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조선의 종

사인비구 제작 서울 화계사 동종 (보물 제11-5호)

korman 2010. 3. 5. 17:42

서울 화계사 동종

사인비구 제작 동종-서울 화계사 동종
(思印比丘製作 銅鍾-서울 華溪寺 銅鍾)
(Bronze Bell Cast by Buddhist Monk Sain)

 

종목: 보물 제11-5호(2000년 2월 15일 지정), 수량: 1구, 시대: 조선시대, 숙종 9년(1683년), 소유: 화계사

사인비구 제작 동종 - 서울화계사동종(思印比丘 製作 銅鍾 - 서울華溪寺銅鍾)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思印) 비구가 만든 사인비구 제작 동종 중의 하나이다. 조선 숙종 9년, 1683년에 제작되었다. 2000년 2월 15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이 종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사인비구의 종 가운데 쌍룡뉴 도입의 첫 번째 작품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상대와 유곽·위패·하대의 균형있는 배치방식에서 오는 공간의 안정감이나 세부표현에서 느껴지는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명문내용 또는 조선후기 승려들이 공명첩(空名帖)을 얻게되는 당시의 사회상황을 암시해주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광무 2년(1898년경상북도 영주시 희방사(喜方寺)에서 화계사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범종각 안에 놓여 있다. 삼각산 아래에 자리한 화계사는 중종 17년(1523년) 신월(信月)이 창건한 사찰이다. 광해군 10년(1618)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듬해 도월(道月)이 덕흥대원군 가문의 시주를 받아 중건하였고, 고종 3년(1866년) 용선(龍船)과 범운(梵雲)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중수하였다.

 

동종의 정상부는 음통(音筒) 없이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인 용뉴(龍鈕)만 표현되었는데, 천판(天板) 위에 당당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였다. 그 아래 종의 어깨 부분에 있는 상대(上帶)는 2단으로 처리하여 '六字大明王眞言'과 破地獄眞言'이라 쓴 글자를 새겼다.

 

상대 아래에는 유곽(遊廓) 4좌가 있는데, 각각 사각형이며 6엽(葉)의 연화좌를 마련하고 여기에 유두(乳頭) 9개씩을 배치하였다. 유곽 사이에는 위패(位牌) 4좌를 새기고 그 안에 '宗面磬石', '王道 隆', '惠日長明', '法周沙界'라는 글씨를 각각 새겼는데, 안성 청룡사동종에도 이와 똑같은 글씨가 있다. 종신(鐘身)은 어깨에서 곡선을 그리며 둥그스름하게 내려오다 종복(鐘腹) 부분에서 종구(鐘口)에 이르기까지 수직선을 이루며 내려온다. 이처럼 종구 부분이 오므라들지 않고 수직선을 보이는 것은 중국 원(元) 동종의 특징으로, 조선시대에서 17세기 이후에 보편화된 형식이었다. 그리고 종신 아래 하대는 상대와 마찬가지로 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넝쿨 사이로 활짝 핀 꽃무늬가 어우러져 있어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종신 표면에는 보살상 등 그 밖의 다른 문양 장식은 없고, 명문을 양각으로 새겨 넣었을 뿐이다. 명문은 전부 200자 가까이 되며 동종의 제작 시기, 봉안 사찰, 무게 등과 더불어 동종 제작에 참여했던 시주자와 장인(匠人)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康熙二十二年癸亥四月日 慶尙道豊基地西面小伯山喜方寺大鐘重三百斤鑄成也 供養大施主…緣化秩 通政大夫畵員思印 湛衍 雪玉 淸允 祖信 厚英 別座勝旭 供養主 惠熙 惠海 化主 淸信居士 道善

 

출처 : 위키백과 2022년 5월 7일 현재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9A%B8_%ED%99%94%EA%B3%84%EC%82%AC_%EB%8F%99%EC%A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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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비구 제작 서울 화계사 동종 (보물 제11-5호)

 

 


종 목 보물  제11-5호

명 칭 사인비구 제작 동종-서울 화계사 동종 (思印比丘製作 銅鍾-서울 華溪寺 銅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정(등록)일 2000.02.15

소 재 지 서울 강북구 인수봉로47길 117, 화계사 (수유동)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화계사

관리자(관리단체) 화계사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1683년에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종의 어깨 부분과 입구 부분에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몸통에는 사각형의 연곽과 그 사이에 위패 모양의 장식문양을 균형있게 배치하였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명문에 의하면 승려가 공명첩을 가지게 되었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어, 종 연구와 더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출처 : 문화재청 우리지역문화재 검색창 2017년 3월 18일 현재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2&VdkVgwKey=12,00110500,11
*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2017년 12월 11일 현재강희이십이년명 범종 으로 표기하고 있음.
http://portal.nrich.go.kr/kor/newSearchTotal.do#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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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 동종

