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가 진짜 너무하십니다
참기름이라는 식용유가 있다. 전통적으로 최고의 기름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수입품까지 가세한 수많은 종류의 기름이 있어 현재 각 가정의 부엌에서 그 존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우리 집에서는 ‘참’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가짜가 나오더니만 이에 대항하는 많은 형용사가 ‘참’을 호위하듯 붙여지기 시작하였다. 순참기름, 진짜참기름, 100%참기름, 진짜순참기름, 100%국산진짜순참기름,..... 이렇게 진화하는 ‘참’을 보면서 예전 중학교 운동회 때의 영어선생님 생각이 났다. 운동장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라인선새끼줄금밖으로 나가주세요.”라고 외치던.
우리나라 말에는 세계의 다른 언어들이 쫓아오지 못할 만큼의 순간순간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단어들이 있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하면 우리는 같은 계열의 색을 묘사하는데도 이런 것들이 다른 나라 말에도 있을까 할 정도로 많은 표현들을 쓰고 있다. 파란색을 하나 놓고도 파랗다, 새파랗다, 퍼렇다, 푸르스름하다, 시퍼렇다, 시푸르둥둥하다 등등. 이런 표현들은 색의 연하고 진함을 떠나 각기 다른 느낌을 주는 표현들이다. 이런 것들을 한자어나 영어로 표기한다면 어찌 번역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 많은 형용사들을 뒷받침하는 말이 한 가지로 집약되어 다른 더 좋은 표현들은 잊혀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5월에 한 방송사에서 가족들과 같이 한강시민공원을 찾은 사람에게 한 말씀 하시라고 마이크를 가져가자 “날씨가 너무 더워 가족과 같이 나왔는데 너무 시원하고 아이들도 너무 좋아하고 하늘도 너무 파래서 너무 좋습니다.”라고 말 하는 것을 들었다. 한 번 듣고 그냥 흘려버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너무’를 너무 많이 하시는지라 이제까지 기억하게 되었다. 너무씩이나 찾아야 할 더위도 아니었지만 더 좋은 표현들을 놔두고 많고 적음, 좋고 나쁨, 높고 낮음 등을 오로지 습관적으로 ‘너무’하나에 기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세월까지 찾지 않아도 이 ‘너무’라는 부사는 좋고 나쁨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방송에서 조차도,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사용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진실 된 마음으로 고마움을 표해야 할 말에 부정적 언사인 “너무 감사해요.”라고 하는 것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감사해서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라고 한다면 모를까.
지금까지 교육받은 분들은 ‘너무’라는 부사는 부정문에만 사용하는 것이라 배웠다. 그러나 미취학 아이들에게는 이제부터 부정, 긍정을 가리지 말고 사용할 수 있다고 가르쳐야 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올 6월에 이 ‘너무’라는 말에 긍정문 사용을 허가하였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긍정문에도 ‘너무’를 사용하기 때문에 원래의 뜻을 고집하기에 너무 늦었다.”라고 하였다나. 지속적인 교육이나 계몽을 통하여 올바른 사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그러니 그리하자는 것이라 참(너무) 일을 쉽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면 언젠가는 역전이 아니라 역전앞이 표준어가 되고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축구를 차야하고 송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송구를 던진다고 해야 옳을 일이다. 하기야 며칠 전 야구 중계를 보다 중계 아나운서가 “3루수가 1루수에게 송구를 잘 던졌다.”라 하여 혼자 웃은 일이 있다.
좀 있으면 참기름에도 “너무100%진짜순참기름”이라는 이름이 탄생하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 본다. 글을 쓰는 도중에 배터리가 필요하여 편의점을 찾았는데 계산원이 “1,000원 이십니다.”한다.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꿀꺽 삼키고 천원지폐 한 장을 건네고 나왔다. “너무가 진짜 너무하십니다.”
2015년 10월 15일
하늘빛
http://blog.daum.net/ring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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