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Language Keeper
난 가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인접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곤 한다. 20여년을 살아온 동네이다 보니 처음 이사 왔을 때와는 딴판이 되었다. 길도 좋아지고 집들도 개량되고 학교나 공공 시설물도 많이 생기고 골목에는 재래시장도 들어서 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풍긴다. 그러나 거리에서 보이는 것이 꼭 마음에 드는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중의 하나가 새로운 표어나 사업에 어정쩡한 영어문구를 가져다 붙이는 관공서의 행태이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 담을 끼고 돌아 나오는 버스 정류장에 몇 년 전 그늘막이 설치되었 다. 그리고 그곳 옆면에 쓰인 “NAM-GU". 인천시 남구라는 뜻이다. 한글은 없다. 왜 그랬을까? 미국 로스앤젤레스시 남구가 되고 싶었을까?
정류장 그늘막 유리벽에는 공익광고 포스터들이 붙어있다. 그중 하나는 간접흡연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담배연기가 싫다고 하라면서 손바닥과 이마에 “Say No라고 말 하세요”라 적어 놓았다. Say No라는 자체가 “No라고 말 하세요”라는 의미인데 “Say No라고 말 하세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냥 “담배연기 싫습니다.” 라고 말 하라면 될 것을 “Say No"라 하라고 영문으로 표기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문의 의미를 모르는 국민은 담배연기로부터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그 아래 또 다른 포스터, ”외국에서 시집왔어女?“ 동남아에서 한국에 시집온 여성들을 보살피자는 포스터에 적힌 글귀다. 취지는 좋지만 한자를 읽기에 따라서는 그런 여성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정류장을 지나면 유치원이 나온다. 도로 옆 전봇대에는 동그라미 가운데에 30KM라는 속도 제한표지판이 붙어있다. 그리고 표지판 가장자리 반원 안에는 School Zone이라 쓰여 있다. 한글은 없다. 어느 나라 표지판인가?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걸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인가?
원의 위쪽에 “어린이 보호구역”이라 적고 밑에는 영문으로 적었어야 마땅하거늘 왜 이리 만들었는지. 로스앤젤레스에서 기증 받았나?
유치원을 지나면 초등학교가 나온다. 그런데 학교 정문으로 가는 길가 모퉁이에 “워킹스쿨버스 정류장 (Walking School Bus Stop)” 이라는 생소한 표지판이 붙어있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가는 장소라는 것을 TV에서 본 것 같은데 외국에도 같은 이름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참 어색하게 보인다. 앞으로 좀 더 가면 교문이 있다. 여기에는 또 다른 표지판이 붙어 있는데 이름하여 “그린푸드존 (Green Food Zone)"이라 적어 놓았다. 아이들의 안전 먹거리 지역이라는 뜻 이라는데 교문 앞 문구점에 널려있는 온갖 종류의 먹거리들이 과연 모두 안전한지 의심스럽다.
이런 표지들은 구태여 영문으로 하지 않아도 잘 생각하면 우리말 예쁜 이름을 지을 수 있을 텐데 이리 영문을 남발해야 하는지 아이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이리하는 작태가 아이들에게 창피스럽다.
교문을 지나 길을 두 번 건너면 소방서가 나온다. 그런데 소방서 간판 위를 보면 어이없는 모양새가 있다.
“119의 약속 Safe Korea".
이게 2010년에 소방방재청에서 국민에게 하는 약속이다. 어느 나라 국민에게? 물론 대한민국 국민에게 하는 약속이다. 안전한 대한민국은 어디가고 Safe Korea이다.
우리나라의 119에서는 이 영어를 해독할 수 있는 국민만 안전하게 지켜주고 이 영어의 의미를 아는 국민에게만 약속을 하겠다는 의미인가? 참 기가 찬다.
대한민국 국민 노릇 제대로 하려면 영어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눈에 뜨이는 시내버스 옆면에는 인천시의 상징과 공익광고가 붙어있다. 그런데 이게 또 "Fly Incheon", "Clean Incheon"이다. 역시 한글은 없다. 인천에도 외국인이 많으니 그들을 위한 광고라고 넘어가면 된다. 그런데 나도 한 사람의 인천 시민이라 그리 할 수가 없다. 인천을 깨끗이 하자고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것인지 인천이 깨끗하다고 자화자찬 하는 것인지. 인천 시민 중 그 영문으로 된 광고를 시에서 의도하는 대로 이해하는 시민이 몇%일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 이해력을 떠나 이곳은 대한민국 인천시가 아닌가.
경인고속도로 옆을 나란히 달리는 길로 접어든다.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놓인 전광판에서는 각종 정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온다. 어디가 막히고 어디까지 시간이 얼마가 거리고 등등. 그 중에 “휴대폰은 OFF, 안전벨트는 on"이라는 광고가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운전자 중에는 OFF와 on이라는 영문을 못 읽거나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냥 ”휴대폰은 끄고 안전벨트는 맵시다“라든지 아니면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다른 강조법을 쓰면 될 일을 100% 외국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100% 내국인을 위한 것도 아닌 이런 어정쩡한 표어를 만드는 것은 대중을 위한다기 보다는 그 표어를 만든 사람의 머리를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닌지 심히 유감스럽다.
눈을 돌리니 이번에는 내가 걷는 길의 전광판에 이렇게 쓰여 있다. ”끼어들기 NO" 그리고 도로 표지판에는 저쪽으로 가면 “센트럴 파크”가 나온다고 표기되어 있다. 그냥 “중앙공원”이 더 친근감이 있는데 인천에 뉴욕을 담고 싶었나?
집 근처에 오니 자투리땅에 주차장을 만들어 준다며 “녹색주차장사업”이라면 이해가 쉬울 일을 “그린파킹사업”이라는 현수막을 걸어 놓았다.
이 모든 것은 어떤 기업체의 상업광고도 아니고 국민 중 일부 계층만을 위한 특정광고도 아니며 어떤 사설 단체의 이름도 아니다. 영어를 이해하든 못하든 간에 우리나라 국민 전체를 위한 공익광고이고 표지판이며 모두 관공서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물론 영어는 세계인에게 가장 중요한 언어가 되었고 우리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또한 우리말만 가지고는 말을 이어가기 어려운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행태는 아니듯 싶다. 우리말을 우선 쓰고 여기에 맞는 영어를 병기를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우리나라 각 관공서에는 모든 사업명이나 공문서에서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우리말 지킴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어느 날 이들의 직책이 동사무소가 주민센터로 바뀐 것처럼 “한국 Language Keeper"로 바뀌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20010년 12월 열 하룻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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