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한산대첩에서 포로수용소로

korman 2009. 6. 8. 18:43

 

 

 

한산대첩에서 포로수용소로

 

      ▲ 통영 미륵도에서 바라본 바다

 

낯선 잠자리에서는 늘 보통 때보다도 일찍 잠이 깨진다.

새벽의 어촌풍경이나 내다볼까 바다 쪽으로 난 창의 덧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비는 그쳤으나 바다와 맞닿을 듯 낮게 드리운 검은 구름은

초여름 날씨가 무안스럽게도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내 보이며

창문을 흔드는 심한 바람과 함께 연안 바다의 일렁임을 크게 만들고

해안가로 밀려드는 너울을 헤집어 검푸른 바다를 하얗게 만들고 있다.

이런 것이야 다반사라는 듯 새벽의 어촌은 벌써 바쁘게 움직이고

파도를 밀치듯 물보라를 맞으며 나가는 작은 어선들이

바라보는 이방인의 마음을 걱정스럽게 한다.

여명 속 어촌을 산책할까 하던 마음을 창밖을 내다보다 접었다.

  

     ▲ 달아공원에서 본 바다

 

가족이 여행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숙소가 큰 문제인 듯싶다.

전국 곳곳에 이름도 별난 숙박시설은 많지만 비싼 호텔을 제외하면

온 가족이 낯 뜨겁지 않게 묵을 곳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 흔한 펜션인가 하는 곳도 이제는 모텔의 대체품으로 변해간다니.

몇 해 전 여름휴가를 위하여 딸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여행하다

아무데서나 묵고 가자고 들어간 낙안읍성 앞의 한 모텔에서

입구에 진열된 벌거벗은 비디오에 당황해본 경험이이 있는지라

통영시의 홈페이지를 뒤져 한적하고 전망도 괜찮을 성 싶은 이곳에

4인 가족실이라는 방을 예약하고 왔음에도 기분은 찜찜하였다.

TV의 리모콘에는 성인채널을 강조하여 새겨 놓았고

준비하여 준 욕실 용품들 속에는 고무제품도 있었다.

혼기가 찬 아이들이니 그런 것들이 있다 한들 대수는 아니지만

통영시에서 추천하고 가족이 같이 묵는다고 예약 하였으면

투숙객들의 모양새에 따라 객실용품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모텔 운영자의 현명한 운영의 묘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 달아공원에서 발견한 우리나라 지도 (클로바 군락)

 

바람은 아직 세차게 불고 있으나 구름은 서서히 벗겨지는 하늘을 보며

통영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라는 달아공원에 올랐다.

발아래 펼쳐진 통영의 바다 위에 부채꼴처럼 펼쳐진 양식장 부표들이

흡사 흰색 진주 목걸이를 한 줄로 이어 놓은 듯한 예쁜 모습으로

섬과 섬에 둘러싸인 연안 바다를 검푸른 색의 도화지로 만들었다.

연신 하품을 하여대던 아이들이 이 모습에 넋을 빼앗기고

공원과 바다 이곳저곳에 서로의 카메라를 들이댄다.

애비가 그만한 나이에는 필름 카메라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고르고 골라 한 장씩 찍던 사진이었는데 하는 격세지감을 느끼는데

엄마, 아빠에 셔터를 누르던 큰 아이가 예전에는 핸드폰이 없어

어디에서 어찌 만나고 데이트를 하였냐는 엉뚱한 질문을 한다.

다방 전화와 메모판을 이야기하며 통영 탐방 길에 올랐다.

 

     ▲ 해안 일주도로에서 바라본 바다

 

통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미륵도의 산양해안일주도로,

달아공원에서 이미 한 차례 탄성을 지르고 보고 있음에도

굽이굽이 일주도로를 따라 내려다보이는 모든 풍광들이

조금은 곡예 운전도 해야 하는 운전자의 시야를 괴롭히고 있다.

몇 굽이 돌고나면 바다는 더 안 봐도 될성싶은데

운전하는 큰아이의 고개가 한쪽으로 쏠려 돌아올 줄 모른다.

일주도로의 중간쯤에서 편한 구경하라 운전을 교대하고

좀 늦은 아침식사를 위하여 충무마리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게와 패류를 듬뿍 넣은 아침의 된장찌개를 어찌 표현해야 할까.

조금 남기고 온 국물이 지금도 아깝게 느껴진다.

 

        ▲ 충무 마리나 리조트

 

자연환경을 파괴한다고 참 말이 많았던 케이블카를 보러갔다.

