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채소는 없다

korman 2009. 4. 13. 14:05

 

 

채소는 없다

 

 

조혜련이라는 여자 코미디언이 있다.

그녀는 피나는 노력으로 일본어공부를 하여

단기간 내에 일본인에 버금가는 실력을 쌓아

현재 그들의 언어로 그들을 웃기는 코미디언이 되었다.

일본TV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여

방송을 본 많은 일본인들이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고도 한다.

외국어로 해당국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일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는 한 또한

어려서부터 해당국의 문화를 접하지 못하는 한

해당언어에 통달한 사람이라도 힘든 일이라 한다.

그런 면에서 국내에서의 유명세가 밑바탕이 되었다 하더라도

노래로 승부하는 가수가 아니라 상대국의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놀 줄 알아야 할 수 있는 게 코미디언이라면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룩한 그녀의 성공은

일본에 진출하려는 우리나라 모든 연예인들의

본보기가 되는 대단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그런 그녀가 요새 인터넷에서 몰매를 맞고 있다.

일본의 한 영향력 있는 오락프로에 출연하여

일본의 국가와 같은 “기미가요”를 부른 가수에게

웃으면서 박수를 보냈다고 하는 게 그 원인인데

“기미가요”라는 것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그들의 천황에게 충성을 다 바치자는 내용의 노래로

법에 의하여 국가로 정식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일본의 국가로 사용되는 것이라 하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국민 모두가 최소한 하루에 한번은

이 노래를 부르도록 강요당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 시절을 살아오신 분들에게는 사실 이 노래는

기억하기도 싫은 그 끔찍했던 세월의 상징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오락프로그램에서 박수를 친 조혜련이

나라를 판 매국노처럼 몰매를 맞을 만큼 잘못한 일인지 궁금하다.

 

 

 

한 나라의 역사는 그 후손들에 의하여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치욕의 역사라면 더욱이 그러하다.

그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치욕을 인식하는 것만이

후손에게 같은 역사를 물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 일본에 의하여 35년 이상의 치욕을 당하였다.

그리고 그 치욕의 세월을 걷어 낸지도 6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아니 청산하지 않는 35년의 잔재는

그 세월의 거의 두 배 가까이 흐른 지금도 곳곳에 무한정 남아있다.

건설현장의 가다와꾸는 아직도 바라시되지 않고 있으며

이발소의 바리깡과 미용실의 고데기는 지금도 활동이 왕성하고

수족관에는 사시미의 존재가 주방장의 일본풍 가운으로 연결된다.

여자들은 지금껏 소대나시와 시치부를 입고 다니고 있으며

봉제공장에서는 여태 시다가 시야게를 하고 있고

정밀부품공장에서는 학교를 졸업하고 갓 입사한 기술자가

노기스를 모른다고 십장에게서 꾸지람을 듣는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에도 얼마나 많은 일본식 한자어가

표기되고 있는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치루는 국제간의 많은 공식적인 행사에서는

비록 불행한 과거가 있는 당사국이라 하더라도

정해진 절차에 따라 해당국의 국기가 오르고 국가를 연주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안에서도 가끔 기미가요는 연주되고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모두 예를 표시한다.

얼마 전에는 북한의 인공기와 북한국가가 서울에서 사용되었고

모든 관중은 원하던 원치 않던 일어나서 그에 예를 표시하였다.

이와는 좀 다른 경우라 하더라도

조혜련이 출현하였다는 오락프로그램에서 나온 일본가수가

“기미가요”를 부른 것은 가히 일본인적 발상이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TV 프로그램이었고 일본에서 행해졌다.

비록 그녀가 그 노래가 무엇인지 알았다 하더라도

방송 프로그램에서 웃으며 박수를 친 것은

우리가 공식 행사에서 원치 않는 나라에도 예를 표하듯이

기미가요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 노래를 부른 가수에게

출연자의 한사람으로 예를 표한 거라 이해하면 안 될까.

내가하면 로맨스라 하고 남이하면 불륜이라 하였던가.

가다와꾸는 바라시 되지도 않았는데 바리깡으로 머리를 자르며

소대나시와 시치부를 입고 사시미를 점심으로 들고는

요지를 찾는 사람들도 그녀를 몰매하고 있을까.

 

 

 

야채는 일본식 한자어이며 우리의 맞는 말은 채소라 한다는데

이른 아침 방송에서 우리말을 바르게 써야한다며

시청자들에게 채소라 하라고 그리 전한 방송국에도

야채는 있으되 더 이상의 채소는 없으며

대형 마트나 동네 장터의 채소가게에 또한

채소는 없고 야채만이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도 장을 보는 주부들은 채소는 사지 않고

야채 가격만을 묻는다.

독도는 아직 그곳에 굳건히 존재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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