 

• 코드: cp0501b06601 
 
• 명칭 : 화계사동종 
 
• 지정 : 보물 제 11-5호 
 
• 조성연대 : 조선 숙종 8년(1682) 
 
• 제원 : 180kg 
 
• 소재지 : 서울 화계사 
 
• 관리자 : 서울 화계사 
 
• 설명 
 
이 동종은 조선 현종∙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의 뛰어난 주종장(鑄鍾匠)이었던 사인(思印)스님이 만든 종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종각에 있지만 현재 타종하지는 않는다. 재질은 청동이다. 사인스님은 사원 세습으로 내려오던 승장(僧匠)의 맥을 이은 마지막 거장(巨匠)이며, 전통수법의 재현과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면서 창조적인 시각으로 자연을 조명하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불교 공예미를 표출시킨 명장(名匠)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으며,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인 용뉴는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였다. 사인스님의 종 가운데 쌍룡뉴(雙龍鈕) 도입의 첫 번째 작품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종의 상대와 하대는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종신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위패 모양을 균형 있게 배치하여 공간의 안정감을 준다. 
 
세부표현에서 느껴지는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조선후기 스님들이 공명첩(空名帖)을 가지게 되었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어, 종 연구와 더불어 사료로서도 가치가 크다. 
 
<자료참조 : 문화재청, 직지성보박물관, 사찰 홈페이지>
 

 

출처 : 한국콘텐츠진흥뤈 2017년 12월 7일 현재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7&cp_code=cp0501&index_id=cp05010076&content_id=cp050100760001&search_left_menu=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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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종(銅鐘)보물 제11-5호

 

범종각 천장에 걸려있는 조그마한 종이다. 크기는 작지만 3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유물이다.

본래 경북 희방사에 있던 종으로 1898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1683년에 사인 스님에 의해 제작된 조선시대 종이라고 한다. 무게는 300근에 달하며, 2000년 2월15일에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이 종은 종의 가장 윗부분인 용뉴에 쌍용(雙龍)을 배치해놓은 것이 특징이다.

상대에는 범자(梵字)를 2줄로 배치하여 장식하였고, 그 바로 아래에는 조선시대 후기 양식을 지닌 유곽이 있다. 유곽대는 도식화된 식물무늬로 채우고, 유곽 안에 있는 9개의 유두는 여섯 잎으로 된 꽃받침위에 둥근 꽃잎을 새겨 넣었다. 

하단에는 가는 두 줄의 띠를 둘렀고, 띠 안에 연꽃을 새겨놓았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승려가 공명첩을 가지게 되었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 있어, 종 연구와 더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한다.

 

이 동종은 지금은 사용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대종을 조성하기 전까지는 이 동종을 아침저녁으로 쳤다고 한다.

 

http://www.hwagyesa.org/bbs/content.php?co_id=1030&tabs=11#t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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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자료 : 출처 2010년 3월 5일 현재

 서울화계사동종 서울華溪寺銅鍾
 
지정번호
:
보물 제11-5호
 
지정연월일
:
2000년 2월 15일
 
시 대
:
조선시대, 숙종 9년(1683)
  규 모
:
종 높이 0.98m, 입지름 0.68m
  재 료
:
청동
  소 유 자
:
화계사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487번지 화계사
 
서울 화계사동종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思印) 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광무 2년(1898) 경상북도 영주시 희방사(喜方寺)에서 화계사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범종각 안에 놓여져 있다. 삼각산 아래에 자리한 화계사는 중종 17년(1523) 신월(信月)이 창건한 사찰이다. 광해군 10년(1618)에 화재로 전소된 것을, 이듬해 도월(道月)이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가문의 시주를 받아 중건하였고, 고종 3년(1866) 용선(龍船)과 범운(梵雲)이 흥선대원군의 시주로 중수하였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우선 크기는 비교적 작지만 그의 초기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포항 보경사 서운암동종(보물11-1)은 종신에 보살상이나 명문이 아닌 불경의 내용을 새긴 것이 가장 큰 특징이며, 양산 통도사동종(보물11-6)은 팔괘(八卦)를 문양으로 새기고 보통 유곽 안에 보통 9개씩의 유두를 새기는 것에서 벗어나 단 한 개만을 중앙에 새겨 넣었다. 또한 가장 전통적인 신라 범종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범종으로는 안성 청룡사동종(보물11-4)과 강화 동종(보물11-8)이 있다. 그밖에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에 두 마리 용을 조각해 둔 서울 화계사동종과 의왕 청계사동종(보물11-7), 그리고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그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표현한 문경 김룡사동종(보물11-2)과 홍천 수타사동종(보물11-3) 등이 그가 제작한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우수성을 인정받아 8구 모두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각기 독창성이 엿보이고 있어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정상부는 음통(音筒) 없이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인 용뉴(龍鈕)만 표현되었는데, 천판(天板) 위에 당당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였다. 그 아래 종의 어깨 부분에 있는 상대(上帶)는 2단으로 처리하여 '六字大明王眞言'과 破地獄眞言'이라 쓴 글자를 새겼다.