이미 공원과 순환도로를 통하여 눈이 시리도록 보아왔음에도

더 높은 곳에서 주위를 조망하고 싶은 마음은 숨길 수 없는지

아이들은 케이블카 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10시가 채 되지도 않았는데 주차장에 차를 들이지 못한다.

전국의 관광버스는 모두 이곳으로 모이는지

모양도 색깔도 제각각인 버스들의 전국 번호판이 다 모였다.

길가에 주차한 버스에서는 말 그대로 구름 같은 사람들이

통영의 바다만큼이나 멋진 차림새를 하고 몰려나온다.

2008년에 개장 하였다는 이 곳 케이블카 매표소 건물에는

탑승객 100만명을 돌파하였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한 시간에 900명을 나르고 탑승시간은 편도 10분이라는데

우리가 도착한 때에 왕복하려면 1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아이들 둘만 태워 한 시간 후에 만나기로 하고

나와 집사람은 가까운 어촌마을에 한가로이 차를 세웠다.

케이블카를 타려고 구름같이 몰려드는 사람들에 비하여

양식용 조개껍질만이 가득 쌓인 어촌의 고요한 풍경이 이채롭다.

한 시간 후에 아이들을 만나기 위하여 다시 간 그곳에는

표를 사고 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이날 통영의 은행들은 금고가 부족할 것 같은 생각을 하며

충무공의 흔적을 찾기를 계속하기 위하여 서둘러 자리를 떴다.

 

  ▲ 케이블카 타고 바라본 통영시 전경

 

세병관. 그 옛날 통제영의 객사라 하는데 단일 건물 전체가

칸막이 없이 모두 나무 바닥으로 개방되어있다.

같은 형식의 건물이 경복궁 경회루와 이곳 두 군데라 하며

국보로 지정된 건물이라는데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마침 대학생들인 듯한 단체관람객들을 안내하기 위하여

통영시에서 나온 향토사학자 한분이 돌계단에 서서

400년이 넘은 돌계단 두 개가 아스팔트 아래에 묻혀있다고

우리나라의 역사 유물관에 대하여 개탄해 한다.

입구에 이곳 통제영 모두를 복원하기 위한 계획이 붙어있는데

조감도로 보아 무척이나 넓은 구역에 많은 건물이 있었다.

이제 아스팔트 아래에 묻혀있는 400년 계단도 곧 숨을 쉬리니

향토사학자의 안타까움도 더불어 풀어질 수 있으리라.

이곳 언덕 아래쪽에 충무공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충렬사가 있다.

목적은 같은 곳이지만 충무공이 안치 되셨던 남해의 그곳과는

역사적 인식에서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 충렬사 입구

 

임진란을 일으켜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왜군들은

충무공에 의하여 통영 앞 바다에서 분쇄되기는 하였지만

그 후 30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통영은 다시

그들의 흔적을 갖게 되었으니 이름하여 해저터널.

일제에 의하여 바다 밑에 아시아 최초로 건설되었다는 이 터널은

이제는 통영의 역사가 되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곳에 처음 온 외지인들은 이 해저터널을

바다 속을 관망하는 수족관 형태의 터널로 기대하였다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곤 하였다.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런 기대가 있었으니까.

터널을 나오자 열린 하늘엔 몇 점 흰 구름이 둥실 흘러간다.

문득 이 아름다운 곳이 고향인 박경리씨의 소설 무대는

어떻게 전라도땅 평사리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해저터널 입구

 

왕복표를 당연시 내어주는 매표원에게 편도만을 달라 하였다.

차를 싣고 가기 때문에 시간을 보아 통영으로 돌아오지 않고

한산도에서 거제도로 건너가기 위함이었다.

배를 기다리는 동안 큰 아이가 충무김밥을 몇 줄 사왔다.

우리 모두 말로만 들었을 뿐 아직 먹어본바가 없다.

그냥 밥만 넣어 작게 말은 김밥과 따로 먹는 오징어 어묵 볶음.

통상적인 김밥에 젖어있던 아이들의 표정이 참 묘하다.

뱃전에 기대어 김밥 한입 베어 물고 어묵 한 점 바라보는 사이

배는 어느덧 그 유명한 거북등대를 지난다.

