로 놓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라는 삼천포대교를 지나 어느 한적한 바닷가의 모텔에 여장을 풀고 허리띠도 풀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실개천을 건너기 전의 모텔에서 6만원 달라던 방값은 폭 1미터도 안 되는 다리를 건너자 3만5천원으로 줄어든다. 여기도 강남 강북이 있나? 맞은편 해안선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또 하나의 봄꽃처럼 느끼며 시간의 흐름을 따라 비릿한 바다 내음를 안주로 소주잔을 기울였다.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몇몇 어부의 움직임이 오히려 넓은 바다에 파장을 만들어 가고 있을 뿐 모텔의 앞마당까지 올라온 여명 속의 바닷물은 강물보다도 움직임이 없었다. 간밤의 숙취는 아침햇살과 어우러져 반짝이는 바다위로 날려 버리고 태극기 휘날리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다리 남해대교를 건너 우리가 멈춘 곳은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 하고도 드라마 세트장이었던 최참판댁과 그 마을이었다.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듯 잘 관리된 이곳에서 이제는 농촌에서 조차 찾아보기 힘든 초가집의 진한 추억을 떠올리며 마을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최참판댁앞 쉼터에서 바라본 널따란 악양들판이 바다와는 또 다른 시원함으로 다가올 즈음 영산강을 따라 길을 재촉하였다. 이 길의 그 아름다움은 이미 간첩들도 알고 있으리라.
가수 조영남씨가 틈만 나면 강조하던 전라도와 경상도를 아우르는 화개장터에서 구수한 공짜 당귀차 한잔으로 잠시 목을 축이고 내달은 곳이 남원 광한루. 주름 가득한 얼굴이 오작교를 건넌다고 춘향이 될까마는 광한루를 배경으로 찍는 사진을 마다하는 사람은 없다. 점심을 위하여 들른 전주의 유명하다는 비빔밥집은 그 유명세에 어울리게 정갈한 상을 차려 주었고 모주 한잔을 곁들인 본토의 비빔밥 한 그릇과 그 친절함에 우리 모두는 매료되었다.
승합차를 가져간 덕에 다른 차로에서 불쌍하리만치 기어가는 승용차들을 뒤로하고 버스 전용차로를 따라 거침없이 달려 양재동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6시도 되지 않은지라 자동차도 넘겨주고 저녁이라도 같이할 겸하여 아직 찬송가속에 묻혀있는 친구 부부를 불러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청명한 날씨에 취하고 온갖 꽃에 취하고 남녘 경치에 취하고 바다에 취하고 소주에 취하고 정갈한 음식에 취하였던 1박 2일의 남해여행을 마무리 하였다.
보리암의 부처님과 먼 길 차속에서 흔들림을 마다하지 않은 친구의 십자가에 감사를 드리며.......
2009년 4월 스무하룻날 Secret, G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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