상대 아래에는 유곽(遊廓) 4좌가 있는데, 각각 사각형이며 6엽(葉)의 연화좌를 마련하고 여기에 유두(乳頭) 9개씩을 배치하였다. 유곽 사이에는 위패(位牌) 4좌를 새기고 그 안에 '宗面磬石', '王道 隆', '惠日長明', '法周沙界'라는 글씨를 각각 새겼는데, 안성 청룡사동종에도 이와 똑같은 글씨가 있다.

종신(鐘身)은 어깨에서 곡선을 그리며 둥그스름하게 내려오다 종복(鐘腹) 부분에서 종구(鐘口)에 이르기까지 수직선을 이루며 내려온다. 이처럼 종구 부분이 오므라들지 않고 수직선을 보이는 것은 중국 원(元) 동종의 특징으로, 조선시대에서 17세기 이후에 보편화된 형식이었다. 그리고 종신 아래 하대는 상대와 마찬가지로 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넝쿨 사이로 활짝 핀 꽃무늬가 어우러져 있어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종신 표면에는 보살상 등 그 밖의 다른 문양 장식은 없고, 명문을 양각으로 새겨 넣었을 뿐이다. 명문은 전부 200자 가까이 되며 동종의 제작 시기, 봉안 사찰, 무게 등과 더불어 동종 제작에 참여했던 시주자와 장인(匠人)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康熙二十二年癸亥四月日 慶尙道豊基地西面小伯山喜方寺大鐘重三百斤鑄成也 供養大施主…緣化秩 通政大夫畵員思印 湛衍 雪玉 淸允 祖信 厚英 別座勝旭 供養主 惠熙 惠海 化主 淸信居士 道善'











 

출처 : 서울 문화제 사이트

원본 : http://sca.visitseoul.net/korean/crafts/i_metalwork03005.htm

2010년 3월 5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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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자료 : 출처 2009년 4월 13일 현재

 

서울 화계사 동종
  서울 華溪寺 銅鍾
 

 

 

 

보물 제 11-5 호
康熙 22年 (조선 肅宗 9년, 1683)
총 높이 97.4cm, 종신 높이 74.5cm,
천판 지름 41.0cm, 용뉴 높이 17.4cm,
상대 폭 9.5cm, 하대 폭 8.5cm,
유곽대 폭 2.0cm, 유곽크기 20.5 x 18.3cm,
종입 지름 67.6cm, 종입 두께 6.4cm
주성장 ; 사인, 담행, 설옥, 청윤, 조신, 하영

서울 도봉구 수유동 화계사 

서울 화계사 동종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사인비구의 종 가운데 쌍룡뉴 도입의 첫번째 작품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사인비구(思印比丘)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종정에 일체쌍두의 용뉴를 구비하고, 반구형 천판 꼭대기에 원형 구멍 1개를 갖고 있다.

상대는 상하 2열로 된 범자대를 돌리고, 종복 4개소에 상대에 인접하여 사다리꼴의 유곽과 위패형이 배치되어 있는데, 유곽대는 당초문으로 장식하였고 9유는 연화좌 중앙에 돌기되어 있다.

보살상은 없고, 그 대신 2행 16자로 된 위패문양이 유곽 사이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위패문의 모양은 사찰에서 경동( ? 經憧 )에서 보이는 형태이다. 

하대는 화문대로 장식하였다.