1963년 한산도 앞 암초 위에 지었다는 이 유명한 거북등대는

내가 어린 시절에 배워 온 교과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통영과 한산앞 바다의 기념비적 존재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 거북등대

 

30분을 힘차게 헤엄쳐 온 카페리는

충무공의 흔적이 모두 배어있는 제승당 옆 선착장에

싣고 간 사람과 자동차를 모두 내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하나 같이 제승당을 향한다.

유람선을 타고와 또 다른 선착장에 내려진 단체광광객들은

거나해진 낮술을 견디지 못하고 발걸음으로 S라인을 그리며

일행 중 한 명이 옆 사람과 혀짧은 대화를 나눈다.

“여기가 어디여?” “이순신 죽은데랴”

“그런데 우리가 여기를 왜 왔어?”

신발을 벗고 수루에 올랐다. 햇빛에 빛나는 앞바다가 평화롭다.

왜군들은 이곳에서 충무공의 학익진에 걸려 괴멸되었다고 한다.

이 보석 같은 바다에 수장당한 왜군은 얼마였으며

나라를 위하여 한 몸 이곳에 던진 우리 수군은 또 얼마였을까.

충무공이 들었다는 한줄 피리소리는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우리 수군의 현대판 하모니카소리와 같은 것이었을까 생각 즈음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이 인솔교사의 안내로 들어왔다.

순간 한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이순신장군 무덤은 지금 어디 있어요?”

인솔교사는 그 답을 모르는지 아이의 질문을 무시해버렸다.

 

     ▲ 한산도 제승당의 수루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차를 몰아 한산도 순환 길에 올랐다.

섬 곳곳에 충무공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겠으나

순환도로의 풍경은 그저 아늑한 여느 섬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한산면 마을에 근접하자 바로 옆 추봉도로 넘어가는 다리가 나왔다.

이곳에 몽돌과 색채석이 아름답다는 봉암해수욕장이 있다.

수석을 모으는 사람들 사이에는 봉암수석으로 유명하다는데

그러나 하나의 몽돌이라도 반출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붙어있다.

초여름 햇볕에 몽돌은 벌써 달아올라 발바닥을 뜨겁게 한다.

파도가 밀려와 몽돌에 부딪치며 하얀 포말을 만들고

포말은 흩어지며 경쾌한 자연의 소리를 들려준다.

사실 몽돌해변에 부서지는 파도소리는

한여름 밤 몽돌에 누워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들어야한다

몽돌이 작을수록 그 소리는 애절해지고 그리움은 짙어간다.

 

     ▲ 봉암 몽돌해수욕장

 

제승당 선착장에서 왼쪽으로 조금 가면 소고포라는 곳이 있고

거제도로 가는 카페리는 이곳 선착장에서 출발한다.

반짝거리는 바다위에 뿌려놓은 하얀 부표사이를 뚫고 온 카페리는

우리를 싣자마자 곧 거제도 어구리 부두에 내려놓는다.

통영과는 달리 이곳으로는 15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굽이굽이 거제의 기분 좋은 해안선을 따라 달리다 들어선 곳,

우리 역사에서 결코 잊혀지면 안 되는 또 하나의 장소로서

거제 시내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이다.

거제도 앞 바다에도 옥포대첩이라는 충무공의 큰 업적이 있지만

이곳이야 말로 현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꼭 보아야 할 곳으로

내 자식들에게도 이곳이 중요한 장소라 여겨져

이번 가족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로 택하였다.

전쟁 통에 태어난 세대이기는 하지만 나도 6.25전쟁은 모른다.

그저 북녘에서 피난을 왔으니 집 안팎에서 주워들은 이야기 뿐,

전쟁 발발에서부터 처절한 삶을 이어가는 전장의 국민들,

포로수용과 반공포로석방, 휴전회담과 불행한 휴전선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희생한 우방 젊은이들의 이야기까지

이곳은 그 모두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는 곳이다.

이곳에서 보여주는 모든 것 위에 주워들은 풍월을 더하며

아이들과 같이 불행하였던 6.25의 역사를 인식하는데

긴 시간을 할애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러나 내 아이들이

6.25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조금은 가치가 있지 않았을까.

 

 

            

      ▲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TV에 무수히 나왔다는 주차장 옆 멍게비빔밥집에서

집에까지 가져가고 싶은 진한 바다 향으로 이른 저녁을 들고

단속카메라를 피해가며 고속도로를 숨차게 달려

집에 도착한 시각이 10시 30분,

몸과 마음이 바빴던 1박2일의 짧은 가족여행

그러나 가족 모두에게 의미 있는 여행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2009년 5월 열이렛날의 통영-한산-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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