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울림 속으로/우리 종 공부하기

중생구제 원력 서린 범종

korman 2014. 12. 30. 17:48


해학이란 무엇일까. 특히 불교 미술에서 나타나는 해학은 어떠한 유형일까. 불교미술에 나타난 해학은 부처님의 사상을 더욱 극대화하여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의 원을 그 즉시, 그리고 빠짐없이 들어주려고 조형화된 듯 한 느낌을 받는다. 고통 받는 사람에겐 고통이 사라지고 불이익 받는 사람에겐 평등함과 대등함을 느끼게 하며 중생이 원하는 바를 꼭 이루게 하여야만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해학이라는 요소로 나타나게 한다. 더러는 과장되고 더러는 코믹하면서도 보는 사람이 느끼는 편안한 감정 속에 나타나는 종교적 의미, 이것이 불교미술의 해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처님 음성’ 天地를 울리다


  대중들을 ‘바른 깨달음’ 길 가도록 종 울려

사찰의 누각이나 종각에 달린 범종은 부처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그 종소리 또한 부처님의 음성을 상징하고 있다. 경주박물관의 신라 성덕대왕신종(771년) 명문에는 “대음(大音)은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곳에 진동하고 있지만 이를 아무리 듣고자하여도 도저히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으나 신종(神鍾)을 높이 달아 일승(一乘)의 원음(圓音)을 깨닫게 하였다.” 라고 하여 범종의 소리가 곧 부처님의 음성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또한 사찰에서는 아침, 저녁 예불시 범종을 울리는 데 아침에 28번을 울려 지옥, 아귀, 축생, 인간뿐만 아니라 욕계6천과 색계18천까지의 하늘에 울려 중생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저녁 예불시 33번을 울려 도리천을 중심으로 한 동, 남, 서, 북 각 8천 등 33천 하늘에 부처님 음성을 들리게 하여 우주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 모든 고통을 없애고 일체 중생이 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는 깊은 뜻이 있다.


스님들이 새벽에 종을 칠 때 하는 종성(鐘聲)은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하여 철위산의 어두움 모두 다 밝아지며 삼악도(三惡道)의 고통을 여의고 칼산지옥 파괴되어 일체 중생이 바른 깨달음 이루어지이다’와 저녁에 종을 칠 하는 ‘이 종소리 듣고 번뇌를 끊어 지혜는 널리 증장(增長)되고 보리심을 발하여서 지옥을 떠나고 삼계(三界)를 벗어나 원컨대 부처 이루어 중생을 제도하여 지이다’하여 종소리인 부처님의 음성으로 능히 철위산의 어두움을 다 밝아지게 하여, 고통은 사라지게 하며, 지옥은 깨어지고, 번뇌는 끊어지고, 지혜는 자라서 일체 중생이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제도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파지옥진언(破地獄眞言)을 하여 종성은 부처님의 음성으로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여 즐거움의 세계인 극락으로 나아가게 함에 그 뜻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만큼 사찰에서 범종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크다 하겠다.
우리나라 범종에만 나타나는 한 마리의 용은 부릅뜬 눈으로 위엄을 갖추고 있으며 등에는 만파식적을 형상화한 음통을 지니고 있어 호국안민(護國安民)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종의 몸에는 연곽(蓮廓)이 있어 동남서북 사방에 각각 9개의 연꽃 봉오리(蓮) 중 그 가운데에 부처님이 계시고 주변 8개의 연꽃봉오리는 밀교의 보살들이 부처님을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36개의 연꽃봉오리 있다. 종의 몸체 또한 중방 연화장 세계의 비로자나불로 밀교의 37존불(尊佛)을 형상화 하였다.

