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흐름속으로/내가 쓰는 이야기

존댓말 풍년

korman 2012. 3. 17. 17:27

 

 

 존댓말 풍년

 

지난겨울이라고 말하기에는 봄이 아직 좀 어설픈 것 같다. 햇빛이 잘 드는 베란다에 놓여있는 철쭉 화분에서는 작은 꽃망울이 생기기 시작 하였지만 밖에는 아직 겨울의 찬바람과 따스한 봄기운이 시간의 흐름을 두고 힘자랑을 하고 있다. 이제 봄이 모퉁이에 왔나 생각하는 사이에 옷깃을 여며야 할 만큼의 한기가 쌩하고 지나간다. 지나간 겨울바람이 다시 돌아오려면 계절이 세 번은 바뀌어야 하겠지만 세월은 시위를 떠난 화살만큼 빠르다 하였으니 좀 있다가 그저 혼잣말로 눈 몇 번 껌뻑였는데 이 친구 벌써 내 옷 속을 파고드는구나 할 것이다.

 

함박눈이 흠뻑 내리던 주말 이른 아침. “오늘 아침에는 왠지 진한 커피 한 잔을 곁들여 빵이 먹고 싶다”는 생각에 이끌려 큰길가의 빵가게를 찾았다. 내 느낌만 그러할까. 눈 오는 날 이른 아침의 빵 굽는 냄새는 초겨울 첫 서리가 내려앉은 새벽의 낙엽을 밟으며 맡는 커피냄새 만큼이나 좋다. 아침 허기를 느끼기에 충분한 빵 냄새를 맡으며 식빵 하나를 집어 들고 다가선 계산대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듯 소녀티를 조금 벗어난 아가씨가 아침 인사를 건네며 “2천원이십니다” 라고 예쁜 미소와 함께 앞에 놓인 계산기에서 자동으로 뽑아져 나오는 영수증을 내밀었다.

영수증을 받아들면서 난 순간적으로 그녀의 아침 기분을 다치지 않을 만큼 최대한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얼마얼마이십니다 라고 존대해서 말 하는 것은 본부에서 교육받은 것인가요?”.

난 그 빵집이 국내 굴지의 제빵회사 체인이기 때문에 손님에게 존대하는 말들을 교육시키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리 물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냥 자기가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2천원이십니다” 라고 말 하는 것은 손님에 대한 존대가 아니라 돈에 대한 존대라고 하였더니 그녀는 몰랐다고 하면서 그럼 어찌 이야기해야 손님에 대한 존대가 되느냐 물었다. “그냥 2천원입니다라고하세요” 하고는 다시 눈 오는 길가로 나섰다.

 

요새 백화점이나 마트 또는 통신사점포 등 고객을 상대하는 업소들이나 온라인 상담원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고객에게 친절히 하고 고객을 왕으로 모신다는 개념에선지 존댓말을 남용하여 고객을 존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상품이나 돈에 대하여 까지 존대를 하는 직원들을 많이 대하게 된다. “저희 냉장고 문은 자동으로 닫히시고요...”, “이 전화기는 통화가 잘 되시고요...”, 이 청소기는 전기료가 적게 드시고요...“, ”이 옷은 천 자체가 다르세요“ 등등. 언제부터 이런 존댓말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디를 가나 잘못된 존댓말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었다. 존댓말을 잘 한다는 것은 고객을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는데 없어서는 안 될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이상한 존댓말은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아마도 서비스 경쟁 사회에서 회사들이나 점포들이 직원들에게 올바른 존댓말은 안 가르치고 친절만을 강조한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마트의 계산대에서 빵집 아가씨에게 하였던 말을 하려하자 마누라가 옷깃을 잡아끈다. “뭔 소리를 들으려고?” 그냥 못이기는 체, 마누라에게 끌려가는 체 마트를 나왔지만 말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저녁 아이들과 소주 한잔 하는데 사위 녀석이 “저희나라는” 이라고 한다. 때는 이 때다 싶어 “이 사람아 나라는 낮추는 게 아냐. 우리나라라고 해야 맞아." 짜르르 목을 타고 흐르는 소주 한잔에 마트에서 들은 이상한 존댓말이 녹아내린다.

 

2012년 3월 열엿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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