이 종에는 다음돠 같은 양주명문이 있다.
康熙二十二年癸亥」 四月日慶尙道豊」 基地西面小白山喜」 方寺大鐘重三百斤」 鑄成也」 畵員 思仁 淡行 雪玉 淸允 祖信 夏英 
여기서 강희는 중국 청나라 聖祖 22년으로 조선 肅宗 9년(1683)에 해당한다. 즉 1683년 4월 경상도 풍기땅 서면에 있는 소백산 희방사대종으로 중량 300근을 들여 주성되었고, 주성장은 시인, 담행, 설옥, 청윤, 조신, 하영이다.
또한 승려가 공명첩(空名帖)을 가지게 되었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어, 종 연구와 더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경상도 희방사종이 어떤 사유로 서울 화계사에 왔는지는 알수 없으나 화계사 계시판에는
(대종은 70여년 전 조선조 고종 34년(1898), 경북 풍기군 희방사로부터 이전하여 왔으나 안치할 곳이없어 큰 방에 매달아 두었다가, 1972년 종각을 만들어 걸었다.)고 한다.
아마도 조선조에 화계사를 왕실의 願刹로 삼고, 종이 없어 여러가지 방법을 찾던 중 희방사종을 왕실의 힘으로 차출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필자가 희방사에 종답사를 갔을 때 희방사에는 「乾隆七年壬戌五月日」이라는 명문의 충청도 대흥사종이 있었는데 이 종은 조선 英祖 18년(1742)에 주성된 종이다. 아마도 희방사종이 서울 화계사로 온 후에 대흥사종을 가져다가 사용하였으리라 추측된다.(한국의 종 ; 염영하 지음)

자료출처 ;
한국의 범종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의 종 염영하 지음
범종 이호관 지음 대원사
문화재청
www.nohht.com.ne.kr
2009년 4월 13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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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자료 : 출처 2006년 10월 26일 현재

 
종    목 보물  제11호
 
명     칭 서울화계사동종(서울華溪寺銅鍾)
 
분     류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1구
 
지 정 일 2000.02.15
 
소 재 지 서울 강북구  수유동 487 화계사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화계사
 
관 리 자 강북구
 
설     명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종의 어깨 부분과 입구 부분에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몸통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위패 모양을 균형있게 배치하여 안정감을 준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승려가 공명첩을 가지게 되었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어, 종 연구와 더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문화재명 서울화계사동종
서울 화계사(華溪寺) 동종(銅鍾)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사인비구의 종 가운데 쌍룡뉴(雙龍뉴) 도입의 첫번째 작품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상대와 유곽, 위패, 하대의 균형있는 배치에서 오는 공간의 안정감이나 세부표현에서 느껴지는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명문내용 또한 조선후기 승려들이 공명첩(空名帖)을 얻게되는 당시의 사회상황을 암시해주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하겠다.

출처 : 문화재 지식정보센터 2006년 10월 26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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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사(華溪寺) 강희이십이년명(康熙二十二年銘) 범종(梵鍾)(2-77, 3-57)

 

소재지(所在地) : 서울특별시(特別市) 도봉구(道峯區) 수유동(水踰洞)

연 대(年 代) : 1683年(숙종(肅宗) 9年, 강희(康熙) 22年)

지정번호(指定番號) : 

실측치(實測値) : 총고(總高); 96.5cm, 용통고(甬筒高); cm, 상대폭(上帶幅); 9.5cm, 

유곽장(乳廓長); 20.5×18.3cm, 구경(口徑); 68cm, 종신고(鍾身高); 79cm, 용통경(甬筒徑); cm, 

하대폭(下帶幅); 8.5cm 종구후(鍾口厚); 6.4cm, 용뉴고(龍鈕高); 17.5cm, 천판경(天板徑); 41cm, 

유곽폭(乳廓幅); 2cm, 당좌경(撞座徑); cm

 

 범종(梵鍾) 정상(頂上)에는 일체쌍두(一體雙頭)의 용뉴(龍鈕)를 구비하고 정면(頂面)에 원공(圓孔) 1개(個)를 갖추고 있다.

 

 상대(上帶)는 상하(上下) 2열(列)로 된 범자대(梵字帶)를 돌리고 있으며 종복상부(鍾覆上部) 4개소(個所)에 사다리꼴의 유곽과 위패형(位牌形)을 배치하고 있는데, 유곽대는 당초문(唐草紋)으로 장식하였고, 9유두(乳頭)는 6판(판)의 연화좌(蓮座) 중앙(中央)에 돌기유(突起乳)를 설치하고 있다. 위패(位牌)의 형태(形態)는 사찰(寺刹)에서 경동(經憧)에서 보이는 형태이다. 동종의 하대는 화문(花紋)들로 만조(萬彫)장식을 하고 있다.

 

 범종(梵鍾)의 하복부(下腹部)에는 명문(銘文)이 양주(陽鑄)되어 있는데 그 내용(內容)은

 

 

라 되어 있어 숙종(肅宗) 9年(1683) 계해(癸亥)에 제작된 소백산(小白山) 희방사종(喜方寺

鍾)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간 함국의 범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