그래서 종의 몸 여백에는 비천상(飛天像)이나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또는 공양자상(供養者像)을 장식하여 일승의 원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는 범종 자체인 부처님께 예경하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부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였던 우리 조상들의 염원을 범종이라는 조형물로 나타내어 우리만의 독창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범종’ 인식 왕실 안녕 기원 변화

이러한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신라시대에는 신라인들의 부처님을 향한 지극한 신앙심이 범종에 투영되었다. 범종인 부처님께 향과 꽃 등 공양을 올리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비천 공양자상이 경건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물질적 풍요로 신앙심을 구가하던 고려에는 범종 표면에 부처님과 보살님, 공양 또는 주악 비천상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많이 나타나 범종이 부처님이란 인식이 엷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문양이 묘사되어 풍부한 해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불교가 탄압을 받던 조선에서는 범종이 부처님이라는 인식은 사라져 버렸다. 불교 소생의 자구책으로 범종의 표면에 왕실의 안녕을 바라는 원패(願牌)와 원하는 내용이 이루어지도록 합장한 4분의 보살을 입상으로 나타내는 경우와 종의 하대에 용의 문양을 넣기도 하였다. 중국 명나라의 종의 영향으로 아예 용뉴에는 두 마리의 용이 나타나고 연뢰와 연곽은 사라져 버린 것도 많다.

이러하듯 신앙심에 따라서 범종의 문양이 달리 나타나는 시대적 특질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중생은 부처님을 공경하고 부처님과 보살 또한 중생을 구제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다양한 형태의 문양이 해학적으로 나타난다.

먼저 현존하는 범종 가운데 제일 오래된 상원사 동종(725년)의 용뉴를 보자. 부릅뜬 눈과 쫑긋 세운 귀는 위엄을 갖추고 뒷발로 천판을 힘차게 딛고 등에 만파식적을 짊어지고 앞발로 푸른 파도를 해치며 솟구쳐 오르는 용은 범종의 무게에 아랑곳 하지 않는 듯 ‘이것쯤이야’ 하며 가볍게 들어 올린다. 신라인의 기백과 보는 이로 하여금 무겁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는 이중적 해학미가 돋보인다.

 

춘천博 소장 범종, 거미줄로 인드라망 표현

다음은 춘천박물관에 있는 횡성 출토 고려후기 범종을 보자. 먼저 기가 막힌 발상에 감탄한다. 불보살의 중생구제의 원력이 얼마나 큰지를 이 범종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과 보살님이 미물인 거미로 화현하여 오른쪽에 당좌로 표현한 거미줄을 치고 많은 중생이 거미줄에 걸려들길 바란다.

걸려든 중생에게 줄 선물은 연꽃 봉오리인양 한손으로 들고 날아가는 듯 빠른 동작으로 거미줄로 향한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한 중생도 놓칠 수 없어 손가락, 발가락이 물갈퀴 같은 엷은 막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신체적 특징이다. 이와 같이 이 범종의 거미보살 또한 서원이 견고하여 모든 중생을 건지기 위해 거미줄을 친다. 인드라망의 그물처럼 우주에 거미줄을 치고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건진다. 참으로 해학적이며 교리적인 표현이다.

또한 내소사 범종의 문양을 보면 중생의 원을 들어주는데 일초가 급하다. 원을 들어주시는 보살님이 종소리를 듣고 천상의 승용차인 구름을 타고 얼마나 바삐 내려 오셨는지 항상 머리위에 머무르는 천상의 일산(天蓋)이 ‘저도 같이 가자’며 급히 쫓아와 흩날리고 있다. 중생이 원하는 바를 꼭 이루게 하여야만 한다는 보살님의 의무감 같은 해학이 넘쳐흐른다.

우리의 할머니들은 산길을 가시다가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합장 예경을 하시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 범종소리에 마음속으로 부처님의 형상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로 말미암아 범종은 곧 부처님의 음성을 형상화한 또 다른 모습의 부처님으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불자들이 범종 불사에 앞 다투어 참여하는 것은 범종으로 또 다른 모습의 부처님을 조성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권중서 / 조계종 전문포교사

[불교신문 2431호/ 6월4일자]

발췌 : 불교신문 2014년 12월 30일 현